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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룡사 황룡의 실제

기자명 주수완

토착세력 상징 ‘용’ 날려보낸 진흥왕, 사찰 세워 회심의 반격

▲ 진흥왕대에 궁궐 공사중 황룡이 나타나 절로 고쳐 지었다는 황룡사의 터.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 보각국사 일연(一然, 1206~1289)은 본문에 해당하는 첫 장의 제목을 ‘기이(紀異)’로 하였다. 그리고 이어 “성인은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 가르침을 베푸는 데 있어 괴력난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같은 역사서가 객관적인 사실만을 다루고 있는 것과 차별화하여, 일연 스스로도 역사서술의 객관성이 중요함을 알고는 있지만, 이 괴력난신, 즉 기이한 일들을 자신의 저서에서 다루게 될 것에 대한 양해를 미리 구하는 것이었다.

궁궐 신축 공사중 용 나타나자
괴이히 여기고 사찰로 ‘급선회’

어떤 ‘특수효과’인지 모르지만
‘왕’ 지켜주는 용 없어졌으니
궁궐 기능 상실한 결과 불러

용궁 앞에 대찰 건립함으로써
토착 세력 제압 의지 가시화
신라에 불교 정착 계기 만들어

첫 장인 ‘기이’는 괴이하다는 의미의 기이(奇異)와 표현은 다소 다르지만, 본문에서는 이미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神異)에서 나타난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라고 하여 이러한 기적적인 사실들을 역사서술에서 결코 배제할 수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사(史)’가 아닌 ‘사(事)’로  붙였으리라.

흔히 ‘삼국유사’를 영어로 표기할 때는 Momorabilia of Three Kingdoms로 하고 있는데, 이를 ‘삼국사기’와 구분하여 History로 하지 않는 것은 맞지만, ‘Memorabilia’가 ‘기억할만한 일’ ‘주요 기사’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을 보면, 일연의 원래 의도와는 그리 부합하지 않는 듯하다. ‘유사’, 즉 남겨진 이야기는 어쩌면 이렇게 기이한 일이어서 ‘삼국사기’에 실리지 못한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차라리 Legend of Three Kingdoms라는 제목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일연은 이러한 괴이한 일들 가운데 진실, 특히 불교적 진실이 담겨져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 황룡사 북쪽에 있는 거대한 우물터. 용궁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고 있다.

이번 연재에서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일들을 보다 현대적 시각으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즉, 그저 옛날의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연이 생각했던 대로 그러한 전설 속에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다고 보는 시각으로 접근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성서든, 불경이든, 그리스 신화든 워낙에 방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저 대의만을 기록할 뿐이다. 그래서 그 축약되고 함축된 기록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 상상이 필요하다. 이러한 상상은 때로는 주관적인 추측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보다 합리적인 설명이 나오기 전까지는 우선 하나의 가설로 간주해 주시길 바란다. 그 첫 이야기를 황룡사에서 풀어보려고 한다.

‘삼국유사’의 ‘탑상’편 처음은 경주 황룡사의 ‘가섭불연좌석’에 관한 이야기로서 먼저 황룡사의 창건에 대해 밝히고 있다. 이에 의하면 진흥왕 14년 계유(553년) 2월에 월성 동쪽에 새로이 궁궐을 짓는데 그 터에서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이를 괴이하게 여겨 궁궐 대신에 절인 황룡사를 지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삼국사기’에도 동일하게 실려있는 기록이다. 아마도 실제 황룡이 나타났다고 믿는 현대인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더 근본적으로는 황룡이 나타난 일과 궁궐을 짓다 말고 절로 고쳐 지은 것은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처음 드는 생각은 용은 신성한 존재인데, 왕이 거주하려던 공간에서 신성한 용이 나왔으므로 인간이 감히 스스로 거주할 공간으로 삼지 못하고 대신 그 땅을 부처님께 희사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용은 왕보다 더 높고 신성한 존재가 된다. 진흥왕이 용에게 밀려 자신의 땅을 부처님께 바친 것이다. 그러나 왜 용이 나타났는데 이를 불교에 바쳤을까? ‘가섭불연좌석’ 기사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 용궁은 현재의 황룡사에서 분황사로 가는 길목 근처에 있었던 셈이다.

“신라 월성 동쪽 용궁의 남쪽에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다.” 가섭불 연좌석이 있는 곳이 황룡사이므로 황룡사는 용궁 남쪽에 있다는 뜻이다. 용궁 남쪽에서 공사를 하다가 용이 나왔는데, 그렇다면 이는 용궁에 희사되었어야 더 타당하지 않을까? 백제 미륵사의 경우는 미륵불이 늪에서 출현했기 때문에 그곳에 절을 세운 것이었다. 만약 황룡사의 경우도 굳이 절을 짓고 싶었다면 용이 아니라 부처님이 한번 나타나주셨어야 더 신성함이 강조되는 것 아니었을까?

때문에 최근에는 이와는 다른 학설이 제기되었다. 용은 곧 왕을 상징하기 때문에 궁궐터에서 용이 출현한 사실은 진흥왕이 곧 부처임을(이를 흔히 ‘왕즉불(王卽佛)’ 사상이라고 부르는데 굳이 ‘사상’이라는 고차원적인 개념으로까지 받아들여야할지는 잘 모르겠다) 상징하는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흥왕을 부처로 간주하여 궁궐이 절로 상향조정되었다는 해석이다. 진흥왕이 스스로를 전륜성왕으로 보이고자 했다는 주장은 많았지만, 황룡사 창건과 왕즉불 사상을 결합시킨 것은 더 진전된 해석이라 하겠다. 더불어 비록 황룡사는 사찰이었지만 사실상 궁궐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황룡사가 실제 궁궐의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진흥왕이 말년에 승복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칭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그는 분명 독실한 불교신자이기는 했지만, 중국 양나라 무제처럼 반미치광이의 왕즉불 신봉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황룡사를 창건할 당시에 자신이 부처로 간주되길 바랐던 인물이 말년에 출가를 하여 부처에서 승려로 스스로 격을 낮춘다는 것은 다소 모순된 일처럼 보인다. 더불어 굳이 궁궐을 절로 바꾸지 않아도 황룡이 나타났다는 루머를 십분 활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 궁궐을 짓는 것이 훨씬 단순한 홍보전략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황룡사의 용은 아마도 고구려 고분벽화 속 청룡의 형태와 닮았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선 궁궐지로 선택된 곳이 용궁의 남쪽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비록 신라 왕실은 법흥왕대에 이차돈의 순교 이후 공식적으로 불교를 받들게 되었지만, 그 다음 계승자였던 진흥왕대에 벌써 불교가 토착의 종교에 비해 월등한 세력을 형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차돈의 순교로 어쩔 수 없이 불교 공인을 묵과했던 토착종교 세력은 진흥왕대에는 어떻게든 불교의 성장을 저지하려고 더욱 치밀한 공작을 폈을 것이다. 신궁의 건설지가 용궁의 남쪽으로 정해진 것은 당시 토착종교를 대표하는 용궁 집단의 본거지 바로 앞에 궁궐이 세워지도록 하여 반월성에서 왕권을 끌어내 용궁의 직접적 영향력 하에 두려고 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서른을 갓 넘긴 진흥왕은 이를 원하지 않았지만, 용, 넓게는 물을 숭배하는 토착 원로집단은 용이 왕권을 보호한다며 강력히 주장했고, 진흥왕은 이를 완전히 뿌리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진흥왕은 이 간섭으로부터 지혜롭게 벗어날 회심의 반격을 계획했다. 바로 황룡 출현 조작 사건이었다. 어떻게 그런 기막힌 특수효과를 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용 모양의 긴 연등을 만들고 그것을 밤에 연에 달아 날려보냈을지도 모른다. 더 간단하게는 사람들을 시켜 그런 유언비어를 퍼트렸을지도 모른다. 여하간 그 ‘국사’라는 것에 기록된 황룡의 출현은 어떤 방법으로든 당시 신라 사회에 큰 이슈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용이 날아가 버렸다. 용이 날아간 사실은 신성한 사건이 아니었다. 어쩌면 왕권을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새로운 왕궁 건설 터의 전제가 되었던 바로 그 용 자체가 날아가 버린 사건은 더 이상 그곳이 왕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을 수 있다.

여기서 진흥왕은 단순히 왕궁건설을 철회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확실한 반격을 날렸다. 용이 날아간 용궁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니 차라리 불교사찰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방어에서 공격으로 역전된 셈이다.

▲ 진흥왕은 혹시 이런 용 연등을 연에 달아 밤중에 날아올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용이 날아간 용궁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삼국유사’ 권3 ‘흥법’ 편에는 신라의 일곱 절터를 언급하는 가운데 분황사를 언급하며 그 위치를 용궁의 북쪽이라 하였다. 용궁의 남쪽이 황룡사이니 결국 용궁은 분황사와 황룡사 사이에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지금 황룡사와 분황사에 가보면 이 두 절은 서로 맞닿아 있어서 용궁이 있을 자리는 없다. 결국 용궁은 원래 황룡사와 분황사 사이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신전이었지만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현재 용궁이 사라진 흔적으로서 황룡사 북원에 있는 큰 우물터를 주목하고 있다. 이 우물이 바로 용궁의 용의 머무는 곳으로 원래 숭배되던 곳이 아닐까 추정되고 있다. 실제 충분히 그럴 만큼 커다란 우물이다.

명목상이나마 용궁으로 남아있던 신전이 완전히 사라져간 시점은 아마도 20여년 지난 뒤 진흥왕이 황룡사에 장육상을 조성하면서 사역이 확대될 무렵 용궁터의 상당부분을 황룡사에 내어 주었을 것이고, 이어 선덕여왕이 즉위하여 분황사를 창건할 때 상당 부분을 다시 내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황룡사에 9층 목탑을 건립할 즈음에는 아마도 전적으로 기능을 상실하고 그저 황룡사의 우물로 전락하게 되었을 것이다.

황룡사 황룡의 전설, 그것은 어쩌면 토착종교 세력과의 보이지 않는 세력 다툼에서 밀릴 듯하던 진흥왕이 던진 패가 보기 좋게 성공함으로써 불교가 신라 사회의 주류 종교로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었다고 일단 간주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용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주수완 고려대·서울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375호 / 2017년 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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