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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가야산의 퇴옹, 눈 푸른 납자를 기다리다

기자명 김택근

▲ 선승들이 성철 스님을 찾아와 깨달음의 인가를 받겠다고 했지만 법거량은 늘 싱겁게 끝이 났다. 대장부는 나타나지 않았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공부하다가 지견이 좀 생기면 고불고조를 뒷간 휴지쯤으로 취급하며 아만이 하늘을 찌르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허나 말만 그렇게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출중한 변재와 지혜를 갖췄던 원오나 대혜도 오매일여에 미치지 못함이 병이라 했는데 네가 안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일러주지만 대부분 내 말을 긍정치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 중엔 돌아서며 욕을 퍼붓는 자들도 있다.”

성철은 환갑을 맞은 해부터 자신을 퇴옹(退翁)이라고 했다. 스스로 물러난 늙은이라 칭했지만 성철은 여전히 강건했다. 그런데 왜 퇴옹이라며 물러나 있었을까. 그것은 물러서서 제자리를 지키자는 자신과의 다짐이었을 것이다.

성철은 백련암에만 머물렀다. 가야산이 그 옛날 성전암 동구불출의 철조망이었다. 거대한 바위를 두르고 꼼짝하지 않았다. 시인 고은의 말대로 ‘산을 나가는 길을 없애 버렸’으며 그런 성철을 사람들은 ‘멀리는 원효의 길이 있고 가까이는 경허와 만해의 길이 있건만 그런 선사들도 한 방망이로 타파한 납자 그 자체’로 받들었다.

사람들 발길이 큰절 해인사를 지나 백련암으로 향했다. 성철을 친견하려면 삼천배를 해야 했지만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성철은 백련암에서 언제나 진리의 횃불인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밝혀놓고 있었다. 그 불빛을 찾아 세상이 백련암으로 들어왔다.

“가야산 높은 곳에서 은둔했던 성철 스님의 수행생활은 그분을 특별한 인물, 즉 중생이 자신의 희망과 기대를 한껏 투사하게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성철 스님은 언론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그분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높기만 했다. (…) 가야산 호랑이는, 6·25전쟁부터 한반도에서 사라진 호랑이들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존재가 되기에 이르렀다.” (서명원SJ ‘가야산 호랑이의 체취를 맡았다’)

선승들이 성철을 찾아왔다. 거의가 자신의 깨달음을 인가 받아 법맥을 잇겠다고 했다. 성철이 이를 마다할 리 없었다. 깨달았다고 주장하면 독대를 허락했다. 덕과 지혜가 스승을 능가해야 비로소 스승의 은혜를 갚는 것이다. 임제도 오도한 후에는 감히 스승 황벽의 뺨을 때리며 어린 아이 다루듯 하지 않았는가. 뛰어난 법기(法器)가 나타나 뺨을 때리면 그로써 한 세상이 열림 아니겠는가.

그러나 백련암에서의 법거량은 늘 싱겁게 끝이 났다. 성철은 가야산을 허물 듯한, 번개와 회오리 같은 임기응변의 기봉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대장부는 나타나지 않았다. 더러는 성철의 무릎 아래서 병든 양처럼 굴었다. 또 더러는 엉뚱하게 대들었다. 동정일여의 경계에도 이르지 못했으면서 큰 소리 쳤다. 그럴 때면 성철은 무섭게 다그쳤다.

“너 지금 나하고 이야기하면서 화두는 잘되나?”
“스님, 화두가 문젭니까? 저는요, 좌복에 앉아있으면 번뇌망상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 청천하늘처럼 맑아서 마음이 편하기 이를 데 없는데 제가 왜 화두를 듭니까? 화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데요.”
“그렇다면 그것은 무기에 빠진 것이지 진짜 참선이 아니다. 다 내버리고 그 자리에 화두가 들어서도록 다시 공부해라.”
“아닙니다. 스님이 틀렸습니다. 내 마음이 맑은데 무슨 공부를 다시 하라하십니까.”

이쯤 되면 성철의 노기가 폭발했다. 임제 ‘할’과 덕산 ‘방’으로 쫓아내 버렸다.

성철이 김룡사에 있을 때 처사 하나가 찾아왔다. 처사는 자리에 떡 앉으면 정에 들어서 일고여덟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버린다고 했다. 자신의 경계를 스님들에게 물어봐도 모두 모른다하니 답답하여 이렇게 찾아왔다고 했다.

“신선이 이렇게 좋을 수 있으며 대통령이 이렇게 좋을 수 있겠습니까?”

처사의 아만(我慢)이 가관이었다. 성철이 물었다.

“그래! 공부 많이 했구만. 하지만 그건 정에 든 병이지 깨친 게 아닌 것 같네. 꿈에도 그 경계가 있는가 없는가?”

처사는 순간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꿈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철은 몽둥이를 치켜들어 사정없이 내리쳤다.

“에이 도둑놈의 자식아. 공부라면 일여해야 하거늘, 꿈에도 없는 것을 공부했다고 하느냐.”

처사는 이내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었다. 이렇듯 성철은 마음과 몸의 변화를 견성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혹독하게 꾸짖었다.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다. 성철 자신도 수없이 헛것에 속았다. ‘깨쳤다!’ 하는 환희심도 며칠이 지나면 ‘깨쳤나?’ 하는 의심으로 바뀌었다. 그때의 열패감은 당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깨쳤다고 느꼈을 때가 가장 위험했다. 그때마다 먼저 깨친 이의 몽둥이가 그리웠다. 그러나 성철에게 매를 때린 선지식은 없었다. 의심으로 의심을 지우며 홀로 경계를 무너뜨렸다.

“공부하다가 지견이 좀 생기면 고불고조를 뒷간 휴지쯤으로 취급하며 아만이 하늘을 찌르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허나 말만 그렇게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출중한 변재와 지혜를 갖췄던 원오나 대혜도 오매일여에 미치지 못함이 병이라 했는데 네가 안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일러주지만 대부분 내 말을 긍정치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 중엔 돌아서며 욕을 퍼붓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날 아무리 욕하고 부정하더라도 심하게 아파보면 그땐 내 생각이 나리라. 설령 지견이 하늘을 가리고 대지를 덮을 만큼 대단하고, 그 말솜씨가 천하 선지식을 꼼짝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원오나 대혜 스님 같은 이들의 예를 거울삼아 스스로 돌이켜보아야 한다. 만일 몽중일여에 이르지 못했다면 깊이 참회하고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옛 스님들도 늘 하신 말씀이다. ‘죄 중에 사람을 죽이는 죄가 가장 크지만 공부니 수도니 한답시고 허송세월하는 놈이 있으면 그런 놈은 하루에 만 명을 때려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모름지기 부지런히 노력하고 또 노력할 일이다.” (성철 ‘선문정로’)

어느 가을날이었다. 노승이 성철을 찾아와 무릎을 꿇었다. 인상이 온화했고, 태도는 단정했다. 잘게 퍼져있는 주름살이 속기(俗氣)를 지워버린 듯했다. 절 식구들이 열린 문으로 이를 지켜봤다. 이내 제자들이 염화실 방문을 닫았다. 노승이 입을 열었다.

“제가 깨달은 바 있어 찾아왔습니다. 다들 스님을 찾아가 보라 해서, 이렇게 세상의 끝에서 스님을 뵙습니다.”

노승은 성철에게 깨달음의 인가를 받고자 했다. 나이는 성철보다 많았다. 하지만 불가에서 젊고 늙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곧바로 성철이 주장자를 치켜들었다.

“내 물음에 똑바로 대답해야 한다.”
“예, 스님. 거짓은 없을 것입니다.”
“동정일여한가?”
“예. 화두를 한결같이 붙잡습니다.”
“그렇다면 꿈속에서도 일여한가?”

그러자 노승은 말이 없었다. 성철은 무섭게 쏘아보았다. 노승은 성철의 눈길을 피해 천장을 바라보았다.

“네 이놈, 무엇이 깨침이란 말이냐!”

성철이 주장자를 들어 노승을 내리쳤다. 노승은 미동도 하지 않고 매를 맞았다. 평생 마음을 닦아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참이 아니라면 어쩌겠는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를 어쩌면 좋은가. 매가 아픈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부처님을 섬기며 살아온 지난날들이 서럽고 아픈 것이었다. 이를 듣고 있는 절 식구들도 함께 아팠다.

성철의 매질이 멈추고 노승은 성철 앞에 엎드렸다. 마른 어깨가 들썩였다. 그 울음이 처연했다. 성철은 다시 화두를 주었다.

“이 늙은 놈아, 다시 공부하겠는가?”
“예 스님.”

노승은 화두를 받았다. 다시 선방에서 목숨을 내놓고 정진해야 했다. 하지만 노루꼬리만큼 남은 생에서 깨달음을 얻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저 생에서 다행히 사람 몸을 받는다면 다시 선방에 앉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또 불법을 만나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웠다. 그래서 옛 조사들은 ‘가사를 입고 사람 몸을 잃음이 제일 원통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가사 속에 무간지옥이 있음이었다.

곱게 늙음은 그냥 상(相)이었다. 속인들은 풍파 없는 고요한 삶을 동경하며 구족색신(具足色身)을 좇지만 ‘금강경’은 상에 집착 말라고 일렀다. 득도한 사람에게는 육신에 반드시 변화가 생기지만 그것이 부처처럼 32상이 모두 뛰어남은 아니었다.

마음에 자신의 참모습이 나타나기까지는 자신의 내부에서는 얼마나 큰일들이 벌어지는가. 벼락이 내리치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산하가 울부짖는 거대한 혼돈이 지난 뒤에야 절대의 고요가 찾아왔다. 작디작은, 여리디여린 꽃도 그냥 피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 꽃 한 송이가 아픔 없이 피겠는가. 꽃이 열리는 순간은 개벽이 아니겠는가. 그런 순간들이 모여 있어서 세상은 지속되는 것 아닌가.

노승은 바랑을 걸머지고 떠났다. 백련암 아래 가파른 길을 가만가만 밟았다. 가을 오후는 더없이 쓸쓸했다. 백련암 입구의 늙은 나무들도 조용히 굽어봤다. 절 식구 모두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성철이 버럭 소리쳤다.

“뭣들 하는가. 일하지 않고.”

그렇다면 누가 성철로부터 인가를 받아 법을 잇고 등불을 전하는 사법전등(嗣法傳燈)의 제자가 되었는가. 성철에게서 인가를 받았다는 사람은 여럿 있다. 하지만 정작 성철은 자신이 누구에게 인가를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사실 깨달음을 얻기란 지극히 어렵다. 마조 스님은 선종사에 선지식을 가장 많이 배출한 인물이다. 하지만 백장 스님의 법을 이은 황벽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마조대사 문하의 88명이 도량에 앉아 스승 노릇을 했지만 마조 스님의 바른 안목을 증득한 사람은 두세 사람뿐이다.”

대혜 스님도 마찬가지였다. 문하에서 종사를 자처하고 법석을 연 사람이 수없이 많았지만 대혜는 그들 모두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 불교는 지금 어떠한가. 성철은 생전에 이렇게 개탄했다.

“출가한 몸으로 부지런히 공부해 대각을 성취하지 못하면 그 죄가 얼마나 큰지 스스로들 알아야 한다. 예전에는 뼈를 깎는 노력과 수행으로 도를 성취한 도인들이 참 많았는데, 요즘은 스님들 아니면 지옥 채울 사람이 없다고들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힌다.” (성철 ‘선문정로’)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45호 / 2016년 6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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