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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찬주 소설가

풍경소리로 번뇌 씻으며 부처님 닮아가는 이야기꾼

▲ 정찬주 소설가에게는 죽비 2개가 있다. 하나는 ‘집착하지 말라’ 또 하나는 ‘걸림없이 살라’다. 미로 같은 불교공부 40여년 만에 얻은 죽비다.

“왜 북향집을 지었소?”
“천년고찰 아래 절 내려다보고 사는 게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랬습니다.”

문학청년 시절 쌍봉사에서 습작
1983년 단편 ‘유다학사’로 입문

샘터사에 근무하면서 스승 만나
‘세상 물들지 말라’는 법명 무염
절 곁에 산방 이불재 짓고 낙향

성철 스님 삶 ‘산은 산 물은 물’
작가로서 대중에 이름 알린 작품
성철·만해·지장·경봉·일타 등
근현대 고승 일대기로 사랑 받아

법정 스님이 묻자 주인장이 답했다. 산방 이름이 이불재(耳佛齋)다. 주인장은 상량문에 ‘솔바람에 귀를 씻어 부처를 이루리’라고 썼다. 화순 쌍봉사가 아래 절이다. 산방 주인장 법명이 무염(無染)이다. ‘세상에서 살되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뜻이다. 법정 스님이 오계와 함께 준 법명이다. 출판사 샘터에 근무하며 법정 스님 원고 받고 책 몇 권 만들며 인연맺었다. 이불재 처마 끝 풍경소리로 번뇌 씻고 ‘글농사’ 지으며 부처님 닮아가고 있는 정찬주(65) 소설가 법명이 무염이다.

그는 산중에 살면서 계절 변화를 민감하게 자각한다. 휘파람새 같은 철새나 개구리, 매화꽃이 전령이다. 개구리의 첫 소리와 매화나무의 개화는 아직 이른 봄이고, 휘파람새가 새벽 무렵 나타나 후이후이 하고 잠을 깨워야만 비로소 봄이다. 이불재에 가을 풀벌레 소리 들고 전령처럼 사립문을 열었다.

안 그래도 작은 체구인데, 그는 더 낮아지려 하고 있었다. 신간 ‘길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황금물고기, 2016)에 웅크린 자신을 온전히 드러냈다. 불제자로 살아가는 그가 부처님의 자비로운 지혜를 대화하듯 풀어낸 산중일기다. 하심과 인과, 인연들에 대한 소소한 기억,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산책하듯 읽어 내려가다 보면 부처님 시선이 느껴진다.

“솔직한 심정을 글로 썼어요. 일기처럼 써 왔던 글을 모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제 사상의 정수가 담겼어요. 결국 아는 것이 모르는 것이 더라고요. 이 책의 글들은 내 삶의 길에 찍힌 발자국들이에요. 언젠가 사라질 흔적들이지요. 나의 상념, 단상, 내가 만난 사람들, 그 추억들의 기록입니다. 나를 모자이크한 그림과 같습니다.”

어제와 오늘, 이불재와 닿은 인연들이 글감이다. 법정 스님을 비롯해 이해인 수녀, 임권택 감독, 박완서 소설가, 홍기삼 시인, 최인호 소설가, 원각 스님, 원산 스님, 혜국 스님, 수불 스님, 정념 스님 등등. 그에게 생을 깊이 들여다보게 한 객들이다. 사람뿐만 아니다. 유정무정이 설법하는 지혜가 글감이다.

그는 목탄난로 연통 속 고체화된 검댕이에서 업장을 봤다. “검댕이 고체화되면 결국 연통을 뜯어야 하듯 잘못된 업을 지우려면 업장이 되기 전에 참회해야 고생이 덜 할 것 같다.” 이불재 아래 다랑이 논밭에서 호미 들고 일하는 농부들 모습에서는 화두를 던진다. “서재 벽에 화두처럼 호미를 걸어두고 산 일이 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를 다잡기 위해서였다. 그대는 그대의 방에 무엇을 걸어 두고 있는지…. 인생 앞에 걸어둔 화두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법정 스님과 불일암 오솔길 걸으며 바라본 마른 갈대에게서 무정설법도 들었다. 병치레하듯 말라 비틀어져 있는 갈대는 한 해 전 자란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서 있었다. 스님은 “여린 갈대가 스스로 설 때까지 받침대가 돼주기 위해서라오. 여린 갈대 더 자라면 마른 갈대는 스스로 넘어지지요”라고 했다. 그는 “어떤 길을 걸으며 살 것인가” 되묻는다.

“이 세상 모든 만물에는 불성이 깃들어 있지요. 실유불성(悉有佛性)입니다. 거울과 같아요. 자신의 불성 조금이라도 엿본 이는 무정물에서도 지혜를 발견하기 마련입니다.”

▲ ‘길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
정찬주 지음 / 황금물고기
그동안 써왔던 글의 편린들 깊은 곳 어딘가에 늘 부처님이 자리했다. 기자들이 ‘불교 전문작가’라는 별칭을 붙였다. “어떻게 보면 가능성을 좁히지만 나쁘지 않다”고 웃어넘긴다. 사실 문학에 입문한 작품은 서울 용산에 있었던 기숙사 이야기를 쓴 단편소설 ‘유다학사’다. 1983년 월간 ‘한국문학’에서 신인상으로 당선됐다. 이후 ‘무문사(無門寺)에 가서’ ‘몽외조(夢外鳥)’ ‘겨울남행’ 등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그의 말마따나 “인과란 질량불변의 법칙과 동의로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다. 사춘기 시절부터 글을 쓰고 싶었다. 교내 백일장에 출품한 시가 장원에 당선되면서 꿈을 키웠다. 집에 세 들어 살던 월부 책장사(전집 팔아 매월 수급하던 사람)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문학과 지성사, 창작과 비평에 실린 작품도 모조리 탐독했다.

불연이 깊다. 재수 끝에 1973년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훗날 선대가 쌍봉사 중수에 시주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질량불변의 법칙일까. 불교동아리 활동을 했다. 방학 때면 쌍봉사에서 습작했다. 안심법문처럼 절에 들면 들끓던 마음이 편했다. “온갖 생각으로 몸살 앓던 마음 다독여주는 어머니의 품”이었다. 그는 산골처녀처럼 수줍게 서 있던 사방 한 칸 법당 대웅전에서 처음 부처님 당부를 들었다. “늘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부처님”이라고.  

월간 ‘불교사상’ 기자로 일하면서 불교에 젖어 들었다. 이후 대학 선배 고 정채봉 동화작가 권유로 샘터사에 직장을 잡으면서 인생에 영향 끼친 인연을 다수 만났다. 고 최인호 소설가와 일주일에 한두 번씩 차를 나눴고 법정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당시 한국문학사 편집책임자였던 조정래 소설가와 교유했다. 한승원 소설가를 한 달 내내 설득해 장편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연재하도록 했다. 

 2001년, 홀연 서울 생활 청산하고 이불재에 자신 가두고 사립문 빗장 걸었다. 봄엔 새 생명 움트는 소리, 여름엔 짝을 찾는 매미의 사랑가, 가을엔 익어가는 생명들 스치는 넉넉한 바람, 겨울엔 말없이 내리는 눈과 함께 글을 썼다.

낙향한 뒤 단 하루도 연재를 놓지 않았다. ‘선방 가는 길’ ‘눈부처’ ‘대백제왕’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 ‘인연’  ‘소설 무소유’ ‘가야산 정진불’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 ‘다산의 사랑’ ‘천강에 비친 달’을 냈다. ‘암자 가는 길’ 시리즈는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진정한 휴(休)를 되돌아보게 했다. ‘법보신문’에 연재했던 성철 스님 일대기 ‘산은 산 물은 물’과 일타 스님 일대기 ‘인연’이 소설가로서 그를 대중에게 널리 알렸다. 정각 전 이야기를 담은 헤르만헤세 ‘싯다르타’의 아쉬움은 ‘니르바나의 미소’에 쓴 부처님 열반 3개월 전 이야기로 달랬다. 일러스트레이터 둘째 딸과 함께 동화그림책 ‘마음을 담는 그릇’도 출간했다. 현재 ‘이순신의 7년’과 ‘단군의 아들’을 집필 중이다.

▲ 법정 스님과 정찬주 소설가가 불일암 툇마루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다작을 하는 편입니다. 연재를 놓아본 적이 없는데 그래서 ‘글농사’라는 말을 즐겨합니다. 천수답(빗물로만 경작하는 논)의 원고지에 글을 쓴다는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후회해본 적 없어요. 글 쓸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수행하듯 씁니다. 수행하는 스님들이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 그리시지 않는 이치와 비슷해요.”

이불재 사립문은 집필 위한 취재나 객이 연다. 그는 어떤 글을 쓰든 발품 팔았다. 왕인 박사 흔적을 좇을 때 일본 오사카에서 아예 두 달 살았다. 성철, 만해, 지장, 일타, 경봉, 혜암, 법정 스님 등 근현대 큰스님들이 이불재서 되살아 날 때면 수많은 인연제자들이 소식 물고 찾아왔다. 

그의 말과 글이 조심스럽다. “눈 길 걸을 때 함부로 걷지 말라”고 했던 서산대사 경책을 믿는다. 상대방 표정이 보이지 않는 전화통화도 마찬가지다. 질량불변의 법칙이다. 다른 에너지로 허공에 떠돈다고 생각한다. “인연을 믿는다면 함부로 말하고 글을 쓸 일이 아니다. 지나간 일들이 반드시 메아리로 되돌아온다”고 했다.

“난로에 불을 붙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땔감이 아니라 불쏘시개에요. 불쏘시개가 있어야만 장작에 불이 붙습니다. 글 한 줄이 누군가의 인생에 활활 불을 지펴주는 불쏘시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의 글은 이미 세상을 바꾸고 있다. 글을 생명과 맞바꾼 노신사가 있었다. 6개월 시한부 인생 끝자락에 그의 책 배낭에 담고 암자를 순례하며 6년째 살고 있노라 노신사는 고백했다. 입국 때마다 공항 구내서점서 그의 산문과 소설을 읽고 감동 받은 파독 간호사도 있었다. 가톨릭 신자임에도 절이 자신에게 맞는다며 쌍봉사와 이불재를 찾은 오스트리아 일급 뮤직매니지먼트였다. 몇몇 스님은 그의 글을 읽고 삭발염의했다. 고 최인호 소설가는 “정찬주라는 공양미 삼백 석이 없었더라면 나는 불교에 눈을 뜰 수 없었다. 내게 있어 문수보살”이라고 했다. 경허 스님 구도기 ‘길 없는 길’은 그렇게 태어났다.

새벽녘 이불재에는 쌍봉사 범종 소리가 객이다. 그럴 때마다 정찬주 소설가는 문득 불가의 스승들을 만난 게 행운이라고 여긴다. 행운일까. 질량불변의 법칙이다.

오래 전 이해인 수녀가 다녀갔다. 수녀 2명과 동행한 이해인 수녀는 ‘암 트리오’라고 소개하며 여고생처럼 까르르 웃었다. 차담 나눈 뒤 이해인 수녀는 방명록에 이렇게 썼다.

“초록비 내리는 날, 초록빛 마음으로 ‘이불재’에서 ‘다향심’을 마시며 평상심, 청정심을 얻어갑니다. 2009년 9월25일.”

바람이 분다. 쌍봉사 범종, 이불재 풍경 쓰다듬고 제 갈 길 부지런히 간다. 사립문 나선다. 배웅 마치고 돌아서는 이불재 주인장 발걸음 궤적 따라 적어본다.

“길 끝나는 곳처럼 보였던 이불재에 길이 있더라.”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정찬주 소설가 추천도서

 
‘오세암’/ 저자 정채봉/ 샘터사
1986년 초판 발간 이래 깊은 울림으로 꾸준하게 사랑받는 동화의 고전이다. 정찬주는 ‘오세암’을 동화문학의 정점이라고 평한다. 작가의 문학정신이 원숙하게 만개했기 때문이다. 정찬주는 “정채봉 선생은 동심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며 “우리들이 잃어버린 혹은 외면하고 있는 인간의 선의지를 우수 어린 문장으로 형상화했다”고 추천이유를 밝혔다.

 

 

 

 
‘길 없는 길’/ 저자 최인호/ 여백
“우리나라 구도문학의 소중한 자산이다.” 고 최인호 소설가가 생전에 강한 애정을 갖고 위대한 인간 부처, 한없이 매력적인 사람 경허 스님 구도일대기를 쓴 작품이다. 정찬주는 “대문 걸어 잠그고 2년 동안 불교공부를 한 끝에 선사가 오도 노래 부르듯 집필하기 시작한 작품”이라며 “최인호 선생이 승복 입고 강남대로를 활보할 정도로 몰두했다”고 설명했다.

 

 

 

 

‘인도방랑’/ 저자 후지와라 신야/ 작가정신
사진가 후지와라 신야가 3년 동안 여행한 인도 이야기를 압도적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글과 사진으로 담은 책이다. 고행과 여행의 한 가운데를 걸으며 만들어 냈던 기억을 하나하나 꺼내 신비함과 현대문명이 공존하고 있는 인도를 세밀하기 그려낸 방랑기다. 정찬주는 “한 마디로 질서에 길들여진 문명인들의 강박관념을 치유하는 처방전 같은 책”이라고 평했다.

 

 

 

 

‘아소까’/ 저자 일아/ 민족사
부처님 열반하시고 약 200년 뒤, 인도를 통치했던 왕 아소까에 대한 역사적 조명, 일생, 각문을 연구한 책이다. 판독 가능한 38개의 바위각문, 돌기둥각문을 완전히 다 번역하면서 아소까라는 인물이 인도에 끼친 영향을 다뤘다. 정찬주는 “동물도 존엄한 생명을 가졌다고 해서 인도 전역에 동물병원을 짓게 하는 등 칼 버리고 부처님 가르침에 의거해 통치한 왕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했다.

 

 

[1361호 / 2016년 10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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