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헌옷을 처분하며
38. 헌옷을 처분하며
  • 이미령
  • 승인 2016.10.25 14: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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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부들은 물질이 나를 떠날까 두려워 하죠”

▲ 일러스트=강병호

스님! 안녕하세요.

가을이 삶 깊숙하게 들어왔습니다. 베란다에 쏟아지는 가을 햇살에 화분의 푸른 잎들이 햇빛샤워를 합니다. 그 모습이 참 눈부셔서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았지요. 그 무덥던 여름날에는 이런 환희가 느껴지지 않았는데 햇살 속에 열기의 무게가 살짝 덜어지고 나니 햇살이 품고 있던 빛이 드러나네요.

옷 한벌 살때 얼마나 썼을까
결국 옷산다며 욕망에 돈 써
두려움 상쇄하려 사고 또 사
무상법칙 있는데 항상 외면


뭣이든 좀 덜어내는 것이 진리가 아닌가 합니다. 요즘 세간에서는 미니멀라이프가 한창입니다. 할 수 있으면 최소한의 것만으로 살아가고,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가지고 있지 말기!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삶의 방식일 테지요. 하지만 어느 사이 세상은 이런 주의주장을 외치며 자신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 역시도 덜어내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 주말 저도 옷장 정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입지 않는 옷을 옷장에서 덜어냈지요. 게다가 오래된 가방과 신발도 꺼냈습니다. 이전에도 입지 않는 옷가지들을 추려낸 적이 있는데, 그때는 기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간혹 헌옷 수거함에 넣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헌옷을 사는 업체에 연락했습니다. 이 옷가지들을 살 때의 가격을 떠올리면서 과연 내가 팔 때는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가 궁금했지요. 물론 큰돈을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헌책방에서 책을 팔아본 적도 있고, 파지 줍는 할머니의 하루 벌이가 어떤지도 신문에서 읽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옷과 잡동사니 뭉치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지요.

다음 날 헌옷수거업체 사람이 집으로 찾아와서는 저울 위에 보따리를 올려 보더군요. 그러더니 허리춤에서 3000원을 꺼내 제게 주었습니다.

3000원이요, 3000원.

저는 너무나 기가 막혔습니다. 1킬로그램에 200원씩이라고 하던데 왜 이리 적게 주냐고 물었지요.

그가 대답하더군요.

“30킬로그램이 넘어야 200원씩 쳐드립니다. 댁의 물건은 다 합쳐도 20킬로그램밖에 되지 않는데 3000원 드린 것도 제가 후하게 쳐드린 거예요.”

스님, 그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를 사면서 저는 얼마나 돈을 썼을까요? 그리고 그 물건을 본전 뽑을 만큼 충분히 사용했을까요? 아닐 겁니다, 절대로!

그러니까 결국 저는 옷이나 신발을 산다면서 허영과 욕망, 갈망을 위해 돈을 쏟아 부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물건들을 구입하면서 지불한 총액을 생각해보자니, 지금 그 허영 뒤에 남은 것은 단돈 3000원!

대체 물건의 값이란 어떻게 매겨지는 걸까요? 그리고 우리가 지불하는 값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얼마를 지불해야 가장 적당한 값을 치르는 것일까요?

그 돈을 받아든 이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부지런히 모으고 쌓아두었던 것들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돈이란 녀석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지요. 돈을 벌기 위해 밤잠을 줄여가며 일하고, 돈을 모으고, 그 돈을 쓰고, 돈을 빌리고, 돈을 꿔주고, 돈 때문에 죽고, 돈 때문에 살고…. 우리들 인생이 이렇지요.

앞으로도 저는 변함없이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꼭 필요하거나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이 있으면 돈을 쓸 것입니다. 하지만 3000원이란 그 액수를 잊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집안에 쌓여 있는 물건을 덜어내는 것은 얼핏 사소한 집안정리 같아 보이지만 제 자신에게는 매우 큰 흔들림을 안겨줍니다. 물건에 담아두었던 제 집착을 마주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정리하고 처분하면서 그 물건에 기대어 뭉쳐놓았던 제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일은 반갑지 않습니다. 사소한 메모지 한 장, 잉크가 굳어버린 펜 한 자루를 버리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물건을 ‘진짜 나’인 양 착각하고 살아왔는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구멍 난 양말이었고, 나는 누렇게 색이 바랜 주걱이었고, 나는 짝이 맞지 않는 젓가락이었고, 나는 보푸라기가 잔뜩 난 스웨터였고, 나는 어디서 받아왔는지도 모를 어떤 전단지였고, 나는 한 페이지도 읽히지 않은 채 책장에 20년 동안 꽂혀 있던 책이었고, 나는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플로피디스크였고, 나는 1년 전에 죽은 개가 쓰던 밥그릇이었습니다.

누군가 달라고 하거나 가져갈까봐 두려워서 ‘내 것’을 지켰습니다. 그게 ‘나’이기 때문에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 사물들을 내 곁에 두면서 끝없이 나를 확장해갔고 나를 강고하게 다졌고 나를 안심시켰습니다.

스님은 지난 번 편지에서 ‘두려움’을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있는 자들의 신시(信施)가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는 어른스님의 간곡한 당부에서 깊은 두려움을 맛보아야 했던 스님들 이야기를 들려주셨지요. 그 두려움은 얼마나 고마운 것입니까? 그런 두려움이 있기에 수행자는 한눈팔지 말고 올곧게 수행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세속 범부들에게는 물질이 나를 떠나갈까봐 품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 두려움을 상쇄하기 위해 끝없이 물질을 모으고 또 모읍니다. 물질에는 변하고 달라진다는 무상의 법칙이 당연히 따라오는 데도 그런 사실에는 눈을 감고 끊임없이 그 속에서 영원한 평안을 갈구하지요.

그 뿐인가요? 제가 지난 번 편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뢰가 무너져서 겪게 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두려움이란 녀석, 정말 다채롭네요. 우리에게 병도 주고 약도 줍니다. 이 두려움을 제대로만 살펴도 마음공부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율을 깨거나 함부로 행동한 뒤에 자신의 행위를 살펴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우리에게 약이 되는 두려움이라면, 그런 행동 뒤에 두려움은커녕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은 최악이 아닐까 합니다. 몰염치라고 해야겠지요.

부처님께서 당신의 친아들 라훌라에게 들려주신 가르침도 바로 이것 아니겠습니까? 악업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자는 발 씻은 물이 담겼다가 엎어져서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는 더러운 대야와도 같다는 그 가르침 말입니다.

요즘 세상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부끄러움은 고사하고 뻔뻔하게 얼굴을 더 높이 드는 몰염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권력의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고서 멋대로 부정을 저지르고, 그걸 탓하는 사람들에게 ‘이것도 능력이니 자신의 무능력함이나 탓하라’는 철없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 부정 뒤에 당연히 찾아올 과보가 얼마나 두려운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행위가 세상을 얼마나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겁을 상실한 중생들이 지옥을 만듭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 눈부신 10월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으니 참으로 눈물납니다.

스님, 평안하시길….

이미령 드림 

이미령 북칼럼니스트 cittalmr@naver.com


[1364호 / 2016년 10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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