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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그곳-용장사지

기자명 이창윤
  • 수행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경주 남산에 자리한 해동유가종 발상지

하나의 사상은 전개된 지역의 사회적, 역사적 풍토에 맞게 수용되어야 생명력을 가진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됐을 때도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고유사상 즉, 도교에 맞게 불교를 해석했다. 불교의 공사상을 도교의 무위 사상에 대입시켜 이해했던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선이나 화엄·천태·법화·정토사상 등 인도에서 수입된 사상체계를 중국적인 불교사상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도 예외없이 적용되고 있다.

불교가 신라에 처음 전래될 당시 유례없는 탄압을 겪었던 것도 중국 불교를 우리 정서에 맞게 토착화 시키지 못했던 결과이다. 반면에 이차돈의 순교 이후 불교가 위정자들의 정치이념이자 민초들의 생활이념으로 뿌리내리게 된 것은 중국불교를 우리 정서에 맞게 토착화 시켰기 때문이다.

원광·자장 스님 등이 이 땅에 불교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한 이라면, 대안 스님이나 혜공, 원효 스님 같은 이들은 불교를 민중들에게 널리 전파한 분들이다. 또, 원효 스님이나 의상 스님 같은 이는 중국불교사상을 한국적인 불교 사상으로 토착화시킨 분들이다.

원효 스님과 함께 신라 3대 저술가로 널리 일컬어지는 태현(太賢) 스님과 경흥(憬興) 스님은 통일 신라 이후 불교가 우리 나라 정신문화의 뿌리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기여한 대 사상가이자 학승이다.

고속도로나 철도를 이용해 경주를 찾는 사람들은 시야를 가로막으며 `어서 오라'고 반기는 암산(巖山)을 대하게 된다. 왕경(王京)의 남쪽에 자리잡아 오악(五嶽)의 하나로 숭앙받던 남산이다.

`불국토'. 남산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 단어가 가장 적절치 않나 싶다. 학자들이나 일반인들은 남산을 `노천박물관'으로 부르지만, 여기저기 있는 불적을 보면 신라인들이 이루려고 했던 정토에의 염원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남산에서 가장 수려하고 수량이 많은 곳이 용장골이다. 용장골은 경주에서 언양으로 향하는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골짜기의 이름은 일제시대에 한 절터에서 `茸長寺'라는 명문이 있는 와당이 발견됨으로써 붙어졌다. 명문이 발견된 용장사는 입구에서 산길을 따라 2km 쯤 떨어진 골짜기 동북쪽 기슭에 있다.

《삼국유사》 〈현유가해화엄(賢瑜伽海華嚴)〉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유가종의 개조 대현(大賢, 태현) 대덕은 남산의 용장사에 살고 있었다. 그 절에는 미륵불의 석조 장륙상이 있었는데 대현이 늘 불상의 주위를 돌면 불상도 또한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

용장사는 이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태현 스님이 주석하던 곳이다.
원효 스님과는 달리 함께 3대 저술가로 불리는 태현·경흥 스님은 생애나 행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삼국유사》를 비롯한 각종 문헌에 단편적인 사실만이 전할 뿐이다.

스스로 청구사문(靑丘沙門)이라고 불렀던 태현 스님은 당시 불교의 모든 교학 분야를 섭렵했다. 스님은 특히 유식학과 인명학(因明學)에 조예가 깊어 후세 사람들이 `해동의 유가조(瑜伽祖)' 또는 `해동의 자은(慈恩, 중국 법상종의 개조 규기 스님)'이라고 불렀다.

스님의 학문적 깊이는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 등 해외에까지 미쳤다. 이를 두고 일연 스님은 “홀로 사곡되고 그릇된 것을 판정하고 은밀하고 심오한 것에 통달하여 여유있게 이치를 분석하였으니 동국의 후진들은 모두 그 해석에 따랐으며, 중국의 학사들도 자주 이것을 얻어 요목으로 삼았다”고 기록했으며, 〈대현법사의기(大賢法師義記)〉를 찬했던 중국의 도봉 스님 같은 이는 “500년 만에 한 번 나오는 성현”이라며 “기로에서 방향을 잃었을 때 수레에 부착된 나침반을 보듯이 어로가 막혔을 때 스님이 저술한 장소(章疏)를 보라”고 칭송했다.

스님은 당에서 독창적인 학문세계로 명성을 떨쳤던 원측(圓測) 스님의 제자인 도증(道證) 스님의 사상을 계승했다. 그러나 스님은 이들의 주장을 무조건 추종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수용할 것은 수용하는 등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펼쳐 갔다.

해동 유가종의 개조로 일컬어지고 있지만 스님의 저술이 유식학에만 치우쳐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범망경》, 《화엄경》, 《반야경》, 《법화경》, 《열반경》, 《무량수경》, 《미륵상생경》 등 경·율·론 삼장을 두루 연구했다. 스님의 이같은 학문적 편력은 “입문한 직후에는 화엄학을 배우고 뒤에 법상(法相)을 익혔던” 전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스님의 저술은 대부분 `고적기(古迹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스님이 자신의 저술을 고적기로 이름지었던 것은 “고인(古人)들의 여러 주석들에 순응하여 풀이할 뿐 개인의 견해로써 함부로 주석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다.

50여 부 100여 권에 이르렀다는 스님의 저술은 거의 전하지 않고,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성유식론고적기(成唯識論古迹記, 成唯識論學記)》를 비롯해 《약사본원경고적기(藥師本願經古迹記)》, 《범망경고적기(梵網經古迹記)》, 《범망경보살계본종요(梵網經菩薩戒本宗要)》,《기신론고적기(起信論古迹記, 起信論內義略探記)》 등 5부만이 전할 뿐이다.

스님의 제자로는 회암(檜巖), 운권(雲卷), 귀암(龜巖)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스님은 학승으로서의 면모만을 갖춘 것이 아니었다. 《삼국유사》 〈현유가해화엄〉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돼 있다.
경덕왕 12년(753) 여름에 가뭄이 심하게 들자 임금이 스님을 내전으로 불러들여 《금광경(金光經)》을 강하도록 했다. (중략) 어느날 낮에 경을 강할 때 스님이 향로를 받쳐들고 잠자코 있으니 잠깐 사이에 일곱 길 높이의 우물이 솟아올랐다. 궁중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 그 우물을 금광정(金光井)이라 불렀다.
이 일화는 스님의 국리민복(國利民福)에 최선을 다하는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용장사는 세조의 단종 폐위에 항거한 생육신의 한 사람인 설잠(雪岑, 김시습) 스님이 주석하며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저술한 곳이기도 하다. 스님은 단종의 폐위에 충격을 받고 전국의 명승지를 찾으며 방랑하였는데, 용장사에서 가장 오래도록 머물렀다. 스님은 남산의 아름다움에 취해 살았던 듯 "금오산에 온 뒤부터 먼 데 가기를 즐겨하지 않고 바닷가나 들에서 노닐면서 매화와 대를 읊으며 취해 살았다.”는 시를 남기고 있다. 영조 때에 이르러 매월당사(梅月堂祀)를 용장사에 세우고 명복을 기렸다고 전하지만 그 터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태현 스님과 설잠 스님이 머물렀던 용장사는 폐사되어 현재 절터와 삼륜대좌불, 마애불상, 삼층석탑 등 만이 남아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절터에는 현재 돌축대만이 남아있는데, 동서가 약 70m, 남북이 약 40m 되는 넓이다. 이 지역에는 크고 작은 11단의 돌축대가 남아있다. 이곳에서 산봉우리를 향해 올라가다보면 자연석의 하대석 위에 북 모양으로 반석을 쌓아 그 위에 결가부좌한 불상을 얹은 `삼륜대좌불'과 마애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다. 일설에는 높이가 16자인 것으로 보아 이 삼륜대좌불이 태현 스님이 불상 주위를 돌면 스님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던 불상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곳 절벽 위에는 용장골에 들어서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높이는 4.5m에 불과하지만 하층 기단없이 바위산에 직접 상층 기단을 쌓아 장엄하게 자리하고 있다.


경주=이창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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