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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근대의 사리신앙 ② - 잡지와 신문에 실린 불사리에 관한 일화들 (끝)

1930년대 불교계 지식인들이 사리신앙의 학문 지형 만들어
가짜 사리탑 만든 무뢰배들, 반출될 뻔했던 괴산 사리탑 등
근대 잡지·신문들, 사리탑과 관련한 굵직한 사건들 담아내

1930년 ‘불교’ 77호에 실린 김대은의 ‘사리와 탑파의 연기’ 논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불교계 지식인들이 불사리에 관련한 논설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들의 주요 관점이 불사리의 유래와 역사, 사리 봉안의 의미 등에 초점이 맞춰졌기에 이후 자연스럽게 사리신앙에 관한 학문적 지형(地形)이 형성됐다. 김대은(金大隱, 1899~1989)의 ‘사리와 탑파의 연기’(‘불교’, 1930), 김영수(金映遂, 1844~1967)의 ‘통도사의 사리와 가사’(‘一光’, 1936) 등인데, 이들의 담론이 오늘날 학계의 연구 방향,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학문적 선구를 이뤘다고 할 만하다.

어려운 시대였지만, 불교도들은 석가모니의 상징인 불사리를 통해 흩어지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면면히 이어온 사리신앙 덕택이었다. 근대 사람들이 사리와 불사리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몇 갈래 다른 관점이 포착된다. 먼저 ‘불교’ 1932년 5월호에 실린 윤이조(尹二祚)의 ‘사리탑’ 시를 읽어본다.

“법복을 걸쳐 입고 사리탑을 예배하니/ 가신 님 남긴 자취 왜 그리도 쓸쓸한지/ 아마도 내 정성이 부족한가 하노라”

여기에는 불사리에 대한 경건한 종교심이 짙게 묻어나온다.

또 한편으론 사리신앙의 구체적 현현(顯現)인 사리탑을 미술품으로 감상하려는 태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1929년 10월13일 자 ‘중외일보’ ‘가두(街頭)의 추색종종(秋色種種)’에서 사리탑을 통해 가을의 쓸쓸함과 세월의 무상함을 바라본 게 그 한 예이다.

“공원의 가을, 그것은 애상과 회고의 그것 뿐이니 풍우 수천년 무상한 인간 세상의 변환을 겪으면서도 오직 묵묵히 서 있는 사리탑!”

서울 파고다 공원의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팔각정을 소재로 하여 도시 사람들의 가을 서정을 담은 스케치 성격의 기사이다. 사리탑을 통해 인간사의 무상을 표현한 것이지만, 내심은 일제에 시달리는 우리 민족의 애환과 감상(感傷)을 사리탑에 투영시키려 한 게 아니었을까.

일제강점기가 계속되면서 민족의 정기가 점점 사라져가고 불교계도 침체에 빠진 탓인지 가짜 사리로 사욕을 채우려는 무뢰배도 나왔다. 1928년 4월 9일 자 ‘중외일보’에 실린 ‘가사리(假舍利)로 취재(取財), 결국에는 발각되어’ 제목의 기사가 사람들 눈길을 끌었다. 경북 달성군의 한 엿장수가 모처에서 구했다며 유리병 속에 든 사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는, 배관(拜觀)을 유도해 15원씩을 받았다. 수상히 여긴 경찰이 조사해보니 고양이 뼈를 태운 다음 금가루를 바른 가짜로 밝혀져 체포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쯧쯧, 아직도 이런 사람이 있나?” 하며 혀를 찼다.
 

‘중외일보’ 1929년 10월13일 자에 실린 탑동공원 사리탑 스케치 기사.
‘매일신보’ 1935년 7월11일 자 괴산 사리탑 도난 기사.

1933년에는 그 28년 전 불국사에서 일본으로 불법 유출되었다가 극적으로 되돌아온 사리탑 관련 기사가 여름철 지면을 뒤덮었는데(연재 22회, 본 보 12월1일 자), 1935년 여름에는 충북 괴산의 한 절터에 있던 사리탑이 골동상인 손에 넘어갈 뻔한 일로 화제가 되었다. 최초 보도는 ‘매일신보’와 ‘조선중앙일보’ 7월11일 자에 함께 실렸다. 다음은 ‘골동상을 전전하던 신라시대 사리탑-수만 원짜리를 몇백 원에 팔아’라는 ‘매일신보’ 기사 요약이다.

“신라시대의 풍치 좋은 사리탑이 불과 수백원에 팔릴 때 발견한 국보가 있다. 경성부 남대문통 고물상 배모씨가 6월27일경 용인군에 거주하는 김모씨의 중개로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김 모 씨로부터 사리탑 한 개를 350원을 주고 사서 황금정 다케우찌(竹內) 씨에게 2700원에 되팔았는데, 다케우찌 씨는 수만 원의 가격이 있는 보물인 것을 알고 외국에 팔려고 하는 것을 총독부 사회과에서 탐지하고 7월3일 오전 사리탑을 조사한 후 보물 가지정(假指定)을 하여 보관케 하였다.”
 

‘조선중앙일보’ 1935년 7월11일 자 괴산 사리탑 도난 기사.

괴산의 절터에 있던 사리탑이 골동상인이 낀 문화재 도굴꾼 일당에 의해 도난당했다. 이들은 몇 단계를 거쳐 2700원(현 5000만원)에 일본인 손에 넘겼고,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인천항까지 옮겼다가, 다행히 배에 실리기 직전에 당국이 압수했다는 내용이다.

기사가 처음 보도되고 한 달 뒤인 8월27일자 ‘조선중앙일보’에 후속기사가 실렸다. 사리탑이 있던 괴산의 현지를 조사한 결과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절터로 확인되었고, 곳곳에 금당 초석과 기와가 흩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당간지주 1기도 원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보도했다. 기사 말미에는 앞으로 고적의 유물을 임의로 가져가면 무조건 처벌하겠다는 당국의 ‘엄벌주의’ 정책도 보도되었다. 하지만 절터의 불교문화재들이 도난당하는 일은 이후로 더욱 늘어났으니, 철저히 단속하겠다는 총독부의 엄포는 여론을 의식한 그야말로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이 괴산 사리탑은 미술품 수집가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사들임으로써 간송미술관이 소장하였고 1974년 보물 579호로 지정되었다. 전형필은 일제강점기라는 혼란한 시대에 제자리를 잃고 자칫 일본이나 중국 등지로 사라질 뻔한 숱한 문화재들을 거금을 들여서 구매해 소중한 우리 문화재의 반출을 막고, 나아가 이들을 박물관에 잘 보존해온 인물이다.
 

이엄선사의 부도로 추정된 괴산 부도탑(현 간송미술관).

이 사리탑은 불탑이 아니라 승탑, 곧 고승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浮圖)이다. 형태나 무늬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었다. 다만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었는데, 그 의문은 43년 뒤 1978년에 풀렸다. 단국대·청주대 공동 학술조사반이 절터로부터 약 100m 떨어진 개울가에서 부서진 비석 하나를 발견했다. 비문을 읽어보니 신라 말 고려 초에 유행한 선종 구산문 중 하나 수미산파의 개조이자,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개국에 큰 힘을 보탠 이엄(利嚴, 870~936) 스님의 부도탑비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이 부도탑비는 위치나 양식으로 보아서 앞서 1935년에 해외로 반출될 뻔한 사리탑의 비석일 가능성이 아주 컸다. 따라서 그 사리탑은 이엄 스님의 부도임이 거의 분명해진 것이다. 처음부터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그나마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옛 고승의 부도 하나를 지켜낸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엄혹한 시절이었으나마 사리신앙의 맑은 정기 한 줄기가 비춘 듯한 감격마저 느껴진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67호 / 2020년 12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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