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0. 빈승이 ‘대사’로 불리는 연유-상

“제자들과 구분하기 위해 ‘대사’로 부르는 겁니다”

▲ 성운대사가 불자로부터 기증받은 아주 오래된 불두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대만 불광산 제공

“‘성운’과 발음이 비슷한 다른 스님을 찾는 전화도 자주 있어서 받아보면 저와는 상관없는 경우도 자주 있었습니다. ‘성운 스님’이라는 호칭이 단체에 갈등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우리 모두가 ‘스님’으로 불리고 있는데 은사스님도 ‘스님’으로 불리니까 도대체 누가 크고 누가 작은지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자용 스님이 “은사스님을 우리들은 ‘대사’라고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모두가 박수로 동의했습니다.”

‘대사’라는 말에는 ‘보살’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보살에는 초발심의 보살이 있으며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십지(十地)를 거쳐 보살수행 50단계 이후 등각, 묘각 이상이 되어야 ‘부처’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30년 전, 빈승이 60세 정도였을 때 불학원에서 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저에게는 출가한 많은 제자들이 공부를 해 석사가 되고 박사가 되어 ‘불학원’으로 돌아와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들은 ‘선생님’이라고 불리고 ‘법사’라고 불렸습니다. 어느 때인가는 제가 동쪽 산에 있는데 서쪽에 있는 불학원에 원장을 찾는 전화가 왔다는 연락을 받으면 저는 4~5분의 시간을 들여 동산에서 서산으로 쫓아가 전화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당시 불광산에는 자동 전화가 오직 한대만 있었습니다. 몇 번이고 저는 숨을 헐떡이며 수화기를 들고 “여보세요. 제가 원장 성운입니다”라고 말하면 상대는 “정말이요? 원장은 여성이 아닌가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제가 다시 “아! 여기는 총림학원이고 저는 성운입니다”라는 답변에 상대는 “아~, 그러세요. 저는 총림학원의 원장을 찾는 게 아니고 육아원의 원장을 찾은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육아원 원장은 성이 소씨인데 5분후에 다시 전화주시면 통화하실 수 있게 불러오겠습니다”라고 답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여러 번 발생하였고 더구나 ‘성운’과 발음이 비슷한 다른 스님을 찾는 전화도 자주 있어서 받아보면 저와는 상관없는 경우도 자주 있었습니다. ‘성운 스님’이라는 호칭이 단체에 갈등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나중에 우리가 현재 모두 ‘스님’으로 불리고 있는데 은사스님도 ‘스님’으로 불리니까 도대체 누가 크고 누가 작은지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은사스님께서 현직에서 물러나실텐데 퇴직한 은사스님과 자신들이 ‘스님’으로 똑같이 불려야 평등한 것인지, 만약 ‘원장’으로 부른다고 하더라도 불광산에는 양로원, 육아원, 도감원, 자선원, 문화원 등등 수 많은 원장이 있어서 틀림없이 헷갈릴 테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자용 스님이 “은사스님을 우리들은 ‘대사’라고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모두가 박수로 동의했습니다.

불교에서 사람들에게 골칫거리가 되는 것은 출가 60년과 출가 하루가 된 사람을 모두 ‘스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등을 위해서 우리는 나중에 품계제도를 만들어 불광산에서 출가한 입실 제자들이 평등함 속에 차이를 두고 차이 속에 단계가 있게 하였습니다.

이 품계의 구별은 청정사 6급(淸淨士, 매년 1급씩 승급), 학사 6급(學士, 2년마다 1급씩 승급), 수사 3급(修士, 4년마다 1급씩 승급), 개사 5급(開士, 5년마다 1급씩 승급)이고 그 위가 바로 대사(大師)입니다. 승급은 연(年) 수를 유일한 표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고 학업과 수행, 사중에 대한 기여도를 중점으로 심사해 일정한 수준이 되어야 승급할 수 있습니다. 대략 40~50년 정도의 경력과 꾸준히 사중과 불교에 대해 공헌을 해야 ‘대사’로 승급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이 저에게 ‘대사’라고 한 것은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광산 내부적으로 제자들과 직책의 구분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직무는 ‘법사’(법을 설하는 스승, 역자 주)이고 저의 품계는 ‘대사’인 것입니다.

저의 품계를 ‘대사’로 하였으니 나중에 불광산 제자들이 제가 홍법 포교하는 각처에 ‘성운대사 불학강좌’ 혹은 ‘성운대사 경전강좌’ ‘성운대사의 마음을 잇는 법문’ 등등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대사’가 저의 호칭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대사’라는 이 명칭은 전문가이거나 자신이 존경하는 분을 ‘대사’라고 부르는 등 사회적으로 지극히 통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술계 대사로는 장대천(張大千), 제백석(齊白石)이 있고 교육계 대사로는 채원배(蔡元培), 부사년(傅斯年)이 있으며 과학계 대사로는 정조중(丁肇中), 양진녕(楊振寧)이 있습니다. 또 국학계 대사로는 전목(錢穆), 당군의(唐君毅), 요종이(饒宗頤), 계선림(季羨林) 등이 있습니다.

중국 총림에서 ‘대사’라는 호칭이 아주 보편적으로 높고 낮음이 없고 누구나 다 ‘대사’라고 불러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이 어린 사미를 만났을 때 “사미대사님을 어떻게 호칭하면 좋을까요?”라고 묻거나 혹은 비구니를 만났을 때 어떻게 호칭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면 “대사의 법명이 어떻게 되시나요?”라고 물을 수 있는데 모두 존중의 표시가 됩니다.

불가의 호칭에는 나름 원칙이 있고 차등이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대사’라고 부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태허대사, 홍일대사, 원영대사, 허운대사, 내과대사, 인광대사, 법존대사, 법항대사, 경안대사 등 근대불교에서의 대사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심지어 재가거사도 ‘대사’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인도 부처님시대에 유마거사, 선각거사에서 중국 역사상의 선혜대사, 방대사(龐蘊)가 있고, 근대에 들어서 양인산(楊仁山)대사, 구양경무(歐陽竟無)대사 등 수많은 대사가 있습니다.

‘대사’ 외에도 불교에서는 율학에 대해서 연구한 사람을 도선(道宣)율사, 승우(僧祐)율사처럼 ‘율사’라고 부르고 백장선사, 임제선사처럼 선학에 조예가 깊은 분을 ‘선사’라고 부릅니다. 논장에 대해 공헌을 한 분에게는 ‘논사(論師)’라고 호칭하는데 용수(龍樹)논사, 세친(世親)논사, 무착(無著)논사 등이 계십니다. 이 외에도 각처에서 전계를 하시는 분은 ‘계사(戒師)’라고 하고 일반적으로 불법을 널리 알리고 경전을 강설하고 법을 설하는 분들은 ‘법사’라고 부릅니다.

이외에도 ‘화상(和尙)’이라는 호칭이 있는데 이 호칭은 쉽게 부르는 호칭이 결코 아닙니다. 총림에 많은 대사와 법사와 스님이 있을 수 있지만 300명, 500명이 살고 있어도 화상은 오로지 한 명만 있으며 육화승단의 대표이자 가르침을 주는 스승으로 교장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른 출가대중들은 단지 소임에 따라서 감원, 지객, 규찰 등등으로 마치 학교에 전공이 다른 많은 선생님들이 있지만 교장은 한 명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불광산에서 ‘화상’이라고 불리지 않지만 나중에 제자들이 주지가 되면서 심평화상, 심정화상, 심배화상, 심보화상처럼 지금의 제9대 주지까지 모두 ‘화상’으로 불리고 있는데 불광산 주지이자 방장입니다.

‘대사’라는 호칭에는 ‘보살’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보살에는 초발심의 보살이 있고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십지(十地)를 거쳐 보살수행 50단계 이후에 등각, 묘각 이상이 되어야 ‘부처’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사람 누구나 모두 보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중을 부를 때 여러 보살님들, 여러 초발심보살님들, 여러 남성보살님, 여성보살님들, 여러 노보살님들, 아기보살들이라고 부릅니다. 큰 보살은 등각의 위치에 있어서 곧 성불하게 되고 작은 보살은 이제 처음 발심하여 발걸음을 내딛은 것으로, 대 보살이든 작은 보살이든 간에 모두 다 ‘보살’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마치 학생처럼 유치원에 다녀도 ‘학생’이고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심지어는 대학원이나 박사과정이라도 다 ‘학생’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박사과정 학생과 유치원생의 차이는 아주 큽니다. 그래서 ‘대사’라는 말이 사미대사부터 보살대사까지 그 사이에는 아주 먼 거리가 있게 됩니다.

그렇지만 과거의 고승대덕들은 대부분 ‘논사’나 ‘율사’를 하지 않으려 했고 ‘보살’이라고 불리기를 바라셨습니다. 예를 들면 태허대사는 스스로를 ‘태허보살’이라고 하셨고 자항 스님도 ‘자항보살’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명나라 우익(蕅益)대사께서는 당신이 비구라고 불리기에는 비구청정계율을 수지함에 자신에게 부족함이 있다고 느끼셨고 부처라는 호칭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으므로 “비구는 불도를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니 보살이라 불리기를 원한다”는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보살은 ‘학위가 있는 과정’으로 마치 학생처럼 점점 승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사’라는 호칭은 큰 대사이든 작은 대사이든 간에 뭐라고 따질 거리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중국인이 흔히들 사람을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당신이 교수이고 학자면 왕선생님, 장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고 당신이 농부고 심지어는 글자를 모르더라도 진선생님, 임선생님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아무도 이 선생이라는 호칭이 잘못됐다고 따지지 않습니다. 그렇듯이 ‘대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맞는다거나 틀린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대사’의 의미를 잘 안다면 이는 단지 그냥 호칭으로 ‘당신’이라는 뜻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회 혹은 불교계를 막론하고 ‘대사’라는 이 호칭의 의미에 대해서 많이들 이해가 부족합니다. 예를 들면 항전시기에 태허대사께서 중경에 계실 때 ‘해조음(海潮音)’의 ‘권두언’에 편집장인 복선(福善)스님이 1000자가 넘는 글을 발표했는데 그 문장에서 태허대사를 언급하며 17번이나 ‘대사’ 호칭을 썼습니다. 본래는 대단한 일도 아니었는데 대해대사의 제자가 태허스님을 지나치게 높인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이 공격을 하면서 불교계가 시끄러워졌었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55호 / 2016년 8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