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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홍현주 ‘수종사’ (끝)

기자명 손태호

조선 산수화 중 유일한 설경 배경의 산사

한강이 한눈에 펼쳐지는 풍광…많은 시인들의 감탄 터트리게해
정조 사위 홍현주가 정약용·초의선사 등과 인연되어 그린 작품
초의선사에게 한 다도에 대한 질문 ‘동다송’ 저술하게 된 배경

홍현주 作 ‘수종시유첩’ 中 ‘수종사’, 종이수묵, 1830년, 남양주 실학박물관.
홍현주 作 ‘수종시유첩’ 中 ‘수종사’, 종이수묵, 1830년, 남양주 실학박물관.

영하 10도가 넘는 강추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눈도 제법 내려 아마도 산사는 하얀색으로 덮였을 것입니다. 요맘때 산사를 방문하면 눈에 덮여 더욱 운치 있는 탑도 보고, 눈 덮인 절 마당에 자기 발자국도 볼 수 있습니다. 또 약간 멀리서 바라보면 산사의 그윽한 정취가 더욱 돋보이는 시기입니다. 이렇게 눈 덮인 겨울 산사의 모습을 회화로 남긴 조선시대 설경산수화는 다른 계절에 비해 숫자가 많지 않고, 그중 산사를 중심으로 한 실경산수화는 더더욱 찾기 어렵습니다. 오직 19세기 해거재(海居齋) 홍현주(洪顯周, 1793~1865)가 그린 ‘수종사(水鍾寺)’가 유일한 겨울 산사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수종사’가 그려진 배경과 그 인물들에 대해 함께 감상해보고자 합니다.

화면의 대부분은 산이 크게 차지해 전체적으로 여백이 적어 조금은 답답합니다. 만약 이 그림이 보통의 산수화였다면 산 위로 공간을 좀 시원하게 넓혀 시각적으로 여유 있게 그렸을 것입니다. 가운데 봉우리 산 능선이 양쪽으로 펼쳐져 점차 아래로 내려오고 그 아래에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정상아래 8부 능선쯤에 작지만 평평한 공간이 있고 그곳에 건물이 보입니다. 좌측 하단에는 나귀를 탄 인물이 시종을 데리고 산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방향으로 보아 저 산 위에 깊숙이 앉아 있는 곳으로 향하는 듯합니다. 하늘빛이 어두운걸 보니 저녁 무렵으로 보이며 흰색이 산을 덮고 있어 눈 쌓인 설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무엇 때문에 선비는 눈 쌓인 산길을 오르는 것일까요? 그리고 산속 저곳은 어디일까요? 바로 남양주 운길산에 위치한 수종사입니다. 그렇다면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은 북한강일 것입니다. 위치상으로 한강은 수종사를 바라보는 방향에서 보면 우측에서 좌측으로 흐르기 때문에 그림에서도 물길은 우측이 높고 좌측이 낮아 물이 흐르는 방향을 정확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수종사는 세조와 관련된 창건 설화를 가지고 있는 왕실과 매우 밀접한 사찰입니다.

경내에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가 자신의 딸 정혜옹주가 혼인 5년 만에 세상을 뜨자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른 후 모신 사리탑이 있습니다. 또 팔각오층석탑은 인목대비가 자신의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명복을 빌며 세운 탑이니 조선왕실과 인연이 깊은 사찰임이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수종사의 자랑은 한강이 한눈에 펼쳐지는 풍광에 있습니다. 조선전기 문신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하였는데 절 마당에서 조망하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양수리) 풍광은 많은 시인 묵객들의 감탄을 터트리게 만듭니다.

수종사와 가장 인연이 깊은 인물은 수종사 가까운 곳에 살던 다산 정약용(1762~1836)입니다. 다산은 어릴 적부터 수종사에서 형들과 함께 공부를 하였습니다. 과거에 합격한 후 친구들과 축하잔치를 연 곳도 수종사였습니다. 관직에 오른 후에도 고향에 오면 늘 수종사에 오르곤 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후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강진 유배 중에도 늘 수종사를 그리워했으며, 해배가 되어 돌아온 후에도 수종사에서 지친 몸을 추스르고 위안을 얻곤 하였습니다. 아마 다산에게 수종사는 어머니 품 같은 곳이었을 겁니다.

그림을 그린 홍현주는 영명위(永明尉), 즉 정조의 큰 사위입니다. 홍현주는 삼형제 중 막내로 큰형이 조선 10대 문장가로 꼽히는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인데 다산과 학문적으로 교유하는 사이였습니다. 홍씨가문은 당시 경화세족(京華世族)의 노론 핵심 집안으로, 당색은 정약용과 다르지만 정약용의 학문과 인품을 존경해 가깝게 지냈으며 막내 홍현주는 29살 많은 다산을 마음의 스승으로 삼아 존경하며 자주 남양주 정약용 본가를 방문하곤 하였습니다.

1831년 10월16일 홍현주가 정약용을 찾아와 수종사에 함께 가자고 해 다산과 두 아들 학연, 학유, 그리고 마침 정약용을 찾아온 초의선사까지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미 70세인 정약용은 노쇠해 따라가지 못했고 산 초입에서 포기합니다. 늘 내 집처럼 오르던 수종사를 오르는 것도 힘이 부치는 나이가 된 것입니다. 이때 속상하고 쓸쓸한 심정을 시로 남겨놓았습니다.

‘북쪽 산비탈 일천 굽이를 부여잡고 올라가/ 동화의 만곡 티끌을 맑게 씻고자 하나/ 이 같은 풍류놀이에 따라가기 어려워/ 백수로 읊으며 바라보니 마음 진정 슬퍼라/’

운길산 아래에서 정약용이 쓸쓸한 시를 짓고 있을 때 정학유, 초의선사, 홍현주는 수종사에 올라 차를 마셨고 이 시절 만남과 오고간 문장들을 모아 ‘수종시유첩’을 만들어 간직하게 됩니다. 다산과 홍현주, 박보영, 이만용이 서문을 썼고, 홍현주는 그림을 그려 운길산의 모습과 유람 정황을 알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림에서 말을 타고 오르는 인물은 바로 홍현주 자신으로 이해됩니다. 이때 홍현주와 초의선사의 교유는 유불간의 만남 이상의 의미가 있는데 한국 차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만남입니다. 차를 좋아하지만 다도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홍현주가 초의선사에게 다도에 대해 질문했는데 이 질문이 초의선사가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하게 한 동인입니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계속 교류하였고 차를 매개로 이만용, 추사 김정희, 추사의 동생 산천 김명희, 정학연 등의 교류가 이어집니다. 양수리의 그림 같은 풍경과 맑은 차향, 그리고 조선의 천재들이 어우러진 남양주 수종사. 현재 수종사의 차와 풍광은 여전하지만 그 걸출했던 선비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초의선사가 남긴 시 구절만 옛 기억을 전해줍니다.

‘수종사는 청고(淸高)한 곳에 있고/ 산천은 그 아래 깔렸도다/ 한잠 자고 일어났는데 차 한 잔 줄 사람 없을까/ 게을리 경서(經書) 쥐고 눈곱 씻었네/ 그대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이곳 수종사까지 오지 않았나.’(초의선사 ‘운길산 수종사’)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지난 2년간 연재한 ‘옛 그림으로 읽는 불교’를 마칩니다. 부족한 글 솜씨와 빈약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구독해주신 불자 도반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불연(佛緣)이 닿는 곳에서 다시 만나길 기원하며 행복하고 건강한 연말연시가 되길 바랍니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567호 / 2020년 12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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