鞭索人牛盡屬空(편삭인우진속공)碧天廖廓信難通(벽천요확신난통)紅爐焰上爭熔雪(홍로염상쟁용설)到此方能合祖宗(도차방능합조종)‘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 모두 공으로 돌아가니 푸른 하늘 아득히 펼쳐져 소식 전하기 어렵다네. 붉은 화로 불꽃 위로 눈 녹이듯 이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조종과 합할 수 있겠구나.’ 곽암사원(廓庵師遠)의 ‘십우도송(十牛圖頌)’ 중 ‘인우구망(人牛俱妄)’.차와 동백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강진 백련사(白蓮寺). 어떤 이에겐 다산 정약용과 혜장 선사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사찰로 잘 알려져 있다. 사찰 일주문을 지나 걸어 들어가면
다보사 큰 법당에 가부좌하고 앉으니머릿속에 매미소리탱탱한 줄 하나 매어 놓는다연이어 가로세로얽히고설킨 거미줄 소리소리순식간에 빈 머릿속매미허물로 가득 찬다꿈틀대는 초침 속 결가부좌하고꽉 끼는 옷을 벗는다몸부림 옷부림친다팔만 사천 땅 속 시침 분침 흔들린다 조여든다조여 오는 거미줄 속에 앉아벗어버린 옷, 텅 빈 안쪽을 찬찬히 들여다본다이판사판탱탱한 어둠 밧줄 한 쪽 끝을확 놓아버리니 거미줄 밖이다. 이혜선 시인(1950~현재)의 ‘거미줄 법문’은 매우 자유로운 형식의 꾸밈이 없는 현대선시이다. 선시의 발전 과정을 살펴 필자 나름대로
우리 한국 불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궁극적으로 바른 깨달음을 얻어 다함께 성불하고자 하는 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늘 ‘성불하세요’ ‘성불합시다’라고 합장하고 다짐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 언제나 즐겁고 행복합시다’라는 뜻을 담은 인사말이자 덕담이라고도 하겠다. 언제나 즐거운 행복은 조건을 따라 변해 달라지는 그런 무상한 행복이 아니다. 행복과 불행이 반복되거나 타인과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런 유한하고 차별적인 행복이 아니다. 참 행복은 항상 즐거운 열반락이고 해탈락이다. 그래서 참으로 행복을 원한
부처님은 말한다 ‘모든 존재는 폭력에 떤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사랑한다. 다른 존재 안에서 그대를 보라. 어떻게 누군가를 해칠 수 있겠는가’ 오늘날 공장식 사육은 인류 최대의 치부이자 지옥 자체다. 이 지옥을 바꾸기 위한 조치는 간단하다. 단지 볼 수 있는 권리와 힘이다. 만약 도살장이 유리벽으로 되어 있다면 누구도 감히 고기를 먹지 못할 것이다. 마트의 고기도 작은 부위로 잘린 채 말끔하게 포장됨으로 인해 살아있는 생명의 모습을 떠올리기가 어렵다. 눈으로 볼 수 없기에 어떠한 잔인함에 대한 인식이나 동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만행(萬行)이란 ‘온갖 행위’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무상보리를 얻기 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그 가운데 계・정・혜의 삼학이나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육바라밀은 모든 수행을 포괄하는 말이므로 만행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행위로 간주된다.삼학(三學)이란 계・정・혜(戒・定・慧)를 일컫는데, 계행을 지킴으로써 선정에 들 수 있고 선정에 들 수 있음으로 지혜를 얻어 해탈로 나아갈 수 있으므로, 이 세 가지 배움은 불교수행의 요체다. 예불문 앞머리에 등장하는 오분향례인 계향・정향・혜향・해탈향・해탈지견향은 삼학이
법보신문 기자가 수년 전부터 필자에게 수학과 불교를 주제로 칼럼을 써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여러 차례 제안했다. 그때마다 필자는 수학과 불교는 별 연관성이 없을 거라고 거절했다. 어느 날 기자가 수학을 주제로 쓴 불교 논문 예닐곱 편을 보내왔다. 한동안 방치하다가 그 논문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생각, 즉 일종의 영감이 일어났다. 그래서 용감하게도 그 하찮은 그리고 적은 양의 영감을 바탕으로 칼럼을 쓰마고 약속하는 일을 저질렀다.수학은 이성의 학문이다. 수학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은 감성일지 모르나, 수학의 내용과 탐구·증명
경상북도 봉화 축서사 적묵당 앞에 세워진 삼층석탑 뒤편으로 낮은 언덕 위에 석조비로자나불좌상 1구가 놓여 있다(사진 1). 언뜻 봐서는 불상이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하는 곳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오랜 세월 탓으로 마멸이 진행되어 세부표현이 뚜렷하지 않지만 의외로 예스러움이 엿보인다. 불상의 대좌와 광배는 이미 없어졌고 불신만 남아 있는데 머리는 근래에 새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전반적으로 좁은 어깨와 빈약한 가슴으로 양감이 줄어들었지만 착의법이나 옷주름 표현, 손의 형태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특징이 보인다. 양 어깨에
필자는 그동안 4년에 걸쳐 ‘법보신문’에 원고를 써왔다. 첫해에는 불교의 미래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 토론했고, 그 뒤부터 3년간은 매달 동양, 서양, 현대, 불교 인물이 남긴 일화를 소개한 다음 불교 교리의 관점에서 그 의미를 짚어보았다.그 과정에서 부처님과 그분의 주변 인물을 다룬 적이 많았지만 다시 부처님으로 되돌아와 글쓰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부처님의 일생은 단 1회로 논급할 주제는 아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인 부처님. 찬탄을 올리고 올린 다음 또다시 찬탄을 한다 해도 부족한 이 위대한 분을 어
지난 3년 동안 사진을 통해 19세기 말 개화승 이동인부터 2015년 12월의 한상균 사태에 이르기까지 120여년의 한국불교 근현대사의 영욕(榮辱)을 살펴보았다. 솔직히 영광보다는 부끄럽고 힘든 일들이 많았던 어려운 세월이었다는 것을 이런저런 사진에서 느낄 수 있었다.‘살아남기 위해서’ 일본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사찰 주련 정도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이해해 줄 수 있겠지만 이 땅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제1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절 박문사(博文寺) 개원법회에 숱한 스님과 고관대작들이 모여들고, “태평양전쟁에서
유가행파는 유식학파 혹은 유가행유식학파로도 불리며, 중관학파와 더불어 대승불교의 양대 학파를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유식사상(唯識)이란 우리들이 경험하는 이 세계는 단지 마음의 표상에 지나지 않고, 외계의 사물은 마음의 표상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방식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유식사상은 무착(無着)과 그의 동생인 세친(世親)에 의해 약 4~5세기 무렵 ‘유가사지론’과 ‘해심밀경’을 근거로 하여 ‘중변분별론’ 등의 미륵의 논서와 ‘섭대승론’, 그리고 ‘유식20론’이나 ‘유식30송’ 등에 의해 사상적으로 체계화된 것이다. 사실 유
전도몽상은 꿈처럼 뒤바뀐 헛된 생각이라는 의미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갖가지 가르침을 베푸신 것은 모두 중생들의 전도몽상의 어리석음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많은 불자들이 전도몽상을 깨뜨리기 위한 방향으로 가기는커녕 불법 안에서 전도몽상을 일으켜 더욱 헤매고 있다. 실상 ‘불법 내 외도’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부처님은 재세 시에 불교 밖의 외도들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셨는가 하면 안으로도 제자들을 향한 비판을 서슴지 않으셨다. 비판이 없이는 정법을 세울 수 없고 비판 자체로써 정법을 삼는 것이 불교인 것이다.
최근 1990년대 한국화에 대한 논의의 현장을 다녀왔다. 현대 한국화를 이야기하다 보면 가장 논의가 활발했던, 그리고 가장 한국화의 기법 파괴가 이루어졌던 1990년대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 미술 ‘서화’를 ‘동양화’로, 이후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한국화’로 부르기 시작해서 1983년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일반적인 용어가 된 한국화에 대한 논의는 1990년대 인터넷이 들어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기술의 시대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급격한 개념 확장을 보여주고 있다. 먹 만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을 그리고 있
흔히 우리는 역경을 딛고 목표를 성취한 한 인간의 위대함을 칭송한다. 더불어 끊임없는 내적인 욕구와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그 과정에서 강한 인상을 받는다. 우리가 2500여년 전의 붓다, 또는 공자나 노자, 예수를 오늘날 여전히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성취한 결과물뿐만 아니라, 그들이 고난의 과정에서 타협하지 않았던 삶의 모습이 더욱 더 진한 감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우리는 붓다의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알 수 있다. 왕자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수행자의 삶을 택하는 순간, 고난의 길은 예견된 것이었다. 6년간의 긴
올 한해 영화계를 뜨겁게 달군 소식은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이다. 영화는 극적 상황과 심리적 변화를 상징하는 수석을 자연상태인 냇가로 돌려놓고 돈을 벌어 집을 사서 아버지와 만나겠다는 아들의 다짐을 보여주며 끝난다. 정상적일 수 있는 그 다짐이 영화 속 전개된 현실과 양극화와 빈부 격차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겹치면서 슬픔 불안 암담함 등의 복잡한 마음과 깊은 감정적 여운을 남긴다.의사 겸 세계적 통계학자 ‘한스 로슬링’은 불교의 마인드풀니스(마음챙김)에서 차용하여 ‘팩트풀니스(factfulness)’ 즉 팩트에
최근에 결실된 두 손을 복원하여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비로자나불상 2구가 있다.경상북도 예천 한천사(寒天寺) 유리광전에 안치된 철조비로자나불상은 1979년 8월에 보물로 지정되면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사진 1). 처음 발견되었을 때 두 손이 모두 결실된 상태라 약합을 가진 약사불로 후보하였다가 2002년에 팔의 위치를 고려하여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으로 복원되었다. 한천사 비로자나불상은 불신에 비해 머리가 작고 다리의 폭이 넓어 안정적인 모습이며 양감 있는 어깨와 넓은 두 다리,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표현 등에서 통일신라 전성기
어느 스님의 법문이 좋고 그분의 경전반 강좌가 좋아서 수년을 쫓아다니다 언제부턴가 스님 방으로 들어가 차까지 곁들이며 얻어듣는 소참법문 덕분에 절에 다니던 재미가 쏠쏠치 않다고 생각하던 한 처사님이 어느 날 갑자기 이 말, ‘자넨 아상이 아직 남아있어!’라는 말을 스님으로부터 들었다면 기분이 어떨지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법 경직되어오는 안색을 애써 숨기며 ‘내가 그리 건방졌나? 하심한다고 했는데…’라고 여기기 십상이다.아상(我相)은 국어사전에 ‘자기의 처지를 자랑하여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이라고 정
인류역사를 관통해 금욕과 요욕(樂慾 hedonism)이 경쟁을 해왔다. 금욕은 종교를 통해서 나타났다. 정결(chastity 성적 절제)·가난(poverty)·겸손(humility)의 형태로 나타났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절제도 있다. 그런데 끝없이 금욕을 하려면 뭐 하러 태어났을까? 종교는 내세를 약속하며 금욕을 정당화한다. 심지어 사후에 낙원에서 마음껏 술과 여자를 즐기는 종교도 있다.종교는 음악을 규제한다. 음악이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중세의 유럽 음악은 종교음악이 주를 이루었다. 유교도 음악은 주로 인간의 본성을
일본 작가 하루토(1906~1988)는 마사코라는 여인과 결혼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 하루토 부부는 ‘노인’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마사코에게서 세상 사람들이 ‘치매’라 부르는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치매는 알츠하이머와 혈관성 뇌병변으로 생기는 경우가 많고, 수십 가지의 원인에 의해 생기기도 한다. 통계에 따르면 이 매우 곤란한 병은 65세 이상 노인의 4~6퍼센트, 85세 이상 노인의 25퍼센트가 앓게 된다.치매는 3기에 걸쳐 진행되는데, ‘건망기’라고도 불리는 초기에는 기억 장애(
‘반야중관’이란 ‘반야경’의 공사상에 토대를 두고, 용수(龍樹)의 ‘중론’에서 제시하는 중도의 실천과 ‘반야경’에서 강조하는 ‘반야바라밀’ 즉 ‘지혜의 완성’을 통한 공사상의 체득과 그 실천을 목표로 하는 사상체계를 말한다. 사실 이러한 사상은 ‘반야중관’이라는 명칭보다는 ‘중관학’ 혹은 ‘중관사상’이라 불린다. ‘중관파(中觀派)’ 혹은 ‘중관학파(中觀學派)’라는 명칭은 용수의 ‘중론’에 근거한 것으로, 청변(淸辯)에 의해 5~6세기 이후에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용수(龍樹)는 ‘중관파’라는 말을 직접 쓰지는 않았고, 중관파가 역사
오래 전부터 종교편향적 언행이 자주 문제가 되었던 이명박(MB) 후보가 200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는 순간 이미 ‘심각한 종교 갈등’ 상황이 예상되었다. 2008년 2월25일에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로 다섯 달 동안 특히 불교계와 MB 사이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그 사이에 터져 나온 중요한 일만해도 ①국토해양부가 추진한 서울의 대중교통시스템 ‘알고가’에 교회와 성당은 빠뜨리지 않으면서 조계사와 봉은사 등 사찰은 완전 누락하고 ②주대준 청와대 경호처 차장이 “모든 정부부처의 복음화가 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