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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한국불교를 깨운 맑은 바람 ‘돈점논쟁’

기자명 김택근

▲ 성철 스님이 주장한 돈오돈수는 잠자던 한국불교를 깨웠다. 수행과 정진의 개벽을 알린 것이다. 사진은 성철스님기념관 내 설법상.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의 돈오돈수 이론은 외적인 모순과 억압 속에 와해되어가는 승단의 재건을 위한 이념적 토대의 필요성이라는 한국불교의 시대적 요청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비유컨대 세 종류의 자비의 그물을 가지고 과거·현재·미래의 나고 죽음의 바다에 펴서 작은 그물로는 새우와 조개를 건지고(人天小乘敎와 같음), 중간 그물로는 방어와 송어를 건지고(緣覺中乘敎와 같음), 큰 그물로는 고래와 큰 자라를 건져서(大乘圓頓敎와 같음) 함께 열반의 언덕에 두는 것과 같으니, 이는 가르침의 순서이다. 그 가운데 한 물건이 있어서, 갈기는 시뻘건 불과 같고 발톱은 무쇠창날과 같으며, 눈은 햇빛을 쏘고 입으로는 바람과 우레를 내뿜는다. 몸을 뒤쳐 한번 구르면 흰 물결이 하늘에 닿고 산과 강이 진동하며, 해와 달이 어두워진다. 세 가지 그물을 뛰어넘어 바로 구름 위로 올라가서 감로수를 퍼부어 뭇 생명들에게 이로움을 주니(바로 조사문중의 교외별전의 기틀임), 이는 선이 교와 다른 점이다.’ (서산대사 ‘선교결(禪敎訣)’)

서산대사가 제자인 유정에게 주는 가르침이다. 선과 교가 이렇듯 큰 차이가 있음을 설파하는 비유가 장쾌하다. 성철은 ‘선교결’을 서산 만년의 명저로 평가했다. ‘교외별전’이란 교외(敎外)라 하여 불교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은 이론이 아닌 실천에 있음을 이름이었고, 이는 교가 아닌 선으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존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니 가섭이 미소로 화답한 것이 바로 교외별전의 시작이었다. 서산은 조사들의 교외별전 사례를 열거했다.

달마의 ‘툭 트이어 성(聖)이랄 것도 없다’, 육조의 ‘선악을 생각하지 말라’, 회양의 ‘수레가 멈추니 소를 채찍질한다’, 행사의 ‘여능의 쌀값’, 마조의 ‘서쪽 강물을 다 마심’, 석두의 ‘불법을 모른다’, 운문의 ‘호떡’, 조주의 ‘차 마심’, 현사의 ‘흰 종이’, 설봉의 ‘공 굴림’, 화산의 ‘북 두드림’, 도오의 ‘춤을 춤’ 등이다. 서산은 이를 “옛 부처와 옛 조사들이 교외별전의 곡조를 노래한 것”이라 했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서옹 스님도 한국 승려들은 서산 스님의 문손이며 서산은 태고 스님의 법을 이었다고 단언했다. 조사선 5조 가풍 어디를 뒤져봐도 돈오점수를 주장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서옹은 돈오돈수라야 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돈오돈수의 돈오는 ‘진여자성을 아는 것’이고 돈오점수의 돈오는 ‘진여자성을 지해로서 아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조사선은 본래면목 그 자리로 완전히 전환하는 것인데, 지해(知解) 차원에서 그 자리를 향해서 수행해 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경’ 1997년 가을호)

이렇듯 한국에서 임제정맥은 면면히 흘러내려왔다. 그러다 이미 살펴본 대로 비구와 대처승간에 종조 선점 다툼에서 보조가 솟아오르고 이로 인해 종조와 더불어 종지(宗旨) 논쟁이 벌어졌다. 그것의 연장선상에 돈점논쟁이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성철은 돈오돈수론을 펼쳐 승려들의 삿됨과 나태함을 꾸짖었다. ‘한 소식’을 내세워 성불했다고 주장자를 휘두르는 무리에게 깨달음의 경계를 정확히 알리려 했다.

“대승경전들이 승단불교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대중을 위한 불교의 실현이라는 불교의 시대사적 과제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사회현실적 필요에서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성철의 돈오돈수 이론은 외적인 모순과 억압 속에 와해되어가는 승단의 재건을 위한 이념적 토대의 필요성이라는 한국불교의 시대적 요청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김종인 ‘한국불교 현실에 대한 성철의 대응과 돈오돈수’)

성철은 깨달았지만 완전하지 못하여 점차 닦고 있다는, 결국 아만에 빠져있는 선승들의 빠져나갈 구멍을 틀어막았다. ‘견성 아닌 견성’을 내리친 것이다. 성철은 깨달은 후 다시 망상을 끊고 습기를 제거해야 한다는 지눌의 ‘목우행’도 이렇게 비판했다.

“거울의 본성인 밝음은 먼지가 있고 없음과 상관없듯 중생의 본성인 진여자성은 번뇌가 있고 없음과 상관없다. 보조 스님은 이를 돈오견성이라 하였고, 먼지를 제거하듯 망상을 제거하는 것을 일러 오후목우행(悟後牧牛行)이라 했다. 그러나 종문의 목우행은 그렇지 않다. 보임무심(保任無心), 먼지를 완전히 닦아 삼라만상을 자유자재로 비추는 맑은 거울을 잘 보전하는 것을 일러 보임과 목우행이라 했다. 결코 망상을 끊고 습기를 제거하는 것을 목우행이라 하지 않았다. 그러니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선문의 정안종사들과 보조 스님의 견해는 분명 다르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할 일도 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깨친 다음에 보임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성철은 단호하게 밝혔다.

“종문에서의 보임이란 자유자재한 대무심삼매(大無心三昧)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 이는 일체의 번뇌망상이 끊어져 어떤 가르침도 방편도 필요치 않다. 따라서 ‘깨달은 뒤에 망상을 하나하나 끊는 것이 보임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병이 여전한 자를 온존한 이로 여기는 과오이다. 또한 종문에서의 견성이란 구경각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견성한 후에도 다시 닦음이 필요하다’ 한다면 이는 병 없는 이를 병자라 하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선문정로’)

불교학자 도대현도 성철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돈오돈수에서 ‘돈수’의 의미는 ‘깨치기 위한 수행의 노력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깨침 이전에는 목숨 바칠 각오로 수행해야 하지만, 돈오 후에는 부처 경지로 되므로 ‘더 이상 수행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으로 돈수인 것이다. 또한 돈오 이전의 수행 때문에 돈수라고 할 수 없다는 비판도 있으나, 이는 오전수행(悟前修行)이고 돈오와 짝할 수 있는 말은 오로지 돈수 뿐이며, 견성하는 순간에 ‘불각(不覺)의 수행도 마쳐진다’는 뜻이다.” (도대현 ‘성철 선사상’) 

성철이 돈오돈수론을 주창하자 성철을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조계종 중흥교조로 떠받든 지눌선사의 돈오점수론을 손바닥 뒤집듯 했다며 불쾌해했다.

“어떻게든 조상의 훌륭한 점을 부각시켜야지 왜 자꾸 잘못을 캐내려고 야단인가.”
“성철의 논리는 종파주의이며 돈오돈수는 특수한 수도이론에 불과하다.”
“돈오돈수론은 수행론이 아닌 견성의 정의에 불과하다.”
“오로지 화두 근본주의에 기대고 있다.”
“성철이 인용한 문헌과 문구들은 극히 편파적으로 가려 뽑은 것들이다.”

그러면서 그동안 지눌을 따르며 수행한 한국불교는 무엇이냐며 대들었다. “그럼 성철은 돈오돈수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성철은 물러서지 않았다. 깨달은 만큼 전해야 했다. 바르게 깨달았으면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라 했지 않은가.

“보조 이후로 대선지식이 출현하지 못한 것은 보조 스님의 ‘수심결’ 때문이다. ‘수심결’의 돈오점수 사상 때문에 지해의 병이 들어 선을 닦는다는 이들이 참공부를 못한 까닭이다. 지해의 병이 걸리면 바로 들어가려해도 갈 수가 없다. 지해의 병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사법(邪法)을 깨뜨려 정법을 지키는 것, 사법을 깨뜨려 정법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 그것이 자비이자 불제자의 사명이다.”

참선 중에 떠오른 기특한 생각 하나로 깨달았다며 스스로 제 이름을 높이는 선승들이 얼마나 많은가. 결국 견성에 이르지 못하고 성불한 것으로 착각하여 지옥으로 떨어진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기에 삿된 가르침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만인을 망치게 하니 그 죄업이 얼마나 클 것인가. 그것이 바로 성철이 돈오돈수를 주장하며 깨달음의 경계를 분명히 밝히는 이유였다. 성철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사람들이 답답했다. 이런저런 말씨름을 하지 말고 직접 자신이 이른 대로 수행해보라 일갈했다.

“자기 경험과 소견에 맞지 않는다고 이런저런 의심으로 믿질 않는데,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 하면 된다. 단박에 여래의 땅을 밟는 이런 묘방이 있음을 알고 속는 셈 치고라도 한번 해보라. 해보면 부처님 말씀이 거짓이 아니고, 역대 조사님들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고, 해인사 노장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돈점 논쟁은 1600년 불교사에 그 자체로 청량한 바람이었다. 아무도 감히 선통을 두고 사상적 제동을 건 사람이 없었다. 성철의 선사상은 종조와 선맥에 대한 성찰을 하게 만들었다. 대중은 돈점 논쟁을 숨죽이며 들었다. 더러는 경전을 다시 들추거나 옛 거울을 찾았으니, 이는 잠자는 한국불교를 깨우는 죽비였다. 보조사상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성철과 돈오돈수에 대한 검증은 필수적인 작업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검증작업을 통해 돈오돈수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불도와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성철이 우리 곁에 있음이다.

“성철 스님은 1981년 출판한 『선문정로』에서 ‘몹쓸 나무가 뜰 안에 났으니 베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여 지눌의 돈오점수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이것이 인구에 회자되다가 10년 후인 1990년에 비로소 학술적으로 논의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이 논쟁은 선종 법맥관계의 사자상승(師資相承)과 사상적인 충실도에 있어서, 보우와 그의 돈오돈수가 옳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 지눌을 지지하는 송광사 측과 성철 스님을 따르는 해인사라는 양강(兩强)간의 대립구도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 속에서 우리나라의 선사상은 중국 선사상을 능가하는 정치(精緻)함을 구현하게 되어 사상적인 큰 발전을 이룩한다.” (자현 스님)

성철은 깨친 후 최고의 위치에 안주하지 않았다. 존경과 경배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몸은 산 속에 있었지만, 선사상은 속세의 광장으로 내려 보냈다. 그리고 숱한 학자와 승려들로부터 화살을 맞았다. 하지만 성철 선사상은 무수한 화살자국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자 일획 달라진 게 없다. 화살자국은 상처가 아니라 성철사상을 확인해보려는 두드림의 징표였다. 자신의 깨침을 인가해 줄 종장(宗匠)을 찾을 수 없었기에 성철은 선맥과 깨달음의 실체를 더 세심하게 더듬었다. 그리고 고불고조의 옛길을 찾아냈다. 그것은 결국 새 길이었다. 후학에게 길을 펼쳐 보인 성철은 선가의 귀감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36호 / 2016년 3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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