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말을 하고 동물은 소리를 낸다. 사람이 가진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말을 하고 산다는 것이다. 의사를 표현하고 소통한다는 점에서 말이나 소리는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말은 사람의 인격과 삶을 대변하는 것이다. 반면 소리는 인격이나 의지, 가치관, 세계관, 생각, 사상 등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불교에서는 신(身), 구(口), 심(心)의 수신을 강조했고, 그중에서도 ‘정구업진’ 부분에 수행의 중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산사에 가면 건축물에서 이와 관련된 글귀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언행의 신중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사람의 품격을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된다, 말은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행동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난 행동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인격을 만들
최근 OECD가 내놓은 2008년도 통계연보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근로시간이 30개 회원국 중 가장 많다. 노동생산성은 바닥권이며 문화, 여가 등 생활의 질을 보여주는 지표 역시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어 과연 우리가 선진국의 문턱에 와 있는 것인지 의아해진다. 선진국이라면 대체로 그런 꿈을 실현시켜주기 위해 애쓴다. 일할 때는 일하더라도 명상과 독서 등 심신이 쉴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는 것을 국가의 한 책무로 여긴다. IMF사태 이후 할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게 생각하는 풍조가 완연해진 듯 보이나 일상의 고단함을 술로 달래는 직장인들의 입에서는 삶에 대한 푸념이 그치지 않고 있다. 성인들이 직장 일에 억눌려 있는 만큼이나 한국 학생들은 공부에 치여 지내왔다. 벌써부터 조기교육, 특목고 입학,
최근 ‘안양 어린이 유괴 살해사건’에서 보듯이 끔찍한 살해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 중 대부분은 원한에 의한 살해가 아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하는가 하면, 어린이를 유괴하여 무참히 살해한다. 여중생 여고생을 상대로 한 성폭행 범죄도 늘고 있다. 그중에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저 순간의 충동에 의하여 폭행과 살인을 자행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봄이 돌아오자 거리에는 개나리와 목련이 활짝 피기 시작하더니 이제 벚꽃이 그 아름다운 꽃망울을 터뜨려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생명’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이 우리를 도취하게 한다. 이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이 어디 벚꽃만이겠는가! 삼라만상의 모든 생명이 그렇고 인간의 생명이야 말로 더더욱 아름답고 신비한 것이 아닌가! “모든 생명은 채찍을 두려워한다
‘변재천녀의 미묘한 혀보다 더 훌륭한 혀를 내어, 그 낱낱 혀로 그지없는 소리를 내고 낱낱 소리로 온갖 말을 내어 부처님들의 모든 공덕을 찬탄하며…’-보현행원품 칭찬여래원 중에서- 오래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공장에서 성악가를 꿈꾸는 한 소년이 일하고 있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레슨조차 받지 못했던 소년이 천신만고 끝에 첫 레슨을 받았을 때, 교사는 그 소년에게 ‘너는 성악가로서의 자질이 없다. 네 목소리는 덧문에서 나는 바람소리와 같다’고 혹평을 했다. 교사의 혹평에 소년은 그만 크게 낙담하여 좌절에 빠지고 말았다. 실의에 빠져 힘을 잃은 소년. 그러나 그 소년의 어머니는 아들이 좌절하고 실의에 빠진 이유를 알고는 꼭 끌어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너는 할 수 있어. 실망하지 말아라.
21세기 밀레니엄 시대를 맞으면서 우리나라의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과연 우리나라도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라는 화두를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 낙관적 견해를 가진 사람도 많겠으나 회의적 견해를 가진 사람이 더 많지 않나 생각된다. 이제 우리의 소득은 2만불 대에 진입, 선진국 대열에 들었으나 국제기구의 각종 조사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지도자 부패지수나 정치수준은 세계 120여개 국가 중하위권에 머물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경제 발전을 이룩했으나 세월이 흘러도 요지부동인 것은 바로 지도층과 정치인의 수준이다. 민주사회의 발전은 성숙한 여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언제부터인가 논리적인 토론보다는 목소리 큰 사람이 여론을 만드는 것처럼 되어 버렸고, 법
올 8월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티베트에서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했고 이제는 라싸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됐다고 한다. 1950년 10월, 중국이 티베트를 식민지로 삼은 이래로 1959년 3월 10일 무장독립 투쟁은 중국에 대한 봉기의 신호탄이라 볼 수 있다. 이 와중에 티베트 민족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인도의 다람살라로 피난해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우게 된다. 중국의 문화혁명의 기간에도 숱한 사원이 파괴되고 승려 수가 대폭 줄어드는 등 티베트의 역사와 종교에 대한 탄압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독립에 대한 티베트인들의 의지는 꺾일 줄 몰랐다. 티베트 독립운동이 여타 소수민족의 그것과 다른점은 그 선봉에는 늘 승려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은 소수민족을 중국화 시키기 위해 민족적,
지난 3월 5일 조계종 환경위원회(위원장 세영)에서는 대운하 건설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공식 선언하였다. 그리고 3월 7일에는 ‘부처님 마음과 생명의 눈으로 우리의 삶을 성찰하는 참회법회’가 문경 봉암사에서 봉행됐다. 참으로 뜻 깊은 행사가 아닐 수 없다. 현재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반대하는 움직임은 수많은 환경단체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전국의 교수들 또한 속속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지난 3월 6일에는 ‘한반도대운하를 반대하는 대전충남 교수모임’이 결성되어 “한반도 대운하 건설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는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 성명서에서는 “현재 알려진 ‘한반도대운하’의 내용은 환경적인 영향에 대해 평가가 부실할 뿐만 아니라, 경제성도 없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또한 민간부문에서 추진한다 하더라
“진실을 바로 알아 진실이라고 여기고, 거짓을 바로 보아 거짓인줄 안다면, 이는 올바른 헤아림이라, 반드시 참된 이익을 얻으리라.”(『법구경』 「쌍서품」)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어서 좋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라는 안목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처님 가르침을 믿으면 우리가 보는 하나하나의 인간과 동물들과 식물들과 자연들 모두가 다 부처님의 모습이라고 여길 줄 아는 눈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고, 세상에서 존재하는 만물들이 다양하고 예쁘고 아름다운 행위들이 다 부처님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으로부터 사랑의 눈, 감사의 눈, 그리고 깊은 인연의 근원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배우기 때문이다. 지금껏 그냥 대수롭지 않게만 보던 뭇 인간
앞으로 5년, 국민의 바람은 소박하다. 지금보다 삶의 질이 좀 더 나아졌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그만 꿈마저 벌써 무너지는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허탈한 느낌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해방 후 지금까지 60년 동안 17번이나 대통령을 뽑았고, 17번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다. 미국이나 유럽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선거철이 다가 오면 온 국민이 축제분위기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손으로 지도자를 뽑아 소망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진국 문턱에 있다는 우리는 그렇지가 못하다. 한 달 후인 4월 9일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은 잔치 분위기지만 국민들은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다. 선거를 거듭해도 요지부동인 것이 우리 정치문화이기 때문이다. 선거를 치를수록 국민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지도자에 대한 부정
자기 PR의 핵심은 말하기 능력이다. 다른 사람보다 돋보여야 생존할 수 있는 시대다 보니 말하기는 늘 자신의 모습을 강조하고 포장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추세에서 듣기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한 경우가 있어 눈길을 끈다. 즉 일본 지방자치단체 중 8곳에서 새해부터 공립고등학교 입시에 국어 듣기평가를 도입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듣기를 강조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현대인들이 그만큼 듣기를 하찮게 여기고 있다는 반증이며 동시에 소통이 부재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사이에 얼마나 소통이 단절되어있는지를 쉽게 알 수가 있다. 가장 가깝다고 여기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간에는 물론이고 부유층과 빈곤층, 신세대와 기성세대, 국민과 정부사이에도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경우를
600여년의 수명을 지녀 온 숭례문이 장렬한 불꽃을 내뿜으며 최후를 마쳤다. 임진왜란과 일제시대 6.25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의 몸을 꿋꿋이 지켜온 숭례문이다. 최첨단의 방화 장비를 갖추고 더군다나 지척에 소방서를 두고 있는 서울 한 복판에서 숭례문은 왜 그리도 쉽게 자신의 몸을 던진 것일까? 70이 다된 한 노인의 방화, 사회적 불만이 ‘극장형 폭력’으로 표출된 사건이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던진 사회적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방화를 미연에 차단할 수 없었던 관리부족, 방화가 난 후 수많은 소방차가 출동하고서도 화재를 진압하지 못한 점 등 우리 사회의 문화재 방재시스템의 허술함에 대한 국민들의 한숨과 분노가 극에 달해 있다. 또 그 책임 소재를 놓고 벌어지는 정치인들의 공방은 우리의 허해진
부처는 항상 구족돼 있어 만족할 줄 아는 것이며, 중생은 구족돼 있어도 부족하다고 보는 것. 향을 싼 종이에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는 비린내가 나듯이, 부처님을 믿으면 좋은 이웃이 된다.이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곁에는 늘 누군가 이웃이 함께 살고 있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나는 언제나 누군가의 이웃이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연 관계 속에 서로 이웃하며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옛 선현들은 이웃의 관계를 이와 잇몸의 관계로 비유하였다. 서로 의지하며 돕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관계를 잘 표현한 말이 아닐까 할 정도로 적절하다. 그래서 ‘이웃사촌’이라고 하는 말도 일리 있는 속담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다.그 이웃 중에는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좋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