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0도가 넘는 강추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눈도 제법 내려 아마도 산사는 하얀색으로 덮였을 것입니다. 요맘때 산사를 방문하면 눈에 덮여 더욱 운치 있는 탑도 보고, 눈 덮인 절 마당에 자기 발자국도 볼 수 있습니다. 또 약간 멀리서 바라보면 산사의 그윽한 정취가 더욱 돋보이는 시기입니다. 이렇게 눈 덮인 겨울 산사의 모습을 회화로 남긴 조선시대 설경산수화는 다른 계절에 비해 숫자가 많지 않고, 그중 산사를 중심으로 한 실경산수화는 더더욱 찾기 어렵습니다. 오직 19세기 해거재(海居齋) 홍현주(洪顯周, 1793~18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불교계 지식인들이 불사리에 관련한 논설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들의 주요 관점이 불사리의 유래와 역사, 사리 봉안의 의미 등에 초점이 맞춰졌기에 이후 자연스럽게 사리신앙에 관한 학문적 지형(地形)이 형성됐다. 김대은(金大隱, 1899~1989)의 ‘사리와 탑파의 연기’(‘불교’, 1930), 김영수(金映遂, 1844~1967)의 ‘통도사의 사리와 가사’(‘一光’, 1936) 등인데, 이들의 담론이 오늘날 학계의 연구 방향,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학문적 선구를 이뤘다고 할 만하다.어려운 시대였지만, 불교도들
구순의 노모는 거의 매일 아침 예불을 드리신다. 유년 시절을 돌이켜보면 모친의 거의 유일한 여행은 부처님오신날에 장흥의 보림사로 예불 모시러 가시는 일이었다. 모친 일행과 당도한 보림사 방문이 산사와 맺은 최초의 인연이었다.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범어사와 통도사의 순례는 극장가는 일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산사 순례는 경서의 반 권을 통독하는 일에 버금갈 정도로 마음을 씻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번 휴일에도 양산 통도사를 순례하였다. 겨울의 통도사는 가지런히 도열한 소나무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통도사 초입에 도열한 소나무
제200칙: 염불한 공덕을 일체중생을 위해 회향하라.사람의 일생은 사사건건 거짓으로 꾸밀 수 있지만, 죽음에 임할 때는 거짓으로 꾸밀 수 없거늘 하물며 모친께서 임종시 애착의 정이 없이 기쁜 안색으로 편안히 앉아 돌아가심이겠는가. 만약 정업이 무르익지 않았다면 어찌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형제와 가족들이 진지하게 모친을 위해 염불하기만 하면 모친을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실로 자신이 염불한 공덕보다 훨씬 더 크다. 부처님께서 그래서 독경하거나 주문을 외거나 염불하여 갖가지 공덕을 지어서 모두 법계중생을 위해 회향하라고
사찰이 많아 ‘절 동네’로 불리는 데이왈라는 크고 작은 절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여성은 사원에 기거할 수 없으므로 시내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매일 출퇴근하듯 했던 삐아라타나라마요는 데이왈라에서도 한국과 인연이 깊은 사원이다. 인도불교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이곳 스리랑카와 한국이 수교를 맺은 때는 1977년 11월14일. 봉선사 밀운 스님은 수교 직후부터 교류를 시작했고, 홍원사 회주 동주 스님은 한스교류협회장을 지내며 양국의 불교문화와 수행증진에 많은 씨앗을 뿌려왔다. 그리해 옛 도성 꼬떼(Kotte)의 라자 위하라, 최초의
‘금강경’ 마지막 응화비진분의 익히 유명한 ‘일체 유위법, 여몽환포영…’으로 시작되는 게송 바로 앞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남을 위해 일러주는 것인가? 모양에서 취하지 말고 항상 한결같아서 꿈쩍이지 않아야 한다.(云何爲人演說, 不取於相, 如如不動)”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구마라집 스님 한역본의 내용인데, 이 부분에 해당하는 범본(콘즈본)은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겠느냐? 마치 설명해주지 않은 듯해야 한다. 그래서 설명해주고자 한다고 일컬어지는 것이다”라 되어 있고, 현장 스님의 한역본은 “어떻게 해야 남을 위해 널리 설해주어 열어
우리는 일상에서 샤워하고 이를 닦듯이 매일 마음챙김 명상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평소 하던 대로 움직이면서 자신이 그 동작에 완전히 깨어 있을 수 있으면 됩니다. 샤워할 때, 양치질할 때, 설거지할 때, 차나 커피 마실 때, 주차장에서 사무실로 걸어갈 때, 아침 식사할 때, 또는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릴 때마다 마음챙김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샤워하기’를 선택했다면 몸에 물이 닿는 감각이나 물의 온도, 압력 등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몸을 씻을 때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돌아서거나 몸을 굽힐 때 몸이 어떤 움직임을 취하게 되는지
80장은 “임제(?~867)의 ‘고함(喝)’과 덕산(德山宣鑑,782~865)의 ‘몽둥이(棒)’는 ‘무생법인(anutpattika‐dharma‐kṣānti)’을 증득하게 하여, 정수리로부터 밑바닥까지 뚫고 투과한다. 큰 기틀과 작용이 막힘없이 자재해서 온 몸으로 출몰하거나 온 몸으로 짊어진다. 물러나 ‘문수(Maňjuśrī, 대승지혜)‧보현(Samantabhadra, 보살행)’의 대인 경계를 지킬지라도 ‘진실’을 근거해서 말하면 이 임제와 덕산도 도둑마음의 귀신을 면하지 못한다”이다. ‘운문록’과 뇌암(雷庵正受,1146~1208)의
2500여년 전 인도에서 동아시아를 거쳐 이제는 전 세계 종교가 된 불교는 긴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사상과 수행법이 있다. 불교 안에서도 선종, 화엄종, 정토종 또는 상좌부(남방)불교 같이 여러 종파가 있고 그 안에는 각자의 가르침이 존재한다. 이처럼 불교는 어떤 하나의 종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다양하게 변하고 진화한 종교이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곁에서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종교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다양한 불교의 종파와 사상 속에서도 단 한 가지 불교의 정의를 내린다고 하면 그건 바로 불·법·승 삼보이다
‘사분율장’을 배우면서 율장 속에 드러난 이상적 승가 모습과 현실에서 작동하는 승가 모습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과 출가 수행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갈등에 직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한국불교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의문과 관심도 깊어졌고 다른 나라의 불교에 대한 궁금증도 일었다. 율장에 의거하여 수행하는 도량이 대만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의덕사에 갔었다. 6개월 정도 머물면서 하안거와 구족계 수계산림만 보고 돌아오려던 계획이 6년으로 바뀐 것은 출가자의 정체성은 율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실천을 기반으로 한
‘우리의 생(生)의 조화로운 선율은 다정하게, 사랑스럽게, 속삭이듯 울리고, 영원히 피어나는 봄꽃은 미감(美感)으로부터 싹튼다./ 평화와 기쁨은 굽이치는 물결처럼 유쾌하게 흐르고, 거칠고 적의에 찬 위세는 영웅적 기개로 변한다./ 신비스러운 소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예술적인 영감이 고취될 때, 반드시 영광이 찾아오며 어둠과 혼돈은 빛으로 변한다./ 행복한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외부의 고요와 내부의 기쁨. 그러나 봄날의 태양과도 같은 예술은 고요와 기쁨이 발하는 빛으로 더욱 찬란하리라./ 마음 가득한 위대함은 사랑스럽게 꽃핀다. 영혼이
한 해 동안 ‘웹툰에 빠지다’를 연재했다. 연재한 글의 절반 정도는 불교적인 소재의 작품을 소개한 것이었고, 절반 정도는 불교적인 소재의 작품은 아닐지라도 불교사상에 입각해 해석한 것이었다.홍기삼 평론가(전 동국대 총장)는 ‘불교문학의 이해’에서 불교문학을 분류하면서 △불교경전 문학 △붓다의 가르침을 세계관적 토대로 수용한 창작문학 △경전과 창작의 중간 지대에 걸쳐 있는 문학의 자원(선시, 불교설화, 승전류, 영험록 등)으로 나눴다. 불교문학의 범주를 창작문학에 국한한다고 해도 불교를 소재로 다뤘는지 아니면 주제로 다뤘는지 문제는
“몸의 중심이 어디인가? 하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뇌다, 혹은 심장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 몸의 중심은 그때그때 아픈 곳입니다. 발가락 하나를 다쳐도 사람은 그곳을 치료하기 위해서 온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렇듯이 공동체의 중심도 아픈 사람, 고통스러운 사람입니다.”(‘붓다, 중도로 살다’) 아픈 곳이 중심이라 하며 세상의 아픈 곳을 향하여 그 상처를 어루만져 생명을 움트게 하고 권력구조를 벗어난 공동체를 이 땅에 심어내고자 인생 화두를 간직하며 실존의 칼날 위를 중도로 균형 잡으며 걸어가는 스님이 있다. 그는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삼매의 이익을 얻은 보현보살이 부처님의 칭찬과 보살대중들의 권청으로 설주가 됩니다. 보현보살이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과 중생들과 세계 등을 관찰하고, 부처님의 일체 지혜가 불가사의함을 설합니다. 그리하여 ‘보현삼매품’ 다음에 ‘세계성취품’ ‘화장세계품’ ‘비로자나품‘이 이어집니다.화장세계는 연화장세계라고도 불리는 화엄정토입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화엄교주로서, 노사나불· 석가모니불과 함께 삼불원융의 청정법신입니다. ‘비로자나품’에서는 비로자나부처님이 환귀본처 즉 성불하기까지의 한량없는 인행(因行)을 설하고 있는데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묻는다.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잘게 부수어 미세한 티끌로 만든다면 그 미세한 티끌들은 정말 많지 않겠느냐?” 그러자 수보리는 당연히 많을 것이라 아뢰고는 많은 이유를 “만약 그 미세한 티끌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그 미세한 티끌들을 말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고 답한다. 앞서 ‘금강경’에서 마흔 차례 가까이 반복되는 문구, A는 A가 아니므로 A라 한다는 어투의 일종이기도 하다.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는 비록 이 문단에서 무한대(無限大)의 개념으로 사용되었지만 부파불교의 시각과 대
붓다는 “마음을 이해하는 자는 모든 현상을 이해할 수 있으며 모든 현상에 앞서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불교는 기본적으로 마음이 자연 세계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이고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내성적 탐구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마음과 의식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붓다는 마음을 직접 조사하고 검사하기 위해 초기 인도 명상가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주의를 안정시키고 정제하는 기법들을 다듬어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했는데 이것이 사마타 명상이다.사마타는 주의의 흥분과 이완이라는 장애가 철저하
79장에서 ‘임제선’을 중심으로 ‘5종’과 종풍을 설했다. 다시 ‘임제종’의 종풍을 특별히 설명한다. “‘제 일구’에 ‘3현(현중현‧구중현‧체중현)’을 갖춘다. 또 ‘하나의 현’에 ‘3요(체‧상‧용)’를 갖춘다. ‘제 일구’는 문장과 채색이 없는 ‘심인(印)’이고, ‘3현3요’는 문장과 채색이 있는 ‘심인’이다. ‘방편’과 ‘실상’은 ‘현(玄)’이고, ‘비춤’과 ‘작용’은 ‘요(要)’다.”‘임제록’에서 “부처는 청정심이고, 법은 마음광명이며, 도는 무애광명이다. 제1구에서 깨달으면 ‘불조’를 감당하는 조사선, 제2구에서 깨달으면 사
한 해 동안 우리를 어렵게 만들었던 코로나19가 연말까지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 연초까지만 해도 올해 안에 어떻게든 끝날 거란 기대감이 있었으나 이젠 코로나19에 대한 대비책과 함께 내년을 준비해야한다. 치료제와 백신에 대한 뉴스가 조금씩 나오고는 있지만 우리가 직접 혜택을 받기까진 다소 시간이 걸릴 듯하다. 그동안 경험으로 익숙해진 대비책을 보다 견고하게 해 점차 일상으로 복귀하고 함께 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불교계에서도 2021년을 준비하며 가장 신중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 코로나19 환경 속에서의 전법포교이다. 올해는 모든
전 지구를 강타한 이례적 바이러스로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감염자와 의료진은 물론이거니와 그들 가족과 자영업자들이 겪는 경제적 고통도 심각한 수준을 넘어섰고, 사회 인프라 전반에 미치는 보이지 않는 손실과 어려움은 체감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이다. 일 년 남짓 계속되는 팬데믹 과정에서 전문가들은 가장 안전한 대응으로 마스크 착용과 손씻기를 강조한다. 그간 인류가 축적해온 엄청난 의학 발전으로도 검증된 안전한 백신을 개발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대책이 마스크 착용과 손씻기란 사실은 작고 귀찮은 일에 충실한 게
안녕하세요. 광우입니다.1년 가까이 ‘불보살 가피이야기’를 주제로 불자님들이 체험한 기도와 성취의 세계를 소개했습니다. 부족한 필력이지만 많은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기도’란 무엇일까요. 글자 그대로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보살님 저에게 힘을 주세요!’ 하고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결코 궁극의 길이 아닙니다. 기도는 길을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기도는 임시방편이요,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입니다.기도는 ‘부처님께 비는 것’입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