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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베토벤의 코랄판타지 (끝)

기자명 김준희

예술·평등·박애·자유 찬탄은 ‘불소행찬’과 닮아

합창·오케스트라·피아노의 조화로 예술적 효과 극대화
모든 장르 포용하며 즉흥연주로 환상곡 장르의 물꼬 터
‘코랄판타지’의 이상은 ‘아름다운 예술’…순수함 돋보여

1880년 제작된 베토벤의 동상(비엔나).

‘우리의 생(生)의 조화로운 선율은 다정하게, 사랑스럽게, 속삭이듯 울리고, 영원히 피어나는 봄꽃은 미감(美感)으로부터 싹튼다./ 평화와 기쁨은 굽이치는 물결처럼 유쾌하게 흐르고, 거칠고 적의에 찬 위세는 영웅적 기개로 변한다./ 신비스러운 소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예술적인 영감이 고취될 때, 반드시 영광이 찾아오며 어둠과 혼돈은 빛으로 변한다./ 행복한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외부의 고요와 내부의 기쁨. 그러나 봄날의 태양과도 같은 예술은 고요와 기쁨이 발하는 빛으로 더욱 찬란하리라./ 마음 가득한 위대함은 사랑스럽게 꽃핀다. 영혼이 저 높은 웅지의 나래를 피울 때, 영혼의 합창은 더욱 멀리 울려 퍼지리라./ 자, 아름다운 영혼이여, 아름다운 예술의 선율을 기쁘게 받으리라, 사랑과 힘이 하나가 될 때, 인류는 신의 은총을 받으리라.(베토벤이 직접 작사한 ‘코랄판타지’의 합창부분 가사)’

베토벤은 1808년 일명 ‘코랄 판타지(Choral Fantasy)’라고 불리는 합창, 오케스트라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매우 짧은 기간에 완성된 이 곡은 성악과 기악의 두 측 면에서 매우 대규모 편성으로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합창’ Op.125의 스핀오프(Spin-Off)같은 느낌이 강하다. 공식적인 이름은 ‘피아노와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이다. 베토벤은 그가 1794년에 작곡했던 ‘사랑받지 못한 이의 한탄 그리고 쌍방의 사랑 WoO 118’ 의 주제를 이 곡의 서두 선율로 사용했다. 당시 아직 출판되지 않았던 작품인 이 곡은 G.A. Bürger의 시에 의한 노래로 ‘음들에 의한 마법의 세계’와 ‘시적인 언어의 엄숙함’을 다루고 있었다. 베토벤은 ‘코랄 판타지’에서 이 곡을 인용하며 피아노를 통해 예술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꽤 긴 시간 동안 도입부터 피아노의 화려한 독주가 계속된다. 베토벤은 이미 네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지만 피아노 협주곡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피아노 부분의 전반에 걸쳐 그의 협주곡 4번, 5번과 유사한 정서가 느껴진다. 피아니스트가 홀로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몫을 다하는 것 같은 화려하고 강렬한 카덴차(cadenza)풍의 패시지들이 가득 차 있다. 한편으로는 곡의 전반을 지배하는 C단조는 5번 교향곡의 회상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카덴차와도 같은 즉흥적이고 열정적인 피아니즘은 베토벤이 그동안 네 개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보여주지 못한 모든 것을 쏟아낸 것 같다. 베토벤은 스스로 훌륭한 피아니스트였고 즉흥연주에 강했다. 즉흥연주는 연주자의 음악적·테크닉적 능력을 즉흥적인 표현법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베토벤은 ‘코랄판타지’를 작곡하면서 그만의 즉흥연주 기법을 악보에 상세하게 기획했다. 당시 음악회에서 그의 즉흥연주를 듣고서 “이렇게 탁월한 음악을 한 번 밖에 듣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라고 말한 사람에게 베토벤은 “나는 나의 즉흥적인 연주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고 말하며 다시 한 번 그대로 연주했고 후에 정확하게 악보로 옮겼다.  

‘코랄판타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장르적으로 혼합적인 양식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곡 안에는 피아노 협주곡, 칸타타, 환상곡, 기악곡, 합창곡, 관현악곡 등의 모든 장르가 포함되어 있다. 자유로운 즉흥연주를 환상곡으로 고정시켜 피아노 문헌에 있어 환상곡이라는 장르를 발전 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준 작곡가가 바로 베토벤이다. 그는 이미 환상곡 G단조, op.77에서 그 아이디어를 선보였다. 

오케스트라가 조심스럽게 등장하기까지 자유로운 길이의 26마디 동안 아르페지오, 옥타브, 3도 음형, 트릴 등의 다양한 피아니즘이 나타난다. 오케스트라가 등장하는 부분부터 Finale라는 이름으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대화가 계속된다. 호른과 뒤따르는 오보에의 메아리 같은 선율 뒤에 연주되는 16마디의 피아노 주제는 이 곡의 핵심 부분이다. 마치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상하게 하는 C장조의 아름다운 선율은 후에 등장하는 합창 부분의 가사 “행복한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외부의 고요와 내부의 기쁨. 그러나 봄날의 태양과도 같은 예술은 고요와 기쁨이 발하는 빛으로 더욱 찬란하리라”를 미리 알려주는 것 같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악기들이 대화하는 것 같은 이 부분은 실내악적 구성을 보여준다. 플루트 독주에 이어 클라리넷(2명)과 바순의 3중주, 현악 4중주와 피아노의 대화는 베토벤이 전하는 통합의 메시지로 느껴진다.

교향곡 9번 ‘합창’과 이 곡의 공통점은 기악 음악 작품을 합창 피날레로 마무리하는 것과 숭고한 정신 및 공동체적 연합을 이상의 상징으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특히 ‘코랄판타지’에서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이상(理想)’을 ‘아름다운 예술’로 나타내고 있어 이 곡은 베토벤의 음악적 사고의 순수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1808년 12월22일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의 아카데미(Akademie)라는 이름의 음악회에서 초연되었다. 함께 연주된 곡은 피아노 협주곡 4번 Op.58, 교향곡 5번 C단조, 교향곡 6번 ‘전원’ Op.68으로 상당히 긴 시간의 음악회였다. 베토벤은 이 무대에서 ‘코랄판타지’의 피아노 연주를 맡아 작곡가와 피아니스트의 두 역할을 수행했다. 

‘코랄판타지'가 초연된 안 데어 빈 극장 (Karl Wenzel Zajicek 그림, 수채화).<br>
‘코랄판타지'가 초연된 안 데어 빈 극장 (Karl Wenzel Zajicek 그림, 수채화).

이 작품을 끝까지 감상하면 부처님의 생애와 업적을 운문으로 표현한 ‘불소행찬(佛所行讚)’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마치 베토벤이 부처님을 찬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유쾌한 생각을 하게 한다. ‘코랄판타지’에서는 예술 그 자체에 관한 찬미를, 교향곡 ‘합창’에서는 인류의 평등과 박애, 그리고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던 베토벤의 음악과 예술에 대한 숭고한 정신이 ‘불소행찬’과 꼭 닮아있다.

‘우주는 모두 맑고 밝은데/ 하늘과 용과 귀신 구름처럼 모여들고/ 공중에서는 하늘 음악 연주되어/ 그로써 이 법을 공양하였네.// 맑고 시원한 실바람 일어나고/ 구름 없는데 향기로운 비 내리며/ 묘한 꽃들 때 아닌데 활짝 피고/ 맛있는 과일들은 철을 어겨 무르익었네. //마하만다라(摩訶曼陀羅)꽃과/ 갖가지 하늘의 보배꽃들/ 허공에서 어지러이 내려와/ 저 모니 높은 이를 공양하였네.// 다른 무리들의 모든 중생들/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따라 노니니/ 두려움은 모두 다 사라져 없어지고/ 성내고 교만한 맘 아주 없어졌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모두 다 번뇌가 다한 사람 같으며/ 모든 하늘은 해탈 즐기고/ 나쁜 세계 무리들도 잠시 편안해졌다네.// 온갖 번뇌 잠깐 동안 그쳐/ 지혜의 달은 점점 밝음 더하였네.’

우리 모두를 ‘능숙한 청자(聽者)’로 만들어준 악성(樂聖) 베토벤의 ‘코랄판타지’의 선율과 함께 2020년을 마무리한다. 12월의 끝 무렵 이 곡을 초연하며 예술혼을 불태웠을 베토벤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김준희 피아니스트 pianistjk@naver.com

 

[1566호 / 2020년 12월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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