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서정춘의 30년 전-1959년 겨울
29. 서정춘의 30년 전-1959년 겨울
  • 김형중
  • 승인 2016.03.2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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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삶 통찰한 간결한 시어로
고향 떠난 이들 아픈 과거 응축

먼 길 떠나가는 아들에게 당부
밥먹을 수 있는 곳이 곧 ‘고향’
굶는 사람에겐 밥이 최고 법문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배불리 먹고 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배가 고파서 고향을 떠나는 아들에게 새로운 고향을 일러주는 아버지의 눈물 나는 말씀이다. 배불리 잘 먹고 사는 곳이 극락정토이고, 배고픈 곳이 지옥이다. 고향은 어머니의 젖가슴과 같이 포근한 편안한 곳이다. 객지생활을 하는 나그네에게 고향은 항상 마음속에 그리는 이상향이다.

서정춘의 ‘30년 전-1959년 겨울’은 30년 전 열아홉 살에 고향 전남 순천을 떠나 서울행 야간열차를 탈 때 가난한 아버지가 들려준 말씀을, 30년이 지나 나이 쉰 살에 회상하면서 그것을 시화한 작품이다. 밥먹기가 어려웠던 1959년대 우리나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준 당부의 말씀이다.

1959년 우리나라 상황은 6·25전쟁 후의 파괴와 피폐함 그것이었다. 그때는 세끼 밥먹고 사는 일이 인간의 대사였다. 살아남는 일, 즉 생존이 삶의 큰 목표요 가치였다. 춥고 배고픈 시절을 견뎌온 서정춘 시인의 ‘1959년 겨울’ 시는 현실의 삶에 대한 통찰을 간결한 시어로 굶주림 때문에 고향을 떠났던 이들의 아픈 과거가 응축되어 있다.

‘벽암록’에서 어떤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뛰어넘는 말씀입니까?” 운문선사가 대답했다. “호떡(胡餠)이다” 하였다. 중생이 배가 고프면 밥을 주고, 고통 속에서 시달리면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밥을 굶은 거지에게 팔만대장경은 휴짓조각이다. 밥이 부처나 조사를 능가하고 초월할 수 있는 최고의 법문인 것이다.

선어록에 보면 선문답의 소재로 쌀, 보리, 무, 마(삼), 똥 덩어리, 호떡 등과 같이 농경사회에서 의식주와 관계있는 것들이 자주 등장한다. ‘청원선사의 여릉의 쌀값’ ‘조주선사의 진주의 무’ ‘동산선사의 마삼근’ 등이다.

농경사회에서 민초들의 화두는 밥 즉, 호떡이다. 먹고사는 일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기본이고, 국가의 대사이다. 중생이 배가 고프면 호떡을 입에 물려주고, 고통을 받고 있으면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불법이다. 부처님도 나라님도 백성이 먹고 사는 일상생활을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불가에서 고향의 의미는 이상향이다. 피안과 깨달음을 상징한다. 깨달음의 자리가 부처요 정토요 피안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지금 내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그 자리(卽今)가 내 고향이다. 이 자리를 떠나서 내가 설 자리는 없다. 불타고 있는 이 세상을 떠나서 정토를 찾을 수 없다. 화택이 불만 꺼지면 시원한 집이 된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딛고 일어나라”고 했다. 한용운 스님은 오도송에 “대장부가 이르는 곳이 고향이다”고 하였고, 서산대사도 “눈에 비치는 모든 봄 산이 다 내 고향이로구나”라고 읊었다. 즉 이 세상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아름다운 땅이고, 인간이 부처인 것이다. 부처와 극락정토를 먼 곳에서 찾으면 결코 찾을 수 없다.

배가 고파서 굶주리면 살 수가 없다. 지옥이다. 배가 부르면 살 수가 있다. 부처가 되고, 선량(選良)이 되는 것은 그다음 문제다. 각자 깜냥에 따라 해도 그만이고 못 해도 그만이다. 시인은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 행복의 땅인 고향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선사의 오도송의 공통점은 “내가 이르는 곳마다 내 집이로다” “내 고향이 아닌 곳이 없다” “내가 처한 자리에서 주인의식을 가지면 그곳이 정토이다”라고 하였다.

“봄을 찾아 산과 들을 헤매다 지쳐 집에 돌아와 보니, 봄이 처마 끝에 와 있다”고 노래한 선사의 오도송이 있다.

김형중 동대부여중 교장·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


[1337호 / 2016년 3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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