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이영섭 작가의 작업은 독특하다. 돌조각 곳곳에는 유리나 도자기 파편이 박혀 있다. 더욱이 땅속에서 방금 꺼낸 유물처럼 작품에는 흙까지 묻어있다. 대지를 조각해 거푸집으로 삼고 그 안에 혼합재료를 부은 후 굳혀서 발굴하듯 캐낸 까닭이다. 세계 조각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기법이다.
서울 갤러리마리(대표 정마리)가 이영섭 작가 기획초대전 ‘흙에서 나온 세월, 亞’를 진행한다. 10월10일까지 열리는 이번 초대전은 이영섭 작가의 끊임없는 ‘한국의 미’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된다. 우현 고유섭 선생부터 황수영 박사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고뇌하는 부분이 바로 한국의 미에 대한 정의다.이 작가는 서구화된 미술교육에서 벗어나 한국의 미에 관한 본질적 탐구를 위해 한국전통의 조각에 대해 연구해왔다. 단순한 기술적 표현 기법이 아닌 조각의 원형, 즉 ‘본질’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며 조각의 기존원리를 뒤집은 ‘발굴’ 기법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리고 한국의 미를 ‘한국의 미소’에서 찾아냈다.
“1000년 전 찬란했던 문화가 유교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소멸했다가 1000년 뒤 다시 드러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절대성에 대한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시간에 대한 절대성에 대해 고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각을 잘 만드는 작가가 아니라 ‘시간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테라코타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흙에서 발굴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전환했다. 세계 유일 ‘발굴 조각’의 첫 걸음이었다. 이영섭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미 사라져버린 것이 진정 소멸이 아니라 단지 망각된 것이며, 언젠가 출토되기를 기다리며 지금도 땅속에서 그것을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다.풍화된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옹기나 도자 파편을 더했고, 전기장치 없이 빛을 내기 위해 작품에 유리를 포함시켰다. 흙을 붙여가며 형태를 완성해 가는 것이 아니라 땅속에 묻혀있던 파편들을 조립해 그 원형을 찾아내는 의사고고학적방법을 통해 자기발생적 형태를 찾아나가는 그의 작업은 역시간적 특징을 드러낸다. 특히 빈 공간을 채우지 않고 여백을 살리는 기법은 인위적인 것을 거부하는 작가의 태도와 더불어 소박하고 따뜻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작품이 갖는 미의식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다. 신라 토우에 반영된 해학미, 백제인의 불상에 나타난 고졸한 미소, 조선백자와 분청자기에 나타난 무기교의 기교가 비록 무의식의 형태로나마 잊히거나 상실한 것들을 그리워하는 우리네 의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이 작가는 발굴 조각을 통해 마애불을 만들고 어린왕자를 조성한다. 옛 선인이 조성한 마애불은 암벽에 새겨 사람들을 기다린다면, 그의 마애불은 전 세계 어느 곳이나 찾아갈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대중과 공감해온 마애불과 어린왕자 등 총 31점을 선보인다.
갤러리마리는 “이영섭 작가는 쏟아지는 서구문화의 홍수 속에서 잃어버린 한국의 미의 원형을 찾아 묵묵히 ‘시간’을 발굴하고 있다”며 “그는 그 무한한 시간성을 흙에서 근원적 해답을 얻었고, 내면적 고뇌와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조각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408호 / 2017년 9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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