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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가을 단풍이 주는 메시지

기자명 김용규

멈추고 돌려줄 줄 아는 자연의 지혜

강원도 평창의 숲과 지리산 주변을 오가고 있습니다. 길을 오가며 주마간산 격으로 먼발치에서 숲을 바라보면 그 전체는 아직 녹색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이미 숲의 어느 부분들은 벌써 붉어지거나 노래지고 있었습니다. 평창의 숲에서는 벌써 ‘붉나무’가 제 이름만큼이나 붉게 숲의 가장자리 한구석을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높다랗게 커서 빛 좋은 자리를 차지했던 ‘산벚나무’들도 제 잎들을 노르스름한 빛깔을 머금은 듯 비추며 붉은 빛깔로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붉나무나 산벚나무가 그렇듯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며 풀들에게는 이제 제 순서대로 단풍(丹楓)이 들 것입니다.

이제 10월은 산하 도처가 그 아름답고도 아까운 단풍의 장면들로 한껏 아름답게 채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숲과 나무들에게 단풍은 채우는 국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돌이키고 멈추는 순간의 시작입니다. 단풍은 여름 숲을 거치며 거침없이 터트려 왔던 나무들의 성장과 결실의 열망을 이제 막 멈추기 시작했다는 가장 확연한 증거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산하에는 이제 곧 찬 서리가 내리고 곧이어 엄혹한 북풍(北風)과 한설(寒雪)의 겨울이 당도할 것입니다. 자연의 변화가 던지는 속수(束手)에 나무와 풀들이 전혀 무책(無策)이지 않다는 증거의 하나가 바로 단풍입니다.

나무들은 저마다 멈춰야 할 때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더 커지려는 욕망을 닫고 이제 견뎌내야 하는 시점을 준비하는 모습, 그 멈춤으로의 전환이 바로 단풍인 것입니다. 단풍은 당초에 없었던 새로운 빛깔로 자신의 잎을 물들이는 변화가 아니라, 오히려 성장을 위해 잎의 끝까지 내뿜고 배치해 두었던 영양물질 일부를 서서히 뿌리로 회수해 가는 모습입니다. 광합성을 담당하던 엽록체 속의 엽록소를 분해하여 회수하고 나면 이제 보다 안정적인 색소만이 남는데, 그것이 바로 그 나뭇잎의 단풍색이 되는 것입니다. 붉나무나 단풍나무, 화살나무는 찬란한 오렌지 빛깔로, 우리가 잘 아는 은행나무는 노란 빛깔로 성장의 욕망을 멈춘 제 잎의 색을 온전히 드러냅니다.

나는 가을마다 생각합니다. ‘욕망을 멈춘 나무들의 빛이 모여 어떻게 저리도 형형색색 아름다울까? 내 삶의 빛깔도 저랬으면 좋겠다. 내 헛된 욕망을 자주 멈추고 거둘 수 있어서 더 깊게 진아(眞我)로서 세상과 마주하고 그 빛깔이 저 가을날의 붉나무이거나 화살나무 빛깔 같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머무는 세계의 사람들도 그러하여 우리가 어울려 빚어내는 세상의 빛깔이 저 가을날의 숲 색깔 같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제 빛깔로 드러나는 나무들의 단풍잎은 곧이어 탈락(脫落)의 순간을 예비합니다. 나무들은 회수하는 영양물질 일부를 잎자루를 매달고 있던 자리에 가공하여 배치함으로써 추위를 견딜 수 있는 물질로 코팅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식물학자들은 그것을 ‘떨켜’ 혹은 ‘분리층’이라고 부릅니다. ‘떨켜’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곧 찾아올 혹한으로부터 몸을 지켜내기 위함입니다. 잎이 떨어진 자리가 동해(凍害)를 입지 않도록 하려는 장치인 것이지요.

‘떨켜’가 만들어지고 나면 나무들은 미련 없이 제 성장의 장치였던 잎을 탈락시킵니다. 그것을 우리는 낙엽(落葉)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이 만드는 낙엽 속에서 숭고함을 느낍니다. 낙엽은 단순히 욕망을 회수당하고 미련 없이 버려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숲에서 낙엽은 숲을 이루는 모든 존재들을 위한 이불입니다. 공원의 땅이 꽝꽝 어는 혹한 속에서도 숲의 흙은 상대적으로 덜 업니다. 낙엽의 힘이지요. 그 속에서 식물의 뿌리만이 아니라 무수한 미생물과 벌레들이 겨울을 건넙니다. 낙엽은 또한 모두를 위한 퇴비로 작용합니다. 숲에 누구도 비료를 주지 않지만 해마다 어김없이 저절로 푸르러지고 깊어지게 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 바로 그 속에 있는 것이지요. 나는 그것을 ‘숲 생명체들의 공동체적 환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대 역시 이제 곧 눈부시게 아름다운 단풍의 계절과 마주하시겠지요? 멈춰야 할 지점에서 멈출 수 있는 힘을 만나고, 세상을 위해 기꺼이 나의 일부를 되돌려 주는 자비행과도 만나시기 바랍니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61호 / 2016년 10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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