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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 명법문 명강의
장흥 보림사 주지 일선 스님틈틈이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 수행의 시작
정리=김형규 대표  |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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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11  15:3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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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선 스님은 오늘날의 세태를 “손가락 하나로 온갖 모든 신통을 부리는 시대”라고 정의하며 그럼에도 고통이 줄어들지 않는 것은 “생각을 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왕의 아들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지식을 모두 배웠지만 ‘삶은 고해’라는 기막힌 상황을 해결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잠든 새벽, 세상 모든 이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뒤로 하고 왕궁을 나와 설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출가 해탈한 부처님 가르침
선에선 ‘마음’ 하나로 정리
고통받는 중생 구제 방법도
결국엔 마음 씀에 달려있어
경전은 마음으로 가는 지도
길 찾아 스스로 가는 것이 선

부처님께서 출가를 하시게 된 배경은 사문유관(四門遊觀)을 통해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왕자였던 부처님께서 동쪽 문에서는 죽기 직전인 노인을, 서쪽 문에서는 죽은 사람을, 남쪽 문에서는 병든 사람을, 그리고 북쪽 문에서는 수행자를 만난 뒤, 삶의 실상을 여실히 보시고 출가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출가를 한다고 바로 해탈(解脫)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6년에 걸쳐 수많은 스승들을 만나 수행을 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명상가들을 만나 깊은 선정에 들기도 하고 극한의 고행주의자들을 만나 죽기 직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해탈은 오지 않았습니다. 고행은 육체와 마음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었고 선정 또한 일상으로 돌아오면 바로 깨져버렸습니다. 이래서는 생사고해를 해탈할 수 없음을 자각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강에 내려가 목욕을 하시고 수자타가 준 우유죽을 먹은 뒤 마지막으로 보리수 아래 앉으셨습니다. 마침내 깊은 명상에 잠긴 부처님께서는 새벽에 샛별을 보시고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이 무엇일까요? 12연기(十二緣起), 사성제(四聖諦), 삼법인(三法印) 등 경전에는 수많은 내용들을 전합니다. 그럼에도 이 많은 가르침을 하나로 정리하라고 한다면 선(禪)에서 마음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마하가섭에게 전한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심전심(以心傳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았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습니다. 여러분도 다 하고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찾아보면 흔적이 없습니다. 모양도 없습니다. 그런데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마음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말과 형상을 떠나 있고 언어를 초월해 있습니다. 그래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오직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팔만대장경’에는 무수하게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담은 것을 경전이라고 하는데 쉽게 설명하자면 지도, 또는 내비게이션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을 가리키는 내비게이션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부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이 둘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깨달은 자와 미혹한 중생의 마음이 둘이 아니라는 가르침은 어떤 의미일까요? 한마디로 요약하면 차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에는 성인범부의 차별이 없고 남녀의 차별이 없습니다. 다만 이런 진리를 사실을 체득하지 못했기에 중생입니다. 화엄경 사구게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약인욕료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풀이하면 “만약 사람이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이 깨달은 바를 알고자 한다면, 법계(法界)의 성품은 오로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임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체유심조’는 ‘화엄경’의 핵심입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마하가섭에게 전해진 심법(心法)은 남인도 향지국 왕자였던 보리달마에 의해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졌습니다.

선이 전해지기 전의 중국에서는 화엄학 같은 교학과 아미타불 신앙이 함께 융성했습니다. 교학을 열심히 배우고 아미타불을 지극정성으로 염불하고 공덕을 쌓은 것은 당시 불교에서 중요한 신행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달마대사가 나타난 뒤로 중국불교는 근본적으로 판이 뒤집혀버립니다.

양나라 무제가 인도에서 온 달마 스님을 만나자 불사에 대해 공덕을 묻습니다. 달마 스님은 “없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불심천자’라는 말을 들었던 양나라 무제는 엄청난 신심을 지닌 황제였습니다. 스님들을 공경하고 수많은 절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노력에 공덕이 없다는 말은 큰 충격이었을 것 같습니다. 달마 스님은 마음이 곧 부처임을 일깨우고자 했을 터이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양 무제를 뒤로 하고 갈댓잎을 타고 소림사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절인연을 기다렸습니다. 달마 스님의 선법은 결국 혜가 스님을 통해 전승됐고 육조로 불리는 혜능 스님을 통해 꽃을 피우게 됐습니다.

혜능 스님의 문하에는 남악 회양이라는 제자가 있습니다. 스승 혜능 스님과 제자 회양 스님의 문답은 달마 스님이 전한 심법이 무엇인지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루는 회양 스님이 불교적인 이론으로 중무장하고 혜능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혜능 스님이 묻습니다. “도대체 어떤 물건이 왔는고?” 느닷없는 질문에 회양 스님은 갑자기 꽉 막혀버립니다. 이를 무너졌다고 표현합니다. 적어도 이정도면 깨달을 확률이 높습니다. 스승의 질문에 아무나 막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고 그런 스님에게 이런 질문했다면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화두는 이론적으로 많이 알아도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간절하지 않으면 결코 막힌다고 표현되는 그런 현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후 회양 스님은 8년간 참구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혜능 스님을 찾아옵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자 혜능 스님이 다시 묻습니다. “닦아서 증득할 수 있는가?” “닦아 증득할 수 있으나 결코 오염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돈오(頓悟)라고 합니다. 단박에 깨쳐버린 것입니다. 돈오가 뭘까요? 하늘에 먹구름이 끼어있다고 해서 태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먹구름을 흩어버리니 구름에 가린 태양이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회양 스님 밑에는 마조도일이라는 걸출한 제자가 나오고 마조 문하에 서당지장 스님이 있습니다. 서당 스님의 제자가 바로 신라 말 한반도에 구산선문의 서막을 열었던 도의국사입니다. 신라 말 이 땅에는 화엄과 유식이라는 교학적인 불교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의 스님은 이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서당 스님에게 인가를 받은 도의 스님은 다시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설악산 진전사라는 변방에서 조용히 법을 펴셨습니다.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의 시작입니다. 여기까지가 부처님의 심법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앞서 밝혔듯이 불교는 고통을 해결을 위한 종교입니다. 부처님께서 끊임없이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가르침을 펴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고통을 없앨 수 있을까요? 결국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고통은 결국 마음을 알고 쓰는 사람과 모르고 끌려가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성인이나 범부나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는 부처가 될 개연성이 매우 높습니다. 좀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모두 부처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과 중생의 차이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아마도 순도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이라는 원석, 즉 불성은 누구에게나 있으나 번뇌 망상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중생의 마음은 한마디로 불순물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도 일단 마음이라는 원석이 있음을 확실하게 믿는다면 우리는 이미 출발점에 서 있는 것입니다. 경전은 지도책입니다. 그러나 지도책이 마음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런데 지도책을 보다 보면 가지는 않고 지도책이 목적 자체가 돼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폐단을 돌이키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통해 화려한 문명을 이뤘습니다. 손 하나로 모든 신통을 다 부리는 시대입니다. 육신통이 모두 가능한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고통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간에 쫒기고 삶에 밀려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바로 그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각이 보고 듣는 것에 따라 수시로 조변석개를 할 때 마치 텔레비전의 모니터를 끄는 것처럼 생각을 쉬어야 합니다. 감각기관의 장난임을 알고 일단 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흡에 집중해야 합니다. 호흡에 집중하면 바깥으로 나돌던 생각이 하나로 모아지고 잠잠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계속 수행하다 보면 어느 날 선정에 들게 됩니다.

그러나 선정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깊은 선정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지속되기 힘듭니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란 무엇입니까? 마음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감각기관에 끌려가지 않고 사물의 실체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는 또한 선정이 깊어져야 증장됩니다. 결코 망념에 떨어지지 않는 지혜가 발휘될 수 있습니다. 선정과 지혜는 이렇게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보조 스님은 선정과 지혜, 정과 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은 결코 거창하지 않습니다. 큰스님들의 말씀도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순간순간 그치고 잠시 호흡을 바로보고 자신을 지켜보는 것. 이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지혜의 눈으로 이해하고 부처님처럼 삶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불자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일상생활에서 정과 혜를 함께 구족해 참다운 행복의 세계를 구현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정리=김형규 대표
kimh@beopbo.com
사진=문영배 광주지사장

 

이 내용은 8월30일 장흥 보림사 주지 일선 스님이 광주국립박물관 특별초청강의에서 설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407호 / 2017년 9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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