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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낙과로부터 배우다

기자명 김용규

상처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거센 장맛비가 숲을 훑고 지나갔습니다. 이 숲에 쏟아진 이번 비는 비교적 집중적이었고 세찼습니다. 덕분에 이곳 여우숲으로 올라오는 길 여러 곳이 험하게 망가졌습니다. 숲길을 뒤덮은 나뭇가지로 세차게 쏟아진 비는 가지 끝을 따라 떨어진 빗방울을 따라 길 한 복판에 새로운 도랑을 만들었고, 흙이 무너지면서 길 가장자리 배수로가 막힌 지점은 길로 물이 넘쳐 그 길의 허리가 끊기기도 했습니다. 휴가철 여우숲으로 찾아올 사람들을 생각하면 저 길을 다시 복구하고 배수로를 내야하니 쏟아야 할 비용과 노동이 막막합니다.

이번 비가 던지고 간 고난이 내게만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밭 언저리에 심어둔 감나무들은 아직 더 통통해지고 여물어갈 틈을 충분히 갖지 못했거늘 가을날의 붉은 결실로 연결하려했던 제 소중한 감을 후두둑 잃어버렸습니다. 여우숲의 아름다운 건물 층층나무관 앞에 당당히 서 있는 한 그루 나무 역시 제 소중한 열매들 중 많은 부분을 무참히 잃었습니다.

막막한 것은 장마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태풍 역시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름이 가기 전 세찬 비가 몇 번은 더 내릴 테고, 뒤이어 태풍도 몇 개쯤 찾아올 테니 거센 바람 몇 번이 기필코 이 숲으로 찾아들 것입니다. 하여 나는 이 여름이 끝나기 전까지 몇 번을 더 길이 끊기는 고초와 마주해야 할 것입니다. 저 감나무와 층층나무 역시 맺어놓은 열매의 얼마만큼을 또 다시 잃어야 할 것입니다.

도모했던 것의 일부 혹은 전부를 잃어야만 하는 것, 어쩌면 그것은 살아 있는 모든 존재가 기필코 겪어내야 하는 과정일 것입니다. 나는 아직 숲에서 봄날부터 도모했던 그 모든 것을 다 붙들고 결실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존재들을 목격한 적이 없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어딘가는 뜯기고 어딘가는 떨어지며 다른 어딘가는 부러져가면서 제 삶을 이루어가는 것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독야청청 푸르다는 칭송을 달고 사는 소나무 역시 그렇습니다. 사는 동안 그는 겨울날 쏟아지는 눈발이나 거센 폭풍에 제 가지의 일부를 꺾이면서 제 모습을 이룹니다. 힘차게 뻗어 올리며 하늘로 오르는 미루나무나 은사시나무 역시 언제고 숲의 목수라 불리는 딱따구리 등살에 제 등줄기를 내주는 상처와 마주하게 됩니다. 볕 좋은 자리에 살아가는 어느 나무들은 칡덩굴에 휘감기고, 양분이 흘러 비옥하게 쌓이는 자리에 사는 어느 나무들은 토끼며 고라니며 노루 따위들에게 제 잎의 많은 부분을 뜯어 먹혀야 하는 상실과 마주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상처와 상실이라는 놈들은 모든 삶의 실존을 관통하는 필연의 하나입니다. 이 평범한 진실을 나는 숲을 통해 알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불행이 저 상실과 상처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구나. 모든 나무와 풀들이 제 몸의 일부가 부러지고 꺾이고 뜯기며 제 삶을 이루어가듯 인간의 삶 역시 그러할 텐데, 그것이 없기를 바라는 데에 우리 불행의 원인이 있는 것이구나. 인간 고통의 근원이 꺾이거나 부러지면서 얻는 상처나 상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착에서 연유하는 것이구나. 즉 내가 도모한 모든 것을 단 하나도 잃지 않고 이루려는 마음, 내가 발원한 가치의 어느 한 귀퉁이도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 집착이 고(苦)의 근원이구나.’

숲에게 여름은 가장 왕성한 성장의 계절입니다. 또한 상실과 상처의 계절입니다. 하지만 상실과 상처는 뒤얽혀 사는 모든 존재의 필연입니다. 그리고 그 상실과 상처가 주는 쓰라림이 실은 가장 위대한 스승의 모습입니다. 꺾이고 부러져 내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부스러기가 발아래에서 조금씩 썩어갑니다. 부러진 상처의 자리에서 어느 순간 새살이 돋고, 발 아래로 떨어진 상실의 부스러기가 마침내 흙 향기 가득한 퇴비로 바뀌는 날이 옵니다. 그러한 날 마침내 그 상실과 상처는 오히려 나를 더욱 돋워내는 귀한 거름이 됩니다. 그래서 부러지고 꺾이는 것들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쓰라림과 허전함의 자리를 부둥켜안고 담담히 새살을 돋워야 합니다. 폭우와 강풍이 빚은 여름날의 낙과에게서 나는 그 소중한 지혜를 배웠습니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53호 / 2016년 7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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