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은 정말 효녀였나
심청은 정말 효녀였나
  • 이재형 국장
  • 승인 2016.04.1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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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전’은 효 찬양 아닌
당대 효관념 비판한 소설
의심할 때 선의 가치 빛나

‘심청전’은 우리에게 친숙한 고전소설이다.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시대의 효 윤리를 대표하는 소설로도 익숙하다. 학창시절 그리 배우고, 세상 사람들도 그리 얘기하기에 누구라도 이러한 이해의 틀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이진경 과학기술대 교수가 쓴 ‘파격의 고전’(글항아리)이 놀라운 점도 여기에 있다. 그는 당연시 여겼던 내용들에 의문을 던진다.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바다에 몸을 던진다면 그걸 효라고 할 수 있을까? 심청은 왜 자신을 아껴주는 장승상 댁 부인이 쌀 300석을 내준다는 제의도 거절하면서까지 임당수에 뛰어들었을까? 심청은 왜 되살아난 뒤 홀로된 아버지를 찾아 고향에 가지 않았을까?

이 교수는 이러한 의문들을 움켜쥐고 원전으로 파고들었다. 작품 안에서 표명되는 윤리적 이념과 고정관념에도 매몰되지 않았다. 그 결과 이 교수는 기존의 통념과는 다른 획기적인 ‘심청전’ 해석을 제시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심청전’은 단순히 효를 찬양한 소설이 아니다. 역설적인 방식으로 당대의 효 관념을 비판하고, 새로운 효의 관념을 제안한 작품이다.

조선시대는 부모를 위해 자식이 살을 베고 목숨 바치는 게 ‘인륜’이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에게 따라 죽을 것을 은근히 요구하는 것도 ‘인륜’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이런 시대에 ‘심청전’은 기발한 반기를 들었다. 효에 대한 요구를 과도하게 준수함으로써 그런 요구 자체를 어이없는 명령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심청전’에 일반적인 효와 어긋나는 내용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교수가 ‘심청전’에서 특히 주목한 것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과감하게 떠나 다른 세계로 들어가려는 심청의 결단이다. 그에 따르면 심청이 굳이 임당수에 뛰어든 것도, 되살아난 뒤 부친을 찾아가지 않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효라는 눈먼 도덕이 지배하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눈먼 아버지와 눈먼 도덕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눈먼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심청은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대신 아버지를 비롯한 앞 못보는 이들, 즉 눈먼 삶을 사는 이들을 집에서 불러낸다. 익숙하지만 작은 세계에서 낯설지만 넓은 세계로 불러내 눈먼 삶에서 눈을 뜨게 하려 한다. ‘심청전’은 눈먼 이들을 눈뜨게 하는 것이 진정한 효임을 설파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청전의 불교적인 요소도 스님과 연꽃이 등장해서가 아니다. 무명과 무지를 뜻하는 눈멂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점이 오히려 불교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 이재형 국장
파격은 평가의 척도와 틀을 ‘깨뜨리는’ 일이다. 이는 선이 지향하는 ‘깨침’과도 맞닿아있다. 스승이 제자들을 위해 불살생계를 어기고, 상대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도 고정관념을 깨려는 의도다. 스스로를 옭아맨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참선을 하면 마음이 편안하다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선의 효용성은 어정쩡한 평화로움에 있지만은 않다. 그것은 다른 명상으로도 충분히 대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려 당연시 여겨지는 관념이나 사안에 과감히 의문[大疑團]을 던지고 끈덕지게 파고듦으로써 새로운 인식의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게 선의 역할일 수 있다. 

이재형 mitra@beopbo.com

[1339호 / 2016년 4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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