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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따라 걸어온 반백년 외길, 불화의 꽃으로 화현하다

해인선원불화연구소 여지 스님

▲ 여지 스님은 “허름한 옷을 입었더라도, 그림에서 환희로움이 느껴진다면 그것이 바로 그의 인격이요 살아온 삶”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일까. 환히 웃는 여지 스님 얼굴이 부처님 얼굴처럼 맑다.

그날 난로를 도둑맞지 않았다면, 난로 없는 겨울밤이 견딜만했다면, 거리를 헤매다 우연히 들른 곳이 사찰이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스님이 되지도, 불화를 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로를 도둑맞았고, 견디기 힘든 추위를 느꼈으며, 돈을 마련하고자 붓을 들었다. 그림 사줄 사람 찾아 거리를 헤매다 우연찮게 들른 사찰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눈길 가는 곳마다 씨앗이 뿌려졌고, 발길 닿는 곳마다 꽃이 피었다. 반백년 불모(佛母) 외길을 걸어온 해인선원불화연구소 여지 스님에게 지금까지 여정은 그대로 지중한 인연이었다. 그 인연들 한지에 스며들어 불화의 꽃으로 화현했으니, 붓끝으로 극락정토 그려내고 있음이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 보이다
난로 도둑맞은 인연에 불화 그려
팔기 위해 대전 시내 방황하다
우연히 들른 사찰에서 출가발심

혜각 스님에게 입문해 지도받고
1977년, 조계종 불미전서 수상
궁핍한 가운데서도 공부에 매진
전국 60여개 사찰에 불화 봉안

해인선원불화연구소는 청주시 오송읍의 낡고 허름한 건물에 위치해 있다. ‘전통불화’라는 글씨가 새겨진 노란 간판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건물 외관과는 사뭇 다른 광경의 작업실이 나온다. 한창 작업 중인 불화들이 놓인 바닥에서 천천히 시선을 옮기자 작업실 사방을 장식한 불화 속 불보살들이 당장 한지를 뚫고 나올 듯 생생하다. 단아하면서 화려하고,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자태로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안료가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는 진열장 위에는 여지 스님이 수행자로서 살아온 나날들이 액자에 담겨 있다. 도반들과 찍은 사진과 수계첩, 무엇보다 작업실 벽 한 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상패들이 인상적이다.

스님은 1977년 조계종이 주최한 불교미술대상전에서 탱화부문 장려상을 시작으로 충청북도 주최 청주미전, 대한불교 문화예술대상전, 대한불교 미술대제전, 서울올림픽 기념 불교미술전 등에서 수상했다. 조계종 문화부 초대작가로 인정받아 서울 공평아트센터에서 고려불화 ‘수양관음 담채화’를 출품했고 옥천·부산·남해·창원 등지에서 전시를 이어왔다. 1995년에는 일본 가나자와시 의원들의 초청으로 현지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여지 스님’이라는 이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어도,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일궈왔다. 상패들은 스님의 원력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인연이 안내하는 길을 묵묵히 걸어온 불모 여지 스님의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 충북 옥천에서 시작된다.

스님의 그림 그리는 재주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공책에 대충 그린 낙서를 친구들은 신기하다며 구경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은 아픈 형을 고쳐보겠다며 한 스님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 스님은 초등학생의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그림들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스님이 돼서 그림을 그리면 대성할 것이다.” 스님의 한 마디에 출가를 결심했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 그림을 마음껏 그려보겠다는 마음이었다.

1969년, 강원도 삼척 깊은 산골로 향했다. 수풀을 헤치며 험한 산길을 몇 시간 걷자 참나무 껍데기로 지붕을 얽은 전각 한 채가 나왔다. 스님은 그림을 그리게 하는 대신 벌통에서 꿀을 채취하는 일만 시켰다. 8개월 정도 흐르자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무작정 뛰쳐나와 고향 옥천으로 돌아왔다. 이후로는 골방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고 한문공부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때였다. 1971년 겨울, 스님을 불화의 세계로 이끈 자그마한 인연이 찾아왔다.

당시 어머니는 채소를 팔아 번 돈으로 석유난로를 샀다. 스님은 석유난로 하나로 추운 겨울을 버티며 그림을 공부했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 난로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룻밤을 청하는 이에게 방을 내줬는데, 난로를 들고 도망쳤던 것이다. 너무 추워 공부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캔버스지에 포스터물감으로 색을 넣은 불화를 몇 점 그려 집을 나섰다. 인근 사찰로 가 주지스님에게 그림을 보여주니, 대전의 불교용품점에 문의해보라는 답을 들었다. 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갔지만 불교용품점 주인들은 팔리면 돈을 부쳐줄 테니 그림을 놓고 가라는 말만 했다. 낙심한 스님은 집으로 돌아갈 차비가 없어 대전 시내를 헤매다 우연찮게 신광사에 들렀다. 스님 열댓 명이 둥그렇게 앉아있었다. 넙죽 절을 했다.

▲ 여지 스님은 수많은 인연에 대한 감사의 마음, 그리고 부처님에 대한 예경을 담아 정성껏 불화를 조성한다.

한 스님이 다가와 본사가 어디냐고 물었다. “우리 집”이라고 대답했다. “길을 잘못 들었다. 내일 법주사에 들어가는데 함께 가자. 행자생활을 제대로 해보도록 해라.” 1971년 3월, 법주사에서 정식으로 행자복을 입었다. 법주사 부처님들을 보며 처음으로 출가의 환희를 느꼈다. 신심으로 출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매일 다른 행자들보다 먼저 일어나 법주사 모든 전각에서 3배를 올렸다. 이를 눈여겨 본 능요 스님이 수시로 거처로 불러 떡과 과일을 줬다. 능요 스님은 “법주사에서는 그림공부를 할 수 없으니 통도사에 가보라”고 권했다.

1972년 2월16일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당시 통도사에는 혜각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1992년 무형문화재 48호로 지정된 혜각 스님은 당시에도 단청의 대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월하 스님의 소개로 혜각 스님에게 불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통도사 전각들에 모셔진 모든 불화가 하나같이 마음에 쏙 들었다. 혜각 스님의 지도로 한지에 초(밑그림) 잡는 연습을 했다. 초를 잡는 데는 시왕, 사천왕, 보살, 여래 등 실력에 따른 순서가 있었는데, 스님은 이 과정을 빠른 속도로 압축했고 채색 쓰는 기법도 배워나갔다. “중은 강원을 나와야 한다”는 혜각 스님의 말에 따라 해인사 강원 18회로 입학해 공부하기도 했다.

혜각 스님에게 배운 사천왕초를 불화로 제작해 같은 해 10월 조계종 제8회 불교미술전 탱화부문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상금 30만원은 안료와 붓, 한지를 사는 데 썼다. 재료가 없어 마음고생을 해왔던 스님이 스스로에게 주는 상이었다. 당시 30만원은 적지 않은 돈이어서 이후 한동안 걱정 없이 불화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도반스님들이 “여지 스님은 지대방에서 그림만 그린다”고 핀잔을 줄 정도였다.

해인사 강원을 졸업한 뒤 옥천 가산사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불화를 그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이 되면 호롱불을 켜놓고 붓을 잡았다. 아침마다 콧잔등에 묻은 시커먼 그을음을 닦아내는 게 일이었다. 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덕에 궁핍을 면하지 못했지만 불화 그리는 일만큼은 소홀하지 않았다. 통도사에서 봤던 불화들을 재현해내는 게 목표였다. 홍익대 미대 교수진으로부터 데생과 조각 등을 공부하기도 했다. 더욱 깊이 있는 불화를 그려내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흐르자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1984년 옥천 용암사에서 스님의 불화가 봉안됐다. 점안식에서 수많은 신도 불화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것이 기점이었다. 공주 동불사, 옥천 법왕사, 영동 관음사, 김천 용담사, 서울 불영사, 거제 신광사 등 60여개 사찰이 스님의 불화를 봉안했다. 전국 각지에서, 일본에서 전시가 이어졌다. 각종 대회에서 상도 받았다. 1971년 겨울, 난로를 도둑맞은 작은 사건이 인연 되어 또 다른 인연들을 잇달아 불러낸 결과였다. 만약 그때 그 사건이 없었다면 스님은 무엇이 됐을까.

“전생부터 불화를 그려왔어요. 찾아온 인연들을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난로를 도둑맞은 것, 대전 시내를 헤맨 것, 신광사를 발견한 것, 법주사로 가자는 스님을 만난 것, 월하 스님이 혜각 스님을 소개해주신 것 모두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인연이었던 만큼 불화 조성하는 일을 결코 허투루 대할 수 없다. 바탕천을 조리고, 아교풀을 끓이고, 천에 풀을 바르고, 초를 배접하고, 채색하고, 문양을 넣는 모든 과정에 지극한 정성을 쏟는다. 특히 모든 과정에 앞서 증명설단을 만들고 지공대화상, 나옹대화상, 무학대화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불모로서 지중한 인연들에 감사를, 스님으로서 부처님에 대한 예경을 담는다.

스님은 사람이 아닌 그림을 보라고 말한다. 그림에는 그린 이의 인격이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설령 허름한 옷을 입었더라도, 그림에서 환희로움이 느껴진다면 그것이 바로 그의 인격이요 살아온 삶일 테다. 그 말처럼 스님이 그려온 불화 역시 스님의 인격을, 삶을,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여정을 드러내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불화 속 부처님들이 자애로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방긋 웃는 여지 스님의 얼굴에서 보았던 바로 그 표정이다. 인연 따라 걸어온 반백년 불모의 길에서 스님은 오늘도 묵묵히 붓을 잡고 자신을 꼭 빼닮은 부처님을 그려내고 있다.

청주=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1353호 / 2016년 7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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