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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구지 선사의 손가락-중

손가락이 일으키는 세계, 정확한 통찰 필요

▲ ‘평지풍파(平地風波)’고윤숙 화가

‘폭풍의 언덕’이 보여주는 세계, 손가락을 들 때마다 일어나는 다른 세계들은 어쩌면 고작 두 집을 둘러싸고 있는 아주 작은 세계일뿐이라고, ‘세계’라는 말에 값하긴 너무 작고 국지적인 세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손가락을 따라 일어나는 세계는 그 세운 손가락 인근에 만들어질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손가락을 세울 때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말을 무효화시킬 수 있을까?

첫째, 각자가 사는 세계란 형식적으로 그 범위를 따지자면 나라 전체, 지구 전체, 아니 우주 전체로 확대되겠지만, 대개는 TV나 신문 아니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이들, 내 삶과 무관한 이들의 삶 아닌가? 내가 사는 세계란 어차피 나를 가까이서 둘러싸고 영향을 미치는 세계 아닌가? 아담이 사과를 땄을 때 만들어진 세계 또한 그의 인근에 만들어진 세계일뿐이다. 문제는 그 세계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째, 반대로 티끌 하나가 일어나는 데서도 시방삼세의 우주를 보는 불교적 사고방법을 안다면, 저 멀리 나를 알지 못하는 이들조차 나의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만큼, 그들이 알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손가락을 세우며 만들어지는 세계와 아무 상관없이 존재한다고는 할 수 없을 터이다. 돌을 던져 일어난 파문을 그저 떨어진 돌 근처에서만 보는 이는 세상사를 너무 대충 보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은
결국 평지풍파를 만들어내는 것
구지 선사의 손가락 뜻하는 바는
어떤 세계를 만들어낼지 묻는 것

하지만 상반되는 방식의 이 두 반론을 강변하기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손가락을 든다’고 표현되는 어떤 행동이나 사건, 혹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출현이나 사라짐은 그때마다 다른 크기, 다른 강도(强度)의 세계를 만든다고. 또한 다른 질을 갖는 세계를 만든다고. 가령 언쇼 손에 이끌려 히스클리프가 출현했을 때 새로 일어난 세계는 폭풍의 언덕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가장 가까운 이웃인 에드거 가족이 살던 티티새 지나는 농원에도 일단은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물론 나중에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뛰어다니다 그 집에 들어가게 되면서 새로운 사태가 시작됨을 안다면, 그렇게만 말하긴 어렵지만). 그러나 캐서린을 잃고 사라졌던 히스클리프가 다시 나타났을 때 일어난 세계는 처음부터 두 집 전체를 아주 다른 곳으로 만들어버린다. 강도 또한 아주 다르다. 전자의 경우 히스클리프의 존재는 언쇼 일가 안에 작은 불화와 갈등을 야기했지만, 후자의 경우 히스클리프의 존재는 극단의 분노와 원한이 만들어내는 강한 힘으로 모든 이들을 극도의 번민과 고통 속으로,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밀고 간다.

이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손가락을 어떻게 세워서 어떤 질(質)의 세계를 만들어내는가이다. 연적이었던 에드거가 죽고 에드거와 캐서린 사이에서 난 딸 캐시를 강제로 며느리로 만들어 에드거의 재산마저 차지하기까지, 히스클리프는 “원수의 슬픔을 자기의 기쁨으로 삼기로 작정한”(446) 자로서 고통스러운 원한과 복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런 세계를 만들어가는 히스클리프의 감정은 복수심과 섞인 사랑의 광적인 열정이다. 그러나 분노 내지 원한과 뒤섞여 버린 사랑은 캐서린을 정신병적 발작으로 몰고 가며, 어떤 다른 사랑도, 어떤 행복도 촉발하지 못한다.

유사한 반동적 감정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반면 에드거가 만들어낸 것은 히스클리프의 돌진에 대해서 최대한 평온함을 유지하며 아내와 딸을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하려는 세계였다. 그 점에서 에드거는 단지 히스클리프의 저주를 위해 만들어진 부수적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만큼 히스클리프 같은 격정이나 미친 듯 돌진해대는 열정은 느끼기 힘든 세계였다. 히스클리프의 공격적인 감응과 반대로 방어적인 감응이 주조를 이루는 세계였다.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를 누가 결정할 수 없는 아주 상반되는 질의 두 세계가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캐서린은 에드거의 극진한 사랑을 잘 알지만 히스클리프의 광적인 사랑에 끌려간다. 그러나 두 세계 사이에서의 선택은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넋이 나가 두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채 죽는다. 어느 한 사람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양자 사이에서, 아주 상반되는 두 세계 사이에 끼어서 죽는 것이다.

문학과 선(禪)이 나란히 가는 것은 여기까지인 듯하다. 구지가 손가락을 하나 세웠을 때, 그것은 그와 동시에 하나의 세계가 일어남을 표현하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나의 세계를 세우려는 의미 또한 있었을 터이다. 불법의 세계, 선(禪)의 세계, 혹은 무위의 세계 등등. 그러나 보다시피 ‘폭풍의 언덕’에서 히스클리프가 만들어낸 세계는 그와 정반대되는 세계였다. 그것은 차라리 떠났어야 할 세계, 만들지 말았어야 할 세계에 가깝다. 반면 문학이 그런 확고한 가치와 방향을 갖고 있다면 소설은 ‘훌륭한’ 교훈이나 규범을 전하는 다 비슷비슷한(선에서는 ‘한 맛’이라고 하는)계몽적 서사가 되고 말 것이다.

오히려 문학은 어쩌면 악마적이라고도 할 히스클리프의 광적인 사랑, 미움과 분노와 원한과 사랑이 뒤섞여 만들어지는 새로운 종류의 감정을 창안하며 심지어 그것이 갖는 매혹의 힘마저 보여주고자 한다. 마지막에 가면 히스클리프가 복수가 덧없음을 느끼곤 힌들리와 에드거의 자식들을 묶었던 끈을 풀어주지만 그렇다고 ‘폭풍의 언덕’이 복수의 덧없음을 가르치려는 작품은 아니다. 그 덧없음마저도 캐서린의 유령에 홀려 버린 ‘이상한 변화’의 일부일 뿐이다. 원한의 감정의 해소마저 광기 속에 묻어두는 것이다. 그는 끝까지 사랑의 광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인 것이다.

이 작품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힘도 평온해진 히스클리프가 아니라 미움인지 사랑인지, 분노인지 사랑인지 알 수 없는 곤혹스러운 극한적 감정에서 나온다. 그래서인지 문학은 선보다는 오히려 악을, 행복보다는 불행을, 평온함이 아닌 폭풍을, 성공보다는 몰락을 더 선호한다. 그 몰락이나 불행마저 감수하며 자신을 거는 사람의 모습이 훨씬 더 문학적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선인 악, 행복인 불행, 성공인 몰락을 창조하며, 아주 다른 종류의 감정들이 섞인 새로운 감응을 창조한다. 무위 아닌 유위의 극한을 통해 참과 거짓, 선과 악, 미와 추가 반전되고 혼합되는 세계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문학 뿐 아니라 세상사도 그렇지 않을까? 어떤 게 좋은 건지 잘 알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그 반대편에 있는 ‘나쁜’ 힘에 더 쉽게 끌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 ‘나쁜’ 힘, ‘나쁜’ 짓이 나쁜 세상을 넘어서는데 유용한 경우도 있다. 예컨대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거칠고 막돼먹은 언행, 그런 언행이 만들어내는 세상에 대항하기 위해 남성들의 그 막돼먹은 언행을 미러링(mirroring)하여 남성들에게 되돌려주려는 시도가 그렇다. 일본에서 재일조선인들에게 퍼붓는 혐오발언(hate speech)에 대해 차분하고 점잖게 말리거나 논리적으로 반박하려는 시도들이 얼마나 무력한지 우리는 안다. 남성들의 오래된 여혐발언들도 마찬가지다.

반면 그걸 거울에 비추듯 남혐으로 되돌려주는 발언들이 여성들에게 막말하는 남성들을 조심하게 하고 주저하게 한 것을 보면, 혐오발언에는 그걸 반사하는 혐오발언으로 대처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메갈리아 같은 사이트에서 미러링을 이용해 남성들에게 조롱과 욕을 퍼붓기 시작했을 때, 그렇게 치켜든 손가락은 분명 이전과 아주 다른 세계를 만들었다. 그 세계는 자기 주제도 모르면서 여성들이라면 쉽게 보고 비아냥대던 남성들이 만든 세계를 효과적으로 무력화시켜버렸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처럼, 그것은 분명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 같다. “괴물과 싸울 땐 괴물과 닮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여혐’이란 괴물과 싸우다 ‘남혐’이라는 비슷한 괴물이 되어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금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의 다른 세계를 세우는 것은 그것과 양립할 수 없는 세계와 대결하는 것이고 생사를 건 전쟁을 벌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손가락을 따라 세워지는 어떤 가치로 다른 모든 것들을 재단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손가락을 세워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은 풍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평지풍파’, 선사들이 말을 하고 행동을 할 때마다 피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던 게 바로 그것 아닌가! 폭풍을 일으키며 오는 건 히스클리프만이 아닌 것이다. 하여 현사(玄沙)는 손가락을 세우는 걸 보고 구지가 깨우쳤다는 말을 듣곤 “내가 그 당시에 그 꼴을 보았더라면 손가락을 꺾어버렸을 것”이라고 했고, 조산(曹山)은 “구지 스님이 알아차린 것은 거칠다. 그것은 한 기틀, 한 경계만을 알았을 뿐”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판으로만 이해한다면 이들의 말을 크게 오해하는 게 될 것이다. 풍파 없는 바다가 대체 어디 있을 것이며 바람 없는 대기가 대체 어디 있을 것인가? 풍파야말로 바다의 힘이고, 바람, 아니 폭풍이야말로 대기의 힘 아닌가! 우리는 언제나 손가락을 세우고 세계를 만들어내며 살 수밖에 없다. 하여 구지는 “손가락 하나를 평생 사용했으나 다 쓰지 못 하였다”고 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면 내가 지금 손가락을 세워 일으키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지를 정확하게 통찰하는 것이다. 내가 일으키는 풍파는 풍파인지를 정직하게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풍파를 일으킬 것인지, 어떤 세계를 만들어낼 것인지 묻는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solaris0@daum.net
 


[1397호 / 2017년 6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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