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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극락을 바라는 마음도 버리고

“모든 것 버린 염불이 아미타불 본원에 부합”

제가 지금 ‘편지’라는 형식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만, 옛날 스님들도 편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수행을 지도했습니다. 선종의 선사들도 많은 편지를 남기고 있지만, 정토문의 스님들도 많은 편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편지를 읽어드리고자 합니다.

아미타불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 뿌리로 돌아가는 게 염불
지옥·극락, 중생·아미타불 등
이원론 넘어선 불이사상 기반

“대저 염불행자가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해 (가르쳐 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 외에 따로 마음 쓸 것이 없고, 이외에 덧붙여서 설명해야 할 깊은 그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지자(智者)들이 여러 가지로 제시한 가르침이 있습니다만 모두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한 방편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염불행자는 그러한 가르침조차도 버리고 염불해야 합니다. (…중략…) 염불행자는 지혜도 어리석음도 버리고, 선악의 경계까지도 버리고, 신분의 귀천도 버리고, 지옥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버리며, 극락을 바라는 마음도 버리고, 또한 불교의 각 종파에서 설하는 깨달음까지도 버리며,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 외는 염불이야말로 아미타여래의 본원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소리 내어 염불하고 또 염불하면 부처도 사라지고 나도 사라져 부처와 내가 하나가 되며, 그 안에 어떠한 도리도 없게 되어 마침내 선악의 세계가 그대로 정토의 세계입니다. 염불 밖에서 정토를 구해서는 안 되며, 세속의 세계를 싫어해서는 아니 됩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산과 강, 풀과 나무, 바람소리, 파도소리조차도 염불의 경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람만이 미타의 시간을 초월한 대비 본원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와 같이 제가 말씀드리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그대로 제가 말씀드린 것도 버리고, 제가 말씀드린 것과 다른 이것저것도 생각하지 말고, 아미타불 본원에 맡긴 채 염불을 읊는 것이 좋습니다.

염불은 안심을 해서 외우는 것이나 안심을 하지 못하고 외우는 것이나 그 어느 쪽도 시간을 초월하는 타력의 본원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아미타여래의 본원에는 부족한 것도 없고, 쓸데없는 것도 없습니다. 이 밖에 또 무엇을 더 마음을 쓰라고 해야 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리석은 자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그대로 염불하셔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여러분, 혹시 이 편지의 필자를 아실까요? 고유명사까지는 몰라도 혹시 어느 나라 스님의 편지인지는 짐작하실 수 있는지요? 중국이나 한국의 어느 스님 편지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본스님의 편지입니다.

잇펜(一遍, 1239~1289)이라는 스님의 편지입니다만, ‘나무아미타불’(모과나무) 331~333쪽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퀴즈를 한 번 내보려고 일부러 중간에 생략한 부분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부분에는 일본적인 정보가 있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옛날 쿠야에게 어떤 사람이 “염불은 어떤 마음으로 외워야 합니까”라고 여쭈자, “버릴 때야말로…”라고 하셨고 달리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사이교(西行) 법사의 ‘찬집초(撰集鈔)’에 실려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훌륭한 말씀입니다.

잇펜 스님은 쿠야(空也, 903~972)스님을 좋아했습니다. 닮고 싶은 롤모델로 삼았습니다. 실제로 거리거리로 다니면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넓힌 점에서 같았으며, 춤추면서 염불을 한 점에서도 같았습니다. 이 두 분 모두 우리의 원효 스님을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참 좋아합니다.

이제 중간에 생략된 부분을 집어넣어서 읽어보십시오. 완전한 한 편의 편지글이 됩니다. 잇펜 스님은 시종(時宗)의 개조로 떠받들어지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의 저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 편지에 대해서, “시종 제일의 법어로 떠받들고 싶다”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중에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두 부분입니다. 하나는 “지옥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버리며, 극락을 바라는 마음도 버리고”라는 것입니다. 원래 정토신앙은 지옥은 두려워해서 싫어하며 극락왕생을 바라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정토종이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잇펜 스님은 그러한 마음을 다 버리고서 염불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제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극락을 바라는 마음도 버리고”라는 부분에서, 우리 현대인들이 염불을 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가 되는 극락의 존재여부에 대한 회의를 버릴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극락을 가는 것이 목표가 되고, 염불을 하는 것이 수단이 되는 이원론적인 접근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마침내, 정토사상은 잇펜 스님에 이르러 ‘정토종’에서 ‘염불종’으로 순화(純化)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화라는 표현을 제가 선택한 것은, 순수한 결정체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야나기 역시 정토사상은 잇펜에 이르러 그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은 제가 주목하는 두 번째 부분에서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처도 사라지고 나도 사라져 부처와 내가 하나가 되며”라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정토신앙은 아미타불과 내가 서로 마주보면서, 아미타불에게 나의 구제를 맡기는 것으로 배웠습니다. 그런데 여기 잇펜 스님에 이르러 마침내, 아미타불에게 향해간 나는 아미타불과 하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합체(合體)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난 편지에서, 저는 ‘부처님을 등에 업고’라고 하였습니다. 그 표현을 잇펜 스님은 여기서 ‘부처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도 버리고, 나도 버려야 합니다. 쿠야 스님이 말한 것처럼, 나도 아미타불도 “버릴 때야말로”, 지옥도 극락도 “버릴 때야말로” 진정한 염불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잇펜 스님에게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은 아미타불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의 어떤 뿌리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부처님께 가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내게 오는 것도 아닙니다. 공통의 뿌리, 이는 생명의 뿌리(命根)이며 바로 불성입니다. 공통의 기반인 명근 내지 불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염불입니다.

잇펜 스님의 염불사상은 지옥과 극락, 중생과 아미타불의 이원론을 넘어서 있다는 점에서 대승불교의 불이(不二)사상에 기반합니다. 화엄적이기도 하고, 선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잇펜 스님의 염불사상은 일본보다는, 화엄과 선의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 불교와 더 잘 맞는 것은 아닐까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잇펜 스님을 정토사상의 절정으로 묘사하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책 ‘나무아미타불’ 역시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필독(必讀)하셔서 잇펜 스님을 좀 더 깊이 만나보시길 권진(勸進)해 마지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08호 / 2017년 9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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