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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 정운 스님의 전심법요
16. 주인공아! 남에게 속지 말라!여래장이나 불성은 부처 될 능력
정운 스님  |  saribul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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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5.16  13:2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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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이 영각의 성품이 무시이래로 허공과 더불어 같은 수명이다. 생멸이 없고, 유무도 없으며, 청정과 오염도 없으며, 번잡하고 고요함도 없다. 젊음과 늙음도 없으며, 방향과 장소도 없고, 안팎이 없으며, 수량과 형상이 없고, 색상과 음성이 없으니, 찾아 구할 수 없다. 지혜로서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며, 언어로서 표현될 수 없고, 대상경계로서 만날 수도 없으며, 노력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제불ㆍ보살ㆍ꿈틀대는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두 똑같은 대열반의 성품을 갖고 있다. 이 성품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이 법이다. 한 순간도 참됨을 여의면 모두 망상이다. 마음으로서 마음을 구하지 말고, 부처로서 부처를 구하지 말며, 법으로서 다시 법을 구하지 말라.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수행자는 곧 바로 무심하고, 묵묵히 계합해야지 주저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릇된 길이다. 마음으로서 마음을 전하는 것이 바른 안목이다.

초기불교 ‘섬’이나 ‘등불’로
내재된 스스로의 본성 자각
불성, 언어로 드러낼 수 없고
노력으로 얻는 것도 아니다


해설: ‘영각의 성품’은 참된 성품인 불성을 말한다. 인도사상사적 관점에서 보면, 불성보다는 여래장이란 말이 올바른 말이며 일반적이다. 여래장이라는 말이 지배적이어서 당시에는 ‘불성’이라는 어원을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열반경’에서는 ‘불성’을 쓰고 있고, 대부분의 중기 대승경전에서는 ‘여래장’이라고 칭하였다. ‘열반경’ 이후 여래장 대신 불성이란 말이 점차 정착되었고, 중국에서는 여래장이라는 용어보다 불성을 선호해 쓰다 보니 불성이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여래장이나 불성은 부처가 될 가능성, 부처가 될 능력, 부처가 될 원인이다. 이 사상이 중기 대승불교에서 발전되었다고 보지만, 부처님 당시로 소급된다. 장아함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부처님은 입적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비구들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 자신을 의지하고 진리를 의지하라[自燈明 法燈明 自歸依 法歸依]”고 하였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자기를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대승불교 이전, 일찍이 초기불교에서 ‘섬’이나 ‘등불’을 비유삼아 자신에게 내재된 본성을 자각하며,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다. 여기서 섬과 등불은 불성이나 본성과 같은 의미라고 본다. 그런데 이런 불성이란 용어가 대승경전마다 다양한 용어로 쓰여 있다. 게다가 중국에서 선종이 발달하면서 어록에서 다양한 언어를 창출해내어 선의 르네상스를 방불케 할 정도이다. 불성을 상징하는 몇 가지만 나열하면 이러하다.  

부모 뱃속에 들기 전 근원적인 자기[父母未生之前本來面目]를 말하는 본래면목ㆍ청정한 성품인 자성(自性), 일체 중생 누구나가 다 갖추고 있다고 하는 불성(佛性)ㆍ진성(眞性)ㆍ진여(眞如)ㆍ본성(本性)ㆍ본심(本心)ㆍ법성(法性)ㆍ본지풍광(本地風光)ㆍ불심(佛心)ㆍ열반(涅槃)ㆍ멸도(滅度)ㆍ적멸(寂滅)ㆍ보리(菩提)ㆍ정법안장(正法眼藏)ㆍ일물(一物)ㆍ일착자(一着子)ㆍ제일의제(第一義諦) 등 수많은 어의가 있다.

이런 깨달음의 본성인 불성과 자성을 감히 언어로 드러낼 수 없으며, 어떤 상대적인 대상을 통해 비유할 수도 없고, 어떤 형체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생겼다거나 멸했다는 세상의 언어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법신적인 당체이기 때문에 굳이 정진해 노력해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곧 본래성불(本來成佛)이기 때문에 밖에서 찾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으로부터 시작해 제자에게 전해졌고, 또 그 제자가 제자에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법이다. 이렇게 대열반의 성품은 특정한 인물만이 아닌 부처이든 성현(聖賢)이든 평범한 범부이든 누구나 구족하고 있다. 심지어 황벽은 꿈틀대는 벌레까지 본 성품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또 영각성을 주인공(主人公)이라고 한다. 주인공은 연속극 주연을 언급하는 단어인데, 선사들은 이 단어를 자주 활용하였다. 당나라 때, 선사 서암언(瑞巖彦, 850~910)은 매일 바위 위에 올라가 좌선을 하고, 마친 뒤 큰소리로 자기를 부르고 스스로 답하였다.   

“주인공아!” “네.”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가?” “네.”
“남에게 속지 말라” “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391호 / 2017년 5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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