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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무릉도원

기자명 조정육

찾아헤맨 완벽한 조건, 이미 내곁에 있었다

▲ 왕열, ‘신무릉도원도-동행’, 333×248.5cm, 2015 : 행복만 있고 고통이 없는 세계를 무릉도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무릉도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소박한 사람들이 안분지족하고 살아가는 평범한 세계가 있을 뿐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고통에 귀 기울여주고 공통의 선을 향해 동행하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이다.

시간이 날 때면 종종 뒷산으로 산책을 나간다. 산이라고 해봤자 언덕보다 조금 높은 정도여서 10분만 오르면 정상에 도착한다. 산이라고 부르기에도 무색한 높이다. 등산 대신 산책이라고 말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낮아도 산은 산이라 평지를 걷는 것보다는 힘에 부쳐 입산을 하려면 특별한 결심이 필요하다. 그 어려운 결심을 요즘 자주 한다. 봄산이 주는 황홀한 매력 때문이다. 산에 가는 길은 여러 코스가 있다. 그중에서도 나는 동네 풍경을 천천히 구경할 수 있는 코스를 좋아한다. 뚜렷한 목적이 없어도 어슬렁거리며 걷다 보면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새롭게 보인다. 우리 아파트 단지를 나와 신호등을 건넌 후 부동산과 정육점과 빵집과 방앗간을 지난다. 다시 미용실과 안경집과 김밥집과 노래방을 지나면 치킨집과 아이스크림 가게가 나온다. 카페와 호프집은 은행 건물을 사이에 두고 양 옆에 늘어서 있고, 편의점과 PC방은 건널목 코너마다 들어서 있다. 부동산이 열 개, 미용실과 방앗간과 안경집이 각각 두 개, 옷집, 죽집, 족발집, 국수집 등도 눈에 띈다. 동네 가게가 다 그렇듯 규모나 인테리어는 영세하기 그지없다. 저렇게 장사해서 가겟세나 내고 살까. 가게마다 딸린 식구들이 여러 명일 텐데 식구들 생활비는 나올까. 나와 별반 다르지 않는 그들의 생활을 헤아리며 걷다 보면 측은한 마음과 함께 황지우 시인의 시 구절이 떠오른다. ‘몸에 한 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산책길서 만난 신록의 풍경
따사로운 햇살, 무한한 행복
완벽함 찾아 헤매지 않아도
딛고선 그 자리가 무릉도원

상가가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시작되는 아파트를 거쳐 20여분을 걷다 보면 산 입구에 도착한다. 주거지와 산은 붙어 있지만 풍경은 나무 종류부터 다르다. 아파트 조경수로 심어진 철쭉꽃과 은행나무는 산 입구에서부터 도토리나무와 상수리나무로 바뀐다. 나무보다 이색적인 풍경은 학생들이다. 아파트와 주택가에서 나온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산길 입구로 모여든다. 이 오르막길이 끝나는 지점인 산 정상 위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등하교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아침저녁으로 산길을 오르내려야 한다. 학생들은 날마다 등하교를 하면서, 오르기는 힘들지만 내려가기는 쉬운 인생의 진리를 체감할 것이다.

학생들이 등교시간에 맞춰 뛰다시피 산길을 올라가는 것과는 달리 인생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는 느긋한 심정으로 천천히 걷는다. 나만 혼자 짐을 벗은 것 같아 조금 미안하다. 학생들은 무거운 가방을 메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도 가방 위에 얹고 힘겨운 발걸음으로 산길을 올라간다. 산길을 올라가는 시간이라야 10분 남짓 걸리지만 책가방을 지고 가는 길은 훨씬 더 길게 느껴질 것이다. 드디어 산 정상, 아니 언덕 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간단한 운동시설과 함께 적당한 간격으로 나무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나는 나무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물을 마신다. 학생들은 나를 지나쳐 학교로 들어간다. 주변에는 연한 빛을 띤 나무들 사이로 조팝나무와 꽃봉숭아와 라일락이 심어져 있다. 은은하지만 분명한 숲의 향기에 취해 잠시 눈을 감으면 아래 세상에서와는 다른 소리들이 들린다. 푸드득거리는 새 날갯짓 소리, 간간이 부는 바람 소리, 개짓는 소리 등이 왔다가 사라진다. 멀지 않은 곳에서 꿩울음 소리도 들린다. 세상의 시끄러움이 침범할 수 없는 아름다운 소리의 세계다. 이곳을 찾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숲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눈을 감고 앉아 숲의 소리를 듣고 있을 때 학교 종소리가 들린다. 1교시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등교시간이 훨씬 지나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미 늦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교문을 통과하려고 정신없이 뛴다.

산책을 꼭 등교시간에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침밥을 먹고 집에서 커피까지 느긋하게 마신 후 책을 들고 나올 때도 있다. 이곳에는 특이하게 독서를 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햇볕을 가려줄 수 있는 지붕 아래 나무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 위에는 책을 올려놓을 수 있는 탁자가 놓여 있다. 누가 이런 멋진 탁자를 제안했을까. 매번 올 때마다 이 탁자를 만든 사람을 생각한다. 탁자는 키 큰 남자의 신체에 맞춰 제작된 것 같다. 키 작은 내가 책을 올려놓고 보기에는 턱없이 높아 한 번도 이용하지 못했다. 대신 나는 마루 끝에 세워진 기둥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책을 읽는다. 학교에서 들리는 종소리에 맞춰 책을 읽고 쉬기를 반복한다.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어쩌다 들리는 비행기 소리 등을 제외하면 책 읽는 내내 들리는 소리는 새소리뿐이다. 내 비록 사람으로 태어나 큰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이곳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다 목마르면 차 한 잔 마시고, 마음에 맞는 사람이 오면 반갑게 맞이하여 사람의 도리에 대해 대화하는 것. 이런 삶은 옛 선인들이 가장 누리고 싶었던 호사가 아니던가. 이런 자족감에 취해 책을 읽다 눈이 아프면 고개를 들어 숲을 본다. 연분홍 모과나무와 모감주나무 뒤로 눈부신 5월의 숲이 서 있다. 아무런 욕심 없이 바라보는 숲 위로 따사로운 햇볕과 함께 텅 빈 적요로움이 내려앉는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나옹선사의 시다. 나무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된다. 우리도 나무처럼 산다면 우리의 존재만으로도 이 세상의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발을 딛고 선 자리의 척박함을 탓하는 대신 내가 그 자리에 뿌리내림으로써 비옥한 땅이 된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삶의 태도. 그 태도가 바탕이 되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괴로움조차도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마음이 흡족하여 자족한 세상. 그곳이 불국토이고 무릉도원이다. 완벽한 조건을 찾아 이동하지 않아도, 있는 그곳이 바로 불국토가 되고 무릉도원이 된다. 나무들이 그러한 것처럼. 고단했던 추억마저 그리움이 되게 하는 숲의 치유력.

시계가 12시를 향할 즈음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한다. 나는 읽던 책을 가방에 넣고 산을 내려간다. 아까 학생들과 함께 올라왔던 숲길을 혼자 내려간다. 내려가면서 기원한다. 나의 언어에 숲의 향기가 담겨 있기를. 나의 생각과 행동에 숲의 여유가 스며있기를. 그리하여 나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기를. 숲에 서 있는 나무들처럼. 거듭거듭 기원한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391호 / 2017년 5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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