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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소박한 일상이 곧 법문이었다

기자명 김택근

▲ 자기 견성, 공덕 회향, 이타행 실천. 깨닫고, 그 깨달음을 나눠주고, 마침내 깨달음 속에 녹아든 성철 스님의 가르침은 지금도 우리 가슴을 적시고 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종단이 이만큼 안정되었으니 우승(愚僧)은 종정직에서 사퇴합니다. 앞으로 부처님의 법에 의하여 종단이 운영 발전되기를 바랍니다.’ 앞뒤가 분명하다. 성철이 종정을 사퇴하겠다고 하면 주변에서 종단이 안정 될 때까지만 머물러 달라고 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성철은 부단히 종정이란 고깔을 벗어버리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성철의 장좌불와와 동구불출 같은 초인적인 수행은 생전에 이미 전설로 회자됐다. 그렇다면 깨친 이후의 하화중생은 무엇인가. 성철은 불교를 기복신앙에서 참회와 발원의 신앙으로 바꿔놓았다. 불교 안의 비불교적 요소를, 선종 안의 비선종적 요소를 걷어냈다. 승려들이 신도의 복을 빌어주는 것은 절집이 굿집이나 다름없음이었다. 성철은 ‘부처님 법대로’ 이런 일체의 행위를 추방하라 일렀다. 봉암사에서부터 천제굴, 성전암, 금룡사, 백련암에 이르기까지 성철의 사자후는 변함이 없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달마대사도 우리 자성이 부처라는 것을 알렸을 뿐이다. 천불이 나타나 도와주어도 중생을 부처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니 승려들이 초능력을 지닌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만일 초능력을 득했다 해도 자신의 도력이라 뽐낼 것이 아니라 이를 중생 제도에 활용해야 할 것이다. 승려는 부처와 통하는 사람이 아니라 중생을 부처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다. 어설픈 신비에 기대니 불교가 ‘산속의 무속’쯤
으로 치부되고 낡고 색이 바랜 종교로 인식되는 것 아닌가.

성철에게도 물론 신비스런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신도의 금목걸이가 눈에 거슬려 방안에서 키우던 산비둘기를 불러 계곡에 버리게 했다.”
“오늘 누가 온다고 말하면 어김없이 손님이 찾아왔다.”
“6·25전쟁을 미리 내다보고 봉암사의 장서를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성철이 초능력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입으로는 어떤 얘기도 하지 않았다. 깨친 후에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남’이었다. 성철의 일상은 지극히 평범했고, 가르침 또한 경(經)을 벗어나지 않았다. 도란 일상 속에 있었고, 고명한 진리는 평범했다. 평범한 것이 제일 위대했다. 노자도 ‘크게 지혜로운 사람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 같다[大智若愚]’고 했다. 지혜의 최고 단계에 이르면 지혜의 경계도 없어져야 했다. 성철은 백일법문에서 노자의 말을 인용했다.

“도를 위해서는 날마다 덜고, 배움을 위해서는 날마다 더한다(爲道日損 爲學日益).”

성불해서 도를 보는 것은 스스로를 끊고 다시 소생하는 것이었다.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아 버림이니, 그것은 모든 것을 버림이었다. 높은 것에서 손을 놓아 떨어지면 그 어떤 것도 남을 수 없음이었다. 일체의 것을 버려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경계는 자기 자신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성철은 ‘자기를 속이지 말라[不欺自心]’고 했다. 실로 벼락같은 경책이다.

산책길의 성철에게 누군가 물었다.

“스님은 이 길에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겨울에는 춥고 여름엔 덥지.”

너무 단순해서 그 의미를 되새김질했음직하다. 하지만 산책을 할 때면 산책만을 했기에 가능한 답이다. 산책을 하면서 수많은 분별을 따지고, 숱한 망념이 떠오른다면 이런 답을 할 수 없다. 모든 것을 비웠기에 가능한 것이다.

성철은 새벽 2시쯤 일어나 3시에 백팔참회를 했다. 정해진 시간에 공양을 하고 하루 두 번 산책을 했다. 또 삼천배를 마친 신도와 공부를 점검받으러 오는 스님들을 접견했다. 그 외는 종일 참선과 독서로 소일했다. 3평 넓이의 거처도 소박했다. 석굴암 부처님 사진 한 장이 걸려있고, 경상(經床)과 좌복뿐이었다. 화분이나 그림 한 점도 없었다. 성철의 이런 생활은 살아있는 법문이었다. 성철은 식생활에서도 수행자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아침은 현미죽을 들고 점심과 저녁은 현미밥을 들었다. 버섯을 물에 담가 우려낸 국물에 감자와 당근을 약간 썰어 넣은 것이 국 겸 찌개였다. 반찬은 솔 잎 가늘게 썬 것 한 숟가락, 검은 콩 삶은 것 한 숟가락, 곰취나물 조금, 마와 더덕을 소량 섭취했고, 계절별 반찬으론 쑥갓이 날 땐 쑥갓 세 줄기, 복숭아가 나올 땐 복숭아 반 쪽, 가을과 겨울에는 사과 반쪽이 반찬으로 나왔다. 여름에 아주 더울 때 수박을 조금 먹었고, 평소에 몸이 냉하여 가끔씩 설사를 했기 때문에 식후에 곶감을 하루 한 개씩 먹었다. 차는 인동과 대나무잎, 녹차를 넣어 삶은 물을 갈증이 나면 한 잔씩 마셨고, 피곤할 땐 차에 꿀을 넣어 마시기도 했다. 식사량은 아주 소량이었으며 간식은 전혀 하지 않았다. 반찬에 소금과 간장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무염식을 하였다. 출가 이후 술이나 고기를 전혀 드시지 않았다.” (원소 스님 ‘성철선사의 접인지도법(接引指導法)’)

성철은 대중법어를 통해 크게 세 가지를 강조했다. 몸을 받고 살았던 이 세상에 남긴 유언 같은 것이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남모르게 남을 도웁시다.”

그 속에 불교의 핵심이 녹아있었다. 그것은 자기 견성, 공덕 회향, 이타행 실천이었다. 깨닫고, 그 깨달음을 나눠주고, 마침내 깨달음 속에 녹아듦이었다. 그 가르침은 지금도 우리 가슴을 적시고 있다. 성철은 불도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불교는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를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는 세상과 거꾸로 살지 않았다. 세상과 타협하며 속세에 물들어갔다. 자기 자신에 감탄하고, 자신을 숭배했다. 성철이 종정으로 있던 10년 동안 총무원장이 10번이나 바뀌었다. 조계종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1983년 8월 ‘신흥사 사건’이 터졌다. 설악산 신흥사에서 신임 주지 부임을 둘러싸고 유혈 난투극이 벌어졌다. 승려 1명이 흉기에 찔려 사망하고 여러 명이 다쳤다. 대처승들이 물러갔지만 절 뺏기 싸움은 끊이지 않았다. 설악산 입구에 있는 신흥사는 문화재 관람료를 받아 돈이 쌓여있었다. 그 돈을 차지하려 싸웠다. 폭력배를 동원한 계획된 범행에 국민들은 경악했다. 종정 성철은 교시를 내려 통탄했다.

“꿈결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신흥사 사태는 종단 미증유의 참사이며, 천인이 공노할 비극입니다. 자비로 생명을 삼는 불문에서 이러한 불상사가 발생한 것은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민이 들끓고 있으며, 곤충미물들도 조계종단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시적 돌발사고가 아니요, 오랫동안 계속된 종단 분쟁의 결말이며, 조계종단이 극도로 타락한 증좌입니다.”

이 사건으로 종단 집행부가 퇴진하고 종회 또한 해산했다. 그해 9월 소장파 승려들이 중심이 된 이른바 ‘비상종단’이 발족됐다. 이들은 비상종단운영회의를 설치해 개혁을 추진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반대 세력이 승려대회를 열어 비상종단 해체를 결의하고 폭력배들을 동원해 조계사 총무원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던 성철이 종정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조계종은 성철을 대신할 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 성철은 1984년, 86년, 88년 세 차례 사퇴서를 제출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특히 1986년 4월에 제출한 사퇴서는 그 이유가 ‘종단 안정’이었다.

“종단이 이만큼 안정되었으니 우승(愚僧)은 종정직에서 사퇴합니다. 앞으로 부처님의 법에 의하여 종단이 운영 발전되기를 바랍니다.”

앞뒤가 분명하다. 성철이 종정을 사퇴하겠다고 하면 주변에서 종단이 안정 될 때까지만 머물러 달라고 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성철은 부단히 종정이란 고깔을 벗어버리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고깔을 쓰고 산 속에만 있더라도 한국불교는 성철이 필요했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욕심은 없되 의지가 부족한 허수아비였고, 무능한 노승일 수 있었다. 그래도 한국불교에 큰일이 생기면 달려갈 곳이 딱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성철이 있는 해인사 백련암이었다. 여기에 종정으로서의 존재 이유가 있었다.

1991년 1월 종정의 임기가 만료되었다. 성철은 이제는 제발 그만 ‘종정 고깔’을 벗겨달라고 했다. 이에 1월23일 종정직을 맡을 생각이 없다는 통고문을 보냈다. 하지만 종단 일각에서 성철의 연임을 요청했다. 그러자 다른 문중에서 새로운 종정을 내세우겠다며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종정 추대를 둘러싸고 문중 다툼 양상을 보이자 성철은 다시 7월5일 통고문을 보내 종정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0일에는 ‘종도에게 보내는 글’까지 발표했다. 그럼에도 사흘 후 해인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표자회의에서 성철을 종정에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이어서 8월22일 조계종 원로회의에서 성철을 종정으로 추대했다. 이때는 성철의 몸이 많이 쇠약해 있었다. 옛날 같으면 주장자를 내치며 고깔을 팽개쳤겠지만, 10년 동안 쓰고 있던 고깔은 옛날의 고깔이 아니었다. 이미 자신의 의지대로 쓰고 벗을 수 없게 되었다. 이듬해 초파일 법어를 발표함으로써 종정직을 수락했다.

성철이 종정으로 있는 동안 많은 고승이 입적했다. 성철과 동시대를 살며 치열하게 수행하고 불교의 새 길을 찾았던 이들이었다. 시대는 험했지만 삶은 향기로웠다. 성철은 종정으로서 추도사를 발표했다. 추도사는 스님의 법맥과 행적을 살펴 직접 작성했다. 성철이 글을 바친, 한 시대를 밝혔던 고승들을 살펴보자.

경봉 정석(1892~1982), 탄허 택성(1913~1983), 동헌 완규(1896~1983), 구산 수련(1909~1983), 혜암 현문(1885~1985), 일우 종수(1918~1985), 벽초 경선(1899~1986), 석암 혜수(1911~1987), 영암 임성(1907~1987), 벽안 법인(1901~1988), 고암 상언(1899~1988), 성운 지효(1909~1989), 자운 성우(1911~1992)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48호 / 2016년 6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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