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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 김용규의 숲에서 배우는 지혜
31. 바닥, 가장 낮은 자리 흙의 우주탄생은 또 다른 생명의 죽음에서 시작돼
김용규  |  happyforest@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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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4.18  11: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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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상 일 년 내내 길을 달리는 날이 참 많지만 사계절 중 길 위로 여행하는 기쁨이 특별히 설레고 기쁜 때가 바로 이 즈음인 듯합니다. 도처에 생기가 약동하고 사방이 꽃 잔치잖습니까? 산수유와 목련 지는 자리에 지금 버드나무가 연두로 살아나고 복사꽃, 벚꽃, 개나리, 진달래가 흐드러집니다. 나풀나풀 노랑나비 흰나비 허공에 제 삶의 궤적 제 자유로 그으며 날고, 물까치며 어치며 휘파람새며 수많은 날짐승들의 몸짓과 소리로 또한 차오르는 때 아닙니까? 그 풍광 속을 누비노라면 ‘나 지금 여기에 살고 있음’의 기쁨이 가슴 한가득 차오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흙속에서 시작되는 봄의 우주
흙 무너지면 생명 그물망 파손


이때, 지금 이 눈부신 봄날은 어디에 머물다가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일까요? 또한 누가 저렇게 고운 빛과 소리와 향으로 공간을 채우며 차오르라 한 것일까요? 누구도 그렇게 찾아오라고 한 적 없고 아무도 그것을 시킨 이 없습니다. 그런데 꼭, 반드시 때가 오면 찾아오고 차오릅니다. 넓게 보아 그것이 바로 자연의 법(法)이요 리(理)일 것입니다. 우리는 풀과 나무와 들짐승과 날짐승이 펼쳐가는 지상의 공간만을 주로 마주하고 살아가지만 사실은 가장 낮은 바닥과 그 아래 흙 속으로부터 봄날의 우주가 열리고 차오르고 펼쳐집니다.

흙의 생태계. 그것이 없다면 지상의 숲 생태계도 당연히 없을 것입니다. 지상의 숲 생태계를 일으켜 세우는 직접적인 힘의 원천은 당연 붉고 센 기운 태양입니다. 하지만 그 힘을 모으고 저장하고 숙성하여 생명들에게 젖줄을 대는 힘의 원천은 우리가 좀체 주목하지 않는 어둡고 부드러운 기운 흙입니다. 이즈음 숲의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 낙엽층의 표면을 뒤적여 본 적이 있는지요? 1cm 깊이로만 뒤적여도 온갖 동물의 인드라망이 펼쳐집니다. 웅크린 도롱뇽과 민달팽이를 만나고 노린재나 딱정벌레, 튀어오르는 톡토기나 빠르게 기는 거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숲의 흙은 소리 없이 제 길을 살아가는 생명들의 공동체입니다. 통통하거나 길쭉한 지렁이들이 땅 속으로 터널을 내다가 올라와 여기저기서 꿈틀대고, 쓰러진 나무와 풀의 잔해들을 잘게 부수거나 헤치며 제 길을 걸어가는 지네며 각다귀며 노래기며 달팽이. 썩어가는 낙엽과 나뭇가지들 주변에 누렇거나 흰빛으로 퍼져있는 곰팡이와 버섯들. 더하여 인간의 맨 눈으로는 도무지 확인 할 길이 없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미생물들의 삶 터. 바닥을 뒤덮고 살아가는 이끼들. 이 모든 관계가 피워 올리는 그윽한 향기. 흙의 생태계는 떨어진 빗방울을 붙잡아 두었다가 동물과 식물에게 삶의 젖줄을 대는 가장 낮은 자리의 우주입니다.

흙의 생태계가 무너지면 그곳 생명의 그물망도 파손됩니다. 알다시피 사막의 흙에는 생명이 귀합니다. 붉고 센 기운 태양이 아무리 강렬하게 도달하더라도 어둡고 부드러운 기운 흙이 취약하면 생명은 피어날 수 없습니다. 흙내음도 없고 촉촉함도 없습니다. 모래알이 바람에 표류하는 곳이 바로 사막입니다. 물기를 찾기가 어려운 흙, 생명이 깃들기 어려운 땅, 그곳이 사막입니다. 한편   숲의 생태적 천이(遷移) 과정을 보면 사막의 긴 세월을 건너고 나서야 어렵게 초지가 생겨납니다. 빗방울을 붙잡는 힘이 조금 생긴 그 초지가 잘 지켜져야 쑥대밭 수준의 상태로 전환됩니다. 쑥대밭의 수준이 잘 유지되어야 각종 덤불들이 생겨납니다. 이후 이윽고 떨기나무들 살아가고 소나무 들어오고 크고 작은 낙엽수들 들어차는 순서로 대략 숲이 제 모습을 갖춰 갑니다. 이 과정에서의 핵심은 국면마다 들어섰던 생명들의 죽음입니다. 살았던 모든 존재가 스러져 죽고 그 죽음을 퇴비로 숙성해내 다음 생명을 일으키는 흙에 핵심이 있습니다. 다양한 생명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향기로운 공간 숲은 바로 ‘바닥, 가장 낮은 자리 흙의 우주’에서 펼쳐지는 생명과 그 환경 사이의 생태적 관계와 순환의 도(道)를 통해 열리고 펼쳐집니다.

그러니 더 향기롭고 그윽한 숲을 닮은 세계를 마주하고 싶다면 죽어져 흙이 되어야 할 것들이 잘 썩어야 합니다. 저 찬란한 봄을 마주하며 나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썩어져 거름이 되어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88호 / 2017년 4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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