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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있음’을 아는 자,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는 자-중

존재하는 그곳서 특이성 만드는 특이점 돼야

▲ ‘밭 가는 물소가 되라’고윤숙 화가

존재의미는 어느 한 사람이 부여하는 게 아니라, 관련된 존재자들의 관계들이 서로 엮이고 중첩되며 만들어진다. 예컨대 ‘폭풍의 언덕’ 인근의 마을에서, 이전에 사라졌던 히스클리프가 나타났을 때(그 세계 안에 존재하게 되었을 때), 그 세계는 이전과 아주 다른 세계로 바뀌어버렸다. 이때 히스클리프의 존재의미는 그를 사랑하던 캐서린에게, 캐서린의 남편인 에드거에게 아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캐서린이 에드거와 별개로 떨어져 있지 않는 한,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에게조차 단지 되돌아온 사랑의 대상일 수만은 없다. 에드거와 반발하면서 캐서린을 상이한 힘으로 팽팽하게 당기는 하나의 힘일 뿐이다. 존재자의 존재의미가 존재자의 특정한 규정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세 사람은 서로 뒤엉켜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히스클리프의 존재의미는 그 뒤엉켜 만들어진 세계 안에서 규정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존재의미 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존재자로 존재하는지 안다는 것
존재감 있는 존재로 살고자 함을 의미

그 세계는 히스클리프가 없던 때와 달리, 사랑과 질투, 복수와 분노 등이 뒤얽힌 거칠고 삭막한 세계다. 히스클리프는 그런 세계를 만들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가, 혹은 캐서린이 아무리 ‘사랑’으로 서로를 채색하려 해도 결코 사랑의 색만으로 칠해지지 않는다. 인근에 있는 다른 이들이 덧칠한 것과 섞여 만들어진 탁하고 고통스러운 색이 그의 존재의미인 것이다. 그렇기에 존재의미는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며 모순적이다. 히스클리프는 그가 끼어 들어간 세계 속에 사랑과 복수와 분노와 질투 등이 뒤섞인 대기(atmosphere, 분위기)를 만들었고, 그렇기에 그런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대기 전체가 바로 그의 의미다. 탁월한 문학작품은 어떤 특이한 존재자를 창조함으로써 병존하리라고 생각하기 힘든 것들이 뒤섞인 특이한 대기를 창조해낸다.

내 존재와 결부된 세계란 내 인근에 있는 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 전체다. 그러나 그건 거기 ‘있는’ 것들의 총합은 아니다. 거기에는 있음으로 인해 자신이 없는 것과 별로 다르게 바꾸어놓지 못하는 인물들도 있다. 사실 내 인근의 세계에 특이한 형상을 만들어내는 인물은 그렇지 못하는 인물보다 훨씬 적다. ‘폭풍의 언덕’ 집 안에 있는 인물 모두가 그 집의 대기가 갖는 특이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듯이. 이런 점에서 세계는 그 안에 있는 인물들보다 ‘작다’. 있어도 큰 차이를 만들지 못하는 인물은 그 대기의 특이성을 만드는데 참여하지 못한다. 있어도 존재감 없이 있는 것이다. 존재가 의미를 갖는다 함은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세계의 특이성을 형성하는데 참여하고(participate) 있음을 뜻한다. 특이성의 부분(part)이 되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특이적인 인물들만이 특이성을 형성하는데 참여한다. 그 특이성은 특이적인 인물들의 어떤 모습과도 다르며, 그 인물들이 가진 고유성을 합쳐 뒤져도 찾아낼 수 없다. 그 세계 안에 있는 인물들의 고유성 전체를 모은 것 안에도 없다. 그런 점에서 세계는 그 안에 있는 인물들의 합보다 ‘크다’.

사람들의 세계만 이런 것은 아니다. 쇳가루를 뿌려놓은 책받침 밑에 자석을 한두 개 놓고 움직이는 놀이는 초등학교 때 다들 해봤을 것이다. 자석의 위치와 분포에 따라 달라지는 쇳가루의 형상은 그 자석들이 형성한 자기장을, 즉 자기력이 만들어낸 ‘세계’를 보여준다. 거기에 자석이 새로 하나 끼어 들어오면 그 형상은 또 아주 달라진다. 그렇게 달라진 모습의 세계, 그것이 바로 새로 끼어든 자석의 존재의미다. 자석들 사이에 돌멩이나 구리조각이 끼어들어도 자기장의 형상은 바뀌지 않는다. 있어도 특이성을 형성하는 데는 참여하지 못하는 존재자, 이 자기장의 세계에선 존재의미가 없는 존재자인 것이다.

책받침 위에서 쇳가루들이 보여주는 자기장의 형상, 그것은 자석들이 만드는 세계의 형상이다. 자석들의 수나 분포가 달라짐에 따라 그때그때 특이하게 달라지는 세계의 모습이다. 역으로 자기장의 특이성(singulaity)을 알고자 한다면 자석들의 위치와 분포를 알면 된다. 이때 자석들을 물리적인 특이점(singular point)이라고 한다. 자석이란 특이점들의 분포가 자기장의 특이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어떤 것의 존재의미가 크다, 작다는 말은 우선 그것이 세계 안에 존재하게 됨에 따라 야기되는 변화의 크기를 뜻한다. 또 하나, 어떤 것의 존재가 의미 있게 만드는, 즉 있고 없음에 따라 달라지는 세계의 크기 또한 존재의미의 크기를 뜻한다고 하겠다. 가족 안에서는 있고 없음의 크기가 확연하지만 문밖에만 나가면 있고 없음이 별 차이가 없는 사람이 있고, 사는 마을에선 별로 있고 없음이 큰 차이가 없지만 ‘학계’니 ‘예술계’니 하는 데선 있고 없음이 큰 차이가 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의미를 안다는 말은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 어떤 존재자로서 존재하는지를 안다는 말이다.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은 알기 쉽게, 그러나 많이 약화시켜 말하면 존재감이 있는 존재자로 살고자 함을 뜻한다.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 없는 존재자가 아니라 있고 없음이 크게 다른 존재자로 살고자 함을 뜻한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 하나의 특이점으로서 존재하고자 함을,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의 특이성을 형성하는데 하나의 특이점으로 참여하고자 함을 뜻한다.

그러나 이는 ‘세계’라는 말에서 쉽게 떠올리게 되는 무언가 거창한 일을 하라는 말이 아니며, 남들과 달리 두드러져서 이름을 남기게 될 그런 일을 하라는 말도 아니다. 말없이 그저 서 있는 것 하나만으로 인근의 사람들에게 의지처가 되고 그걸 둘러싼 마을에 평화로운 대기를 ‘만들어주는’(만드는데 참여하는) 느티나무도 그렇고, 군소리 없이 내가 하자는 대로 해주며 내 작업을 가능하게 해주는 노트북 컴퓨터도 그렇듯, 조용히 그저 옆에 있음만으로 슬그머니 세계를 다르게 바꾸어놓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요란하게 남의 눈을 끌고자 하지만 빈축이나 살 뿐인 사람들, 남들에게 명령하고 호통치지만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토록 하는 이는 또 얼마나 많은가!

조주나 남전이 말했던 ‘있음(有)을 안다’는 말을 나는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 그렇기에 이는 존재자의 공성을 보는 부처보다는 차라리 시장통의 상인이나 농부의 밭을 가는 물소, 혹은 숲속의 세계를 형성하는 이리나 늑대와 더 가까이 있는 것이다. 늑대가 있는 숲과 없는 숲은 얼마나 다른가! 소가 있는 농부의 세계와 소가 없는 농부의 세계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그렇기에 남전은 “삼세의 부처님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물소와 이리가 있음을 안다”고 했을 것이다. 있음을 아는 이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말에, 마을에 내려가 밭가는 물소가 되라 한 것 또한,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마을, 즉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 있음과 없음이 분명히 다른 존재자로 존재하라는 말이고, 자신이 있음으로 인해 자신이 없는 것과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라는 말이며, 그런 식으로 세계의 대기를 만들며 다른 존재자들과 함께 살아가라는 말이다.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 그 세계의 특이성을 만들어가는 특이점이 되라는 말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00호 / 2017년 7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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