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4대문 안에 유일한 사찰[br]숭유억불 속에도 선종맥 이어
조선 4대문 안에 유일한 사찰[br]숭유억불 속에도 선종맥 이어
  • 법보신문
  • 승인 2017.05.2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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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 원찰 흥천사의 600년 역사

▲ 주민들의 통행을 위해 경내를 개방한 흥천사는 왕실의 근엄한 원찰에서 지역민들이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친근한 사찰로 변모해 성북구의 포교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

삼각산 흥천사는 조선시대 4대문 안의 유일한 사찰로 건립돼 조선 왕실의 처음과 끝을 지켰다. 지난 4월15일 ‘조선의 왕실 사찰 흥천사의 역사와 문화재’란 주제로 열린 학술심포지엄에서 발제한 이종수 순천대 교수에 따르면 흥천사는 조선의 시조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원당으로 건립됐다. 신덕왕후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태조는 도성안 황하방에 정릉을 조성하고 그 옆에 흥천사를 지어 왕후의 명복을 빌게 했다. ‘정릉원당조계종본사흥천사조성기’는 흥천사 창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태조비 신덕왕후 원당으로 건립
사리전·계정전 고려왕실 계승
도회소·본사지정 조선불교 대표

소실 후에는 신흥사로 명맥 이어
1794년 현재 위치에 도량 재건
흥선군 중창불사로 옛 이름 찾아


‘태조 5년(1396) 음력 8월13일에 왕비인 현비 강씨께서 홍서하시었다. 임금께서 애도하는 마음으로 담당관에게 명하여 추존하는 시호를 올리되 신덕왕태후라 하고 왕궁 서남쪽 몇 리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장지를 정하였다. 장지는 산세가 감아돌아 풍수가 길하게 호응되는 곳이었다. 그 이듬해 정월 7일 정릉에 장사지내고, 또 묘역 동쪽에 명복을 빌기 위해 흥천사를 창건하였다. 흥천사 공사가 1년이 못 되어 끝나니, 불전·승방·대문·행랑·부엌·욕실 등 무릇 170여 칸이었는데 서까래와 기둥에 금빛 채색이 찬란하였다.’

흥천사가 창건된 이듬해 태조는 절 북쪽에 사리전을 짓도록 명하고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지속적으로 시찰하며 관심을 기울였다. 정종 1년(1399) 음력 10월19일 사리전이 완성되자 태상왕이 된 태조는 낙성을 고하고 수륙재를 베풀었다.

사리전은 3층 석탑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5층 규모의 목조 전각으로 만들었다. 사리전 내부에 있는 3층 석탑에는 석가모니의 치사리, 두골사리, 패엽경, 가사 등을 봉안했다. 사리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모셔와 통도사에 보관하던 것을 이운해온 것이다. 이후 태종 1년(1401) 윤3월1일에는 해인사에 있던 고려대장경을 인출해 사리전에 봉안했다. 또 태조의 아버지 이자춘의 진영을 모신 계성전을 짓고 제사를 지내는 등 고려시대 왕실의 불교신앙을 계승한 흔적도 보인다.

이와 같이 흥천사에서는 창건 이후 역대 왕과 왕비의 명복을 비는 기신재, 왕의 생일을 축복하는 탄일축수재, 기우제 등 국가 및 왕실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많은 불사들을 설행했다. 세종 15년(1433)에는 태조와 신의왕후 위패를 모셨던 문소전의 불상 등을 흥천사로 이전했다. 또 중국·일본에서 온 사신들에게 속소로 제공해 조선왕실 대표사찰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음을 알 수 있다. 태조는 흥천사를 조계종 본사로 삼고 스님들이 거처하는 승당을 설치, 좌선의 생활화를 규정으로 정했다. 이는 흥천사를 조계종의 가장 중요한 사찰로 삼아 수행도량으로 지정했음을 의미한다. 세종대에 이르러 불교가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될 때 선종을 관장하는 도회소로 흥천사를 지정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흥천사는 정릉의 원당으로 창건됐으나 능을 지키고 기도하는 능사의 위상을 넘어 조계종의 본사이자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전이 있는 엄연한 불교 성지였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은 왕위에 올라 흥천사의 원당으로서의 기능을 이전했다. 자신을 내치고 이복동생을 왕위에 올리려했던 계모 신덕왕후에 대한 원한이 깊었던 태종은 부왕 이성계가 승하하자 곧바로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하고 왕후의 능도 도성 밖 사을한 기슭인 현재의 정릉으로 옮겼다. 흥천사에서 담당했던 능사의 역할은 정릉 옆에 새로 조성한 신흥사로 이관됐다. 흥천사는 2개의 절로 나뉘어 그 역사를 이어간 것이다.

태종이 왕으로 등극한 지 5년이 지나면서부터 숭유억불 정책이 강화됐다. 태종은 먼저 사찰의 재산을 환수했다. 사찰에서 일하던 노비를 관노로 전환시키고 전국적으로 1000여개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도 242개만을 공인했다. 나머지 사찰의 전지는 국가에 귀속시키고 종단역시 11개로 축소 공인 후 그마저도 7개로 줄였다. 불교탄압은 세종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고려·조선의 불교 행정을 관장하던 승록사를 폐지하고 7개 종단을 선종과 교종 양대 종단으로 폐합했다. 사찰도 양종단 18개씩 36개만을 공인했다. 흥천사는 선종 사찰에 포함됐으며 선종도회소로 지목돼 승록사에서 관장하던 선종 관련 업무를 대신했다.

하지만 숭유억불 정책 가운데에도 흥천사는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사리전 중수를 진행했다. 가뭄이 들자 세종은 다른 공사는 중지시켰지만 흥천사 공사는 지속했고 유신들의 반대에도 낙성을 고하는 사리각경찬회를 진행했다. 이후 흥천사는 왕실에서 주관하는 기우제, 구병의례, 보공재 등을 봉행하며 백성의 안녕을 염원했던 조선왕실과 민중 사이의 통로가 돼주었다. 세조 4년(1458)에는 해인사 대장경의 일부가 흥천사 사리전에 봉안됐다. 세조 7년(1461)에는 사리가 스스로 쪼개져 늘어나는 사리분신을 기념해 세조와 세조비 사성왕비가 함께 동종을 주조했다. 이 종은 현재 덕수궁에 소장돼있다. 성종대에는 명나라 황제가 보내온 불번을 봉안했다. 성종은 유신들의 반대에도 “선대 임금이 창건하고 수리한 곳이며 외국 사신들이 자주 들리는 곳이므로 폐지할 수 없다”며 흥천사 중수를 강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흥천사는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선종도회소이자 조선불교를 대표하는 사찰로 기능했다. 그러나 연산군 10년(1504) 12월 흥천사에 화재가 일어나 사리전을 제외한 거의 모든 건물이 소실됐다. 연산군은 이를 재건하지 않고 마구간으로 사용하도록 했으며, 중종 5년(1510) 5월에는 사리전 마저 소실됐다. 이후 폐사된 흥천사 땅을 집이 없는 사대부에게 나누어줌으로써 황하방 흥천사의 사격은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흥천사의 명맥은 사을한 기슭의 신흥사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현종 10년(1669) 신덕왕후 강씨가 왕후로 복위됨으로써 사을한의 능은 왕후릉의 규모에 맞게 새로 넓혀 조성했다. 능의 규모가 커지면서 인근에 있던 신흥사도 불가피하게 이건 됐다. 현재의 흥천사 자리로 옮겨온 것이 바로 이때다. 이후 잠시 사격이 줄어들기도 했지만 ‘중건신흥사방장기’에 따르면 정조 18년(1794) 신흥사의 성민, 치감, 경신 스님은 각지에서 보내온 시주금으로 신흥사를 재차 중건하며 왕실사찰의 위상을 되살렸다. 이어 순조 32년(1832)에는 영안부원군, 영명도위·숙선옹주, 동녕도위·명온공주, 창녕도위·복원공주, 덕온공주 및 여러 상궁 등의 시주로 괘불을 조성하기도 했다. 당시 시주자 명단에 왕실 친인척들의 이름이 올라와 있어 신흥사가 단순한 정릉의 능사일 뿐 아니라 왕실 원당이었던 흥천사의 역사와 위상까지도 고스란히 신흥사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현종 12년(1846)에 구봉 계장 스님이 칠성각을 건립한 후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축리지소로 지정됐고 이후 철종, 고종에 이르기까지 적조암, 극락보전, 삼존불상 개금 등 확장불사가 이뤄졌다. 고종 2년(1865)에는 흥선대원군이 앞장서 전국에서 시주를 받아 H자형의 대방을 완성했다. 이때에 이르러 ‘흥천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당시 대원군은 현판에 ‘흥천사(興天寺)’라는 글씨를 써 내렸고 그 현판은 지금도 대방에 걸려 있다. 고종 6년(1869)에는 흥선대원군 부부의 시주로 종이 조성됐다. 근대에도 흥천사와 왕실의 인연은 이어졌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5살 때 흥천사를 방문해 글씨를 남겼다. 영친왕의 어머니 순헌귀비 엄씨도 고종 36년(1899) 시주를 통해 흥천사 극락보전과 독성각 중창을 도왔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왕실과의 인연은 끝나지 않았다. 조선왕조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흥천사에서 피난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쌀 한 홉으로 하루를 지내던 윤씨는 그 한 홉에서 다시 한 줌씩 떼어 향을 구입해 사르며 기도를 했다. 조선 최초의 왕후인 강씨의 유택을 지킨 절이 조선 최후의 왕후인 윤씨의 여생을 지켜주었으니 흥천사와 조선왕실과의 인연이 참으로 지중하다.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 출범이후 흥천사에서는 대처승들과의 사찰경영권 분쟁, 부지매각 등 불미스러운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 종단에서는 이 사태를 해결할 적임자로 낙산사 복원 불사를 원만 회향한 금곡정념 스님을 꼽았다. 2011년 흥천사 주지로 부임한 스님은 자연·전통문화·역사·사람이 어울리는 신행공간 조성의 원을 세워 복원 불사를 시작했다. 경내를 차지하고 있던 민가들은 이주비를 주어 모두 철거시키고 둘러쳐진 담장은 허물었다. 주민들의 통행을 위해서 경내를 개방했다. 2011년 이후 매년 여는 경로잔치는 마을잔치로 자리 잡았고 2013년에는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수행처로 삼각선원을 개원했다. 2015년에는 저소득 맞벌이 가정 아이들의 보육을 위한 느티나무 어린이집을 개관하며 성북구 지역민과 함께하는 포교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

 


 

서울 흥천사 연혁

조선왕조 500년 역사 함께한 왕실발원 사찰의 자취


1397년 창건
1398년 사리전 창건
1399년 사리전 낙성과 수륙재 설행
1401년 해인사대장경 봉안
1424년 조선불교 총본산 선종도회소로 지정
1433년 문소전 불상 등 이전
1437년 사리전 중수
1440년 사리전 낙성
1458년 해인사 대장경 3질 봉안
1480년 흥천사 중수
1504년 화재로 사리전만 남음
1510년 사리전 전소 후 토지 배분
1794년 현재자리에 두 번째 중창,       
          신흥사라 불림
1832년 괘불화 조성
1846년 칠성각(七星閣) 낙성
1849년 적조암 창건
1853년 극락보전 낙성
1855년 명부전 낙성
1865년 대방 중창,
           다시 흥천사라 부름
1885년 대방 중수
1870년 칠성각 중창 및 단청
1891년 42手 관음상 봉안
1894년 명부전 중수
2011년 금곡정념 스님 주지 진산
2013년 삼각선원 ‘낙성’
2015년 느티나무어린이집 개원
2015년 노전채 복원
2016년 연화대 복원
2016년 42수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 보물 제1891호 지정

 

▲ 일제강점기 흥천사 전경. 사진출처‘성 베네딕토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소장 서울사진’

 

실록 속 장원심 스님 보살행


태종6년 7월6일 실록에 기록
가뭄 심해 백성 고통 커지자
흥천사서 기도, 비 내리게 해
흥천사 자비나눔 전통 토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부처님의 중생구제 원력을 계승하고 있는 서울 흥천사의 전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흥천사는 창건 초인 조선시대부터 백성의 아픔과 함께 한 수많은 스님들의 중생구제 원력들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조선 태종 때 오랜 가뭄으로 고통 받는 중생들을 위해 흥천사에서 기우제를 지낸 장원심 스님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06년 7월, 태종은 깊은 시름에 빠졌다. 몇 달째 가뭄이 계속되면서 기근과 고통을 호소하는 백성들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종묘와 산천에 기우제를 지냈지만 하늘은 번번이 이를 외면했다. 태종은 백성과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 수라상을 반으로 줄였고,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먹지 않겠다고 금주를 선언했다. 태종은 또 극형에 해당되는 참형과 교형의 죄수들을 제외하고 옥사에서 모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이쯤 되면 하늘도 태종의 바람을 들어줄 듯 해보였지만 여전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급기야 태종은 대신들을 불러놓고 “과인이 상벌을 행함에 밝지 못하고, 사람을 씀에 공정함을 잃고, 궁 안의 격식이 지나쳐서 재앙을 부른 것으로 염려되니 직언을 하고 숨김없이 말하라. 내 그것을 고치겠다”고 선언했다. 가뭄으로 인해 죽어나가는 백성들의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날수록 이를 지켜보는 태종의 마음은 점점 타들어갔다.

그때 지신사 황희는 태종 앞에 거지 행색을 하고 있는 한 스님을 데리고 와 그를 소개했다. 황희는 “이 자는 장원심이라는 중이온데 흥천사에 들어가 사리전에서 기도를 드리면 비를 내릴 수 있다고 합니다”고 고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대신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수차례에 걸쳐 기우제를 지내도 내리지 않는 비를 어떻게 내리게 하겠다는 것인지…. 남루한 옷을 입은 스님을 바라보는 시선은 걱정이 앞섰다. 왕 앞에서의 허언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장원심 스님은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듯 기세가 당당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태종도 평소 같으면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누구를 속이려 드느냐’고 불호령을 내려 내칠 것이지만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스님에게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태종은 흥천사에 들어가 기도할 것을 윤허했다. 스님이 기도를 시작하자 하늘이 움직였다. 기도 이틀 만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 가뭄을 해갈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비가 내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백성들과 조정의 신하들은 장원심 스님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불교에 대한 관심도 차츰 높아졌다.

사실 스님은 이 일이 있기 전부터 저잣거리의 아이들도 그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스님은 굶주린 백성이 있으면 밥을 빌어 먹이고,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을 보면 옷을 벗어 주었고, 병든 자가 있으면 힘을 다해 구휼했다. 또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주고, 도로를 만들고 교량을 건설하면서 보살행을 실천했다. 이런 장원심 스님을 백성들은 칭송했다. 태종도 장원심 스님의 자비행에 감복해 큰 상을 내렸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1406년 윤7월6일 태종은 장원심 스님에게 저포 1필과 정포 25필, 미두 20석 등을 상으로 주었다.

이후 장원심 스님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스님이 이후 어떤 사찰에서 주석했으며, 언제 입적했는지 등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짧은 기록만으로도 장원심 스님은 중생의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던 선지식이었음이 분명하다.

[1392호 / 2017년 5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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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승 2017-12-08 16:23:03
삼보에 귀의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