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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과거 현재 미래 어느 시점에도 머물거나 속박되지 말라

기자명 정운 스님

무념에는 번뇌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원문 : 보살은 마음을 허공과 같이하여 일체를 모두 버려 자기가 지은 복덕에도 탐착하지 않는다. 버림에도 세 단계가 있다. 안팎의 몸과 마음 일체를 모두 버려 마치 허공과 같이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방소에 따라 세간[物]에 응해서 주관과 객관을 모두 잊는 것이다. 이것이 크게 버림[大捨]이다. 혹은 한편으로는 치우쳐 도를 닦고, 덕을 베풀며, 한편으로는 공덕을 모두 버리고 바라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중간의 버림[中捨]이다. 혹은 두루 두루 뭇 수행을 하고, 바라는 바가 있으며, 법을 청문해 공을 알아서 마침내 집착하지 않는 것을 적은 버림[小捨]이라고 한다.

과거 생각에도 머물지 않고
미래 생각 일으키지 말아야
집착없는 무심 가장 큰 버림
깨달음 구하는 생각도 번뇌

큰 버림은 불빛이 바로 앞에 놓여 있는 것과 같아서 다시 미혹되거나 깨달을 것도 없다. 중간 버림은 불빛이 옆에 놓여 있는 것과 같아서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다. 작은 버림은 불빛이 뒤에 놓여 있는 것과 같아서 구덩이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음을 허공과 같이하여 일체를 다 버려야 한다. 과거 마음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과거를 버린 것’이라고 하고, 현재 마음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현재를 버린 것’이라고 하며, 미래 마음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미래를 버린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일러 ‘삼세를 모두 버림’이라고 한다.

해설 : 황벽은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하여 자기가 지은 복덕에도 집착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음의 버림에도 세 종류로 내세웠다. 

먼저, 큰 버림은 주관과 객관, 곧 내견(內見)과 외견(外見) 모두에 갖춰져 있는 것을 말한다. 자신 내부에서도 집착하거나 갈망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가장 큰 버림이라고 하였다. 둘째 중간 버림은 수행을 잘 하고 덕을 베풀며, 한편으로는 공덕을 버리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셋째 작은 버림은 수행해 법을 들으며 공을 아는 것을 작은 버림이라고 하였다.

황벽이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버림은 아공과 법공이 갖춰지고, 어떤 집착도 없는 무심이다. 몇 번이고 거듭되지만, 무심(無心), 무주심(無住心)은 황벽 어록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황벽은 시간적인 개념, 즉 과거ㆍ미래ㆍ현재 삼세에 걸림 없이 무심하라고 강조한다.

삼세와 연관해 생각해보자. 이 부분과 관련해 회자되는 선사가 ‘금강경’의 대가라고 불리는 덕산 선감(782~865년)이다. 덕산은 출가 이후 율장을 정밀하게 연구했으며, 항상 ‘금강경’을 강의해 ‘주금강(周金剛)’이라고 칭송되었다. 덕산은 당시 북방 지역에 머물렀는데, 남방의 선사들이 불립문자ㆍ견성성불을 내세우며 문자를 부정하는 것에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마침내 덕산이 그들을 만나 담판을 지으려고 길을 떠났다. 덕산이 용담 숭신(782~865)의 절 앞에 당도해 마침 배가 고프던 차에 떡장수 노파에게서 질문을 받는다. “‘금강경’에 과거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스님께서는 어느 마음에다 점을 찍겠습니까[點心]?” 덕산은 답을 하지 못하였다.

과거·현재·미래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 중 어느 지점의 ‘생각’이라고 봐야 한다. 시간은 찰나의 연결점이요, 점선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중생들은 하나의 연결점이라고 생각한다. 한 찰나에 머물러 현재 마음이라고 하지만, 이 또한 과거 마음이 되어버린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어느 한 시점의 마음도 참 마음이라고 할 수 없다.

이미 일어난 과거 생각에 머물지 말고, 미래에 일어날 생각도 내지 말라는 것이다. 곧 이미 일어난 생각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미래로 번뇌가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만의 성엄(1930~2009) 선사는 “앞 생각이 사라지고, 나중의 한 생각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면, 바로 무념, 혹은 무심이다. 무념 상태에는 번뇌도 없고, 깨달음도 없으며, 부처도 없다. 우리가 번뇌가 있거나 깨달음을 구하고 있을 때는 생각이 일어난 것이다. 무념, 무심이 바로 깨달음이다”라고 하였다. 곧 어느 시점에 머물러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황벽은 시간에도 구애되거나 속박되지 않는 무심을 크게 버린 것이라고 하였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398호 / 2017년 7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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