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이혜선의 ‘거미줄 법문’(끝)
115. 이혜선의 ‘거미줄 법문’(끝)
  • 김형중
  • 승인 2019.12.23 15:24
  • 호수 1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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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 들고 번뇌망상 벗는 과정 시화
자유로운 형식의 꾸밈없는 현대선시

거미줄은 인간 번뇌망상 상징
매미 허물벗듯 틀을 깨부수고
집착 털어낸 해탈 깨달음 읊어
번뇌는 부질없는 생각의 망상

다보사 큰 법당에 가부좌하고 앉으니
머릿속에 매미소리
탱탱한 줄 하나 매어 놓는다

연이어 가로세로
얽히고설킨 거미줄 소리소리
순식간에 빈 머릿속
매미허물로 가득 찬다

꿈틀대는 초침 속 결가부좌하고
꽉 끼는 옷을 벗는다
몸부림 옷부림친다
팔만 사천 땅 속 시침 분침 흔들린다 조여든다

조여 오는 거미줄 속에 앉아
벗어버린 옷, 텅 빈 안쪽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판사판
탱탱한 어둠 밧줄 한 쪽 끝을
확 놓아버리니 거미줄 밖이다.
 
이혜선 시인(1950~현재)의 ‘거미줄 법문’은 매우 자유로운 형식의 꾸밈이 없는 현대선시이다. 선시의 발전 과정을 살펴 필자 나름대로 선시의 세대를 4시기로 나누어 보면 제1세대는 경전 속의 사구게 형식으로 쓴 혜능대사와 신수대사의 오도게송시, 제2세대는 왕유나 소동파의 한시 형식을 갖춘 선취시(禪趣詩), 제3세대는 만해 이후 한글로 쓴 정형화된 한글선시, 제4세대는 오늘날 시인들의 자유시 속 선적인 시이다. 현대시 속에 선적인 내용이 녹아서 용해된 현대선시이다. 이혜선은 제4세대 선시를 구사하는 대표적인 시인이다.

시인은 동국대에 진학하여 미당에게 시를 배워 ‘시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동대부여고에서 국어교사를 역임했고, 평론가로도 등단해 대학 교수로서 한국문단의 중추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시집으로 ‘일일시호일’ ‘신(神) 한 마리’ 등, 평론집으로 ‘문학과 꿈의 변용’ 등이 있다. 윤동주문학상, 한국시문학상, 문학비평가협회상 등을 수상하였다.

‘거미줄 법문’은 보통사람이 법당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선정하는 모습과 번뇌망상을 털어내는 과정을 시화한 작품이다. 시에서 ‘거미줄’은 거미줄 같은 인간의 번뇌망상을 상징한다. 그래서 시의 제목이 ‘거미줄 법문’이다. ‘머릿속의 매미소리’도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왱왱거리는 번뇌 소리다. 번뇌를 다스려보려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보아도 “얽히고설킨 거미줄 소리 소리로 순식간에 빈 머릿속 매미허물로 가득찬다” 번뇌를 없애는 길은 역시 “꽉 끼는 옷을 벗는” 것이다. 매미허물을 벗듯 평생 마음을 옥죄였던 고정관념의 틀(相)을 깨부수고 나오는 선탈(蟬脫)이다. 

시인은 끝 연에서 “이판사판 탱탱한 어둠 밧줄 한 쪽 끝을 확 놓아버리니 거미줄 밖이다”라고 갈무리하였다. 평생 짊어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면 가볍다. 미워하고 원망했던 일들, 억울하고 비참했던 일들의 집착을 털어버리면 마음은 가을하늘처럼 맑고 깃털비처럼 가볍게 훨훨 날아갈 것이다. 이런 해탈의 깨달음을 읊고 있다.

본래 마음 속에 번뇌 망상 같은 건 없다. 세상을 살면서 부질없는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번뇌는 집착을 버리면 곧장 사라지는 객진번뇌 나그네다. 시인은 ‘거미줄 법문’에서 거미줄처럼 얽킨 인생사를 탱탱한 거미줄을 “확 놓아버리니 거미줄 밖이다”고 하였다. 통쾌한 방하착이다. 돈오의 경계를 읊은 명품 선시이다.

그동안 ‘김형중이 사랑하는 불교시’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삼배를 올리며 ‘당신은 부처님’으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경자년 새해에 만복이 깃드시길 빕니다.

“지금 이대로가 부처라네/ 노래하세 노래하세/ 지금 이대로가 부처라네/ 당신은 부처님 당신은 나의 관세음보살님”

김형중 문학박사·문학평론가 ililsihoil1026@hanmail.net

 

[1518 / 2019년 12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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