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금강산 건봉사
50. 금강산 건봉사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7.02.27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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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사리 성지서 해탈·극락 문 열 암호를 풀어보다

▲ 능파교 안쪽의 대웅전과 염불당 있는 곳은 현재의 건봉사요, 능파교 바깥쪽의 물 건너 사지(寺地)는 과거의 땅이다. 그러나 저 땅은 언제가 건봉사의 옛 사격이 올곧이 들어 설 미래의 땅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 진신사리(眞身舍利)!

발징의 ‘만일염불’ 결성 후
조선의 ‘아미타불’ 정진 주도

임란 왜구 약탈 불치사리
사명대사가 찾아 와 봉안

금강저·십바라밀 석주
절터와 어루러져 ‘오묘’

열반과 해탈을 상징하기에 사리 자체가 부처님이고 법이다. 초기불교 당시에는 부처님 유시에 따라 불상을 조성하지 않았기에 부처님 체취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던 대상은 오로지 탑. 하여, 탑 속에 안치된 사리는 부처님을 향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리 했다.

▲ 염불성지임을 대변하는 ‘아미타불’ 돌기둥.

사리 자체가 부처님이라 보면 쇄신((碎身)사리를 구분 하는 게 큰 의미는 없겠지만, 그 성보 좀 더 소중히 간직하려는 생각에 머리, 손가락 등으로 구분 지어 기억하려 하는 것이니 왈가왈부할 건 아니다. 사리 중에서도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안치한 세계적 성지를 꼽으라 하면 스리랑카의 불치사를 떠올릴 것이다. 스리랑카 국보 1호의 위상, 캔디 호수와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이 보는 이로 하여금 한없는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절이니 최고의 성지로 회자될 만하다.

중국 불자들은 산시성(山西省)에 자리한 불궁사 석가탑(佛宮寺釋迦塔), 즉 응현목탑(應縣木塔)을 귀하여 여긴다. 1974년 보수 중 그 목탑에서 치아사리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탑 높이 67.31m, 현존하는 목탑 중 가장 높고 가장 오래된 목탑에 치아사리가 봉안돼 있으니 캔디의 불치사가 부럽지 않을 터, 그렇다면 부처님 치아사리를 봉안한 한국 절은 없을까? 우리에게는 금강산 건봉사가 있다.

▲ 적멸보궁 사리탑에 부처님 치아사리 3과가 봉안돼 있다.

청정도량으로 들어섬을 상징하는 여느 일주문과 달리 건봉사는 네 개의 기둥을 가진 문이 ‘불이문(不二門)’이라는 편액을 안고 참배객을 맞는다. 속계와 법계가 둘이 아님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번뇌와 보리 또한 다르지 않음을 아는데서 깨달음은 시작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을 법도 하다.

아, 기둥에 뭔가 새겨져 있다. 통상 일주문에는 경구나 선가에 내려오는 선구가 새겨진 주련이 걸려 있는데 저 불이문은 금강저를 품고 있다. 속계서 떨치지 못한 번뇌망상을 ‘금강저로 깨 버리라!’는 일갈로 들려온다. 경내로 들어서니 길 왼 편에 돌기둥 하나 서 있다. ‘나무아미타불’이 새겨져 있고 기둥 위에 돌로 빚은 새 형상 하나 앉아 있다. 절 밖 사람들의 눈에는 ‘오리’로 비춰지지만 절 안 사람들은 ‘봉황’이라 믿는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520)에 아도 스님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사찰명은 원각사. 그러나 아도 화상 520년 창건설은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신라의 불교 공인(527년) 이전이고, 이때 고성은 고구려 영토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정할 수만은 없다. 눌지왕(417∼458) 때 고구려를 거쳐 온 묵호자(墨胡子), 아도(我道) 화상이 신라 땅 모례의 집에서 처음 법을 전했다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신라 말 도선국사가 중건(937년)하면서 서봉사(西鳳寺)라 했다는 사실이다. 이어서 고려 말 공민왕 7년(1358) 때 나옹 스님이 이 절을 중수(1358년)하면서 건봉사(乾鳳寺)라 개명했고 그 사명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봉사 서쪽 산에 봉황을 닮은 바위가 있어 ‘서봉사’로 했는데 훗날 주역상의 서북(西北)쪽에 해당하는 ‘건(乾)’으로 대체된 듯하다. 그러니 돌기둥에 앉아 있는 건 응당 ‘봉황’이라 해야겠다.

▲ 불이문 기둥에 금강저가 새겨져 있다.

‘아미타불’ 새겨진 돌기둥 따라 사지(寺地)로 들어선다. 이 자리에 원래의 건봉사가 앉았더랬다. 조선의 문인 박윤묵은 금강산을 유람하고 건봉사 소재로 한 시 ‘간성(杆城) 건봉사’를 남겼다.

‘그림 같은 전각과 층루 기세 날아갈 듯/ 봉황의 날개 의연히 아침 햇살을 띄었구나./ 은상(銀床) 위 불상은 영묘한 덕에 번뇌 없고/ 하늘이 아끼는 값진 먹(寶墨) 향기 다하지 않네./ 열두 방아 소리에 산 울리려 하고/ 천개 만개의 달 비쳐 강물은 빛이 나네./ 봉래에서 늙은 나그네 돌아오는 길에/ 또 동림을 향하여 긴 휘파람 부네.’ (한미영 선생 역)

▲ 건봉사 옛 절터. 마주 보이는 가람은 1994년부터 세워지기 시작했다.

전각은 그림 같고 누각은 당장이라도 하늘로 뛰어 오를 듯 한 기세를 안은 절이다. 산중의 대중이 얼마나 많았기에 열 두 방아가 돌아간단 말인가.

한 때 이 절은 3000여칸 규모의 대가람이었다.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가 건봉사 말사였다. 1878년 발생한 큰 불에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됐고, 한국전쟁 당시 아군 3개 사단, 미군 10군단과 북한군 5개 사단 간의 치열한 전투가 이 지역 일대에서 벌어지면서 완전히 폐허로 변했다. 불이문 기둥에도 총탄 흔적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들을 모아 훈련시킨 절이기도 하다. 승병 공양을 위해 쌀 씻은 물이 저 개천을 따라 10리를 넘게 흘러갔다고 하는데, 이를 방증이라도 하듯 엄청난 크기의 돌 절구통이 사명대사 의승병 기념관 옆에 줄줄이 전시돼 있다.

사찰에 들어서기 전 부도전 앞에 사명대사 동상이 서 있는데 건봉사에서의 의병활동만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신라의 자장율사는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후 사리 100과를 얻어 신라 땅으로 이운해 와서는 통도사, 월정사, 정암사, 법흥사, 봉정암 등에 봉안했다. 훗날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통도사 금강계단을 침탈해 사리를 탈취해 갔는데, 사명대사가 임진·정유난으로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 포로들을 송환시키려 도일 했을 때 통도사 사리도 되찾아 왔다. 파헤쳐진 통도사 금강계단을 중수해 사리를 봉안하고, 그 중 불치사리 12과를 이곳 건봉사 사리탑에 안치했다.

▲ 십바라밀이 두 기둥에 5개씩 새겨져 있다.

1986년 6월10일 건봉사에 도굴꾼이 난입해 사리를 훔쳐 달아났다. 주범은 거의 매일 같은 꿈을 꾸었는데 부처님께서 ‘사리를 돌려주어라!’고 꾸짖는 꿈이었다. 주범은 결국 7월14일 공범을 시켜 서울 봉천동 모 호텔에 사리를 맡겨 놓고 달아났다. 그러나 찾은 건 8과. 4과는 끝내 공범이 들고 달아나 사라졌다. 현재 불치사리 3과는 건봉사 적멸보궁에 안치돼 있고, 5과는 불자들의 친견을 위해 염불당에 모셔져 있다.

도량 한 가운데를 가로 지르는 개울 사이로 서남쪽 도량은 사지로 남아 복원불사를 기다리고 있고, 동북쪽 도량에는 1994년부터 새롭게 들어 선 전각이 앉아 있다. 건봉사 복원불사의 결실이 하나씩 맺어지고 있음이다. 건봉사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는 능파교. 자연과 멋지게 어우러진 돌다리를 건너니 두 개의 돌기둥이 나그네의 심장을 멎게 한다.

묘하게 생긴 문양이 두 개의 돌기둥에 새겨져 있기 때문인데, 언뜻 SF 영화 속 외계인들이 쓰는 표식처럼 보인다. 아니다. 십바라밀을 형상화한 상징기호가 5개씩 10개가 새겨져 있다. 번뇌를 깨고 해탈로, 사바세계에서 열반의 세계로 들어서는 10단계 수행을 말함이니, 돌에 새겨진 저 문양은 열반의 문을 여는 ‘암호’인 셈이다.

신라 시대의 발징은 ‘나무아미타불’ 코드로 열반의 문을 열려고 했다. 원각사서 서봉사로 개명되는 사이의 758년.

발징화상은 원각사를 중건하며 1만일 동안 염불 수행에 매진하는 ‘염불만일회’를 개설했다. 31명의 스님과 신도 1820명이 참여했다. 신도 120명은 의복을, 1700명은 음식을 마련했다고 하니, 재가불자들은 건봉사뿐 아니라 각 가정에서도 음식과 옷을 지어가며 염불수행에 매진했던 것이다. 782년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명의 스님들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왕생했고, 그 후로도 만일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전해진다. 대웅전 뒤편 산 중턱에 큰 바위가 있는데 염불수행한 사람들이 열반의 세계로 올라갔다는 등공대로 알려져 있다.

발징의 1차 만일염불 이후에도 4번이나 더 이뤄졌는데 19세기에만 세 번(1802, 1851, 1881) 봉행됐다. 한 세기에 세 번의 만일염불이면 건봉사 염불 소리가 100년 동안 거의 끊이지 않고 금강산에 울려 퍼졌다는 얘기다. 이종수 선생에 따르면 ‘1802년의 제2차 염불만일회가 끝난 후부터 건봉사 3,4차 만일회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15개의 만일회가 확인된다’고 한다. 조선의 염불만일회를 건봉사가 주도했다는 결론이다.

이종수 선생은 1851년 제3차 염불회를 처음 주도한 인물은 영암취학(靈岩就學)과 동화축전(東化竺典) 스님이었으나 법회 전에 입적함에 따라 벽오유총(碧梧侑聰) 스님이 만일회를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세간에 전해 내려오는 ‘토굴가’를 지은 주인공도 만일회를 주도한 영암취학이라고 하니 그 ‘토굴가’ 한 대목 감상해 보자. 염불은 심행처를 멸진하는 수행법이니 선과 교에 매이지 말고 어서 이 길로 들어서라는 노래다.
‘이보청풍 납자들아 격외선미 맛이없어 삼장교해 허대면서 허송세월 부디마소 밥도죽도 아니되니 설식기부(說食饑夫) 이 아닌가. 중소작반 이 아닌가 살활양구 심행처의 언어도가 끊어지고 기봉자재 의단처의 심행처가 멸진하니 사의상량 할 수 없어 바장(짧은 거리를 부질없이 작은 걸음으로 자꾸 왔다갔다 함)일곳 아주없다’

불이문의 금강저, 나무아미타불 돌기둥, 십바라밀 문양의 석주. 그 속에 담긴 의미 하나하나를 짚어가다 보면 극락과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는 수수께끼를 풀어 볼 수 있다. 여느 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오묘한 기운을 건봉사는 머금고 있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참고자료 : 이종수 논문 ‘19세기 건봉사 만일회와 불교사적 의미’. 한미영 논문 ‘건봉사 관련 한시문의 연구’. 김종진 ‘토굴가 전승의 경로와 문학사적 의의’.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건봉사 주차장. 건봉사 밖의 사명대사 동상과 부도전을 참배한 후 일주문으로 들어선다. 건봉사지를 탐방한 후 능파교를 건너 현 건봉사 도량으로 들어서 염불당에 모셔진 부처님 치아사리를 친견한다. 적멸보궁은 마지막으로 참배한다. 등공대는 사전에 종무소에 연락한 후 허락을 받아야 갈 수 있으니 유념해 두어야 한다.


이것만은 꼭!

 
사명대사 동상: 임진왜란 당시 건봉사에서 의병을 모아 훈련시킨 주인공이 사명대사다. 또한 통도사에서 왜군에게 도난당한 사리를 돌려 받은 후 치아사리 12과를 건봉사에 안치했다. 도량내 주차장 옆에 사명대사 승병 기념관이 있다.

 

 

 

 
부도전: 50여기의 부도와 탑비가 있다, 원래 건봉사에는 200개가 넘는 부도와 탑비가 있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분실됐다. 이에 남은 부도와 탑비를 지금의 부도전에 모아 안치했다.

 

 

 

[1381호 / 2017년 3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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