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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삼천대천세계와 극미

기자명 현진 스님

가장 크고 가장 작은 것의 개념을 나타낼 뿐

삼천대천세계·극미 개념은
실제 물리적 크기는 아냐
집착으로 발생하는 착각을
일러주는 무아법의 가르침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묻는다.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잘게 부수어 미세한 티끌로 만든다면 그 미세한 티끌들은 정말 많지 않겠느냐?” 그러자 수보리는 당연히 많을 것이라 아뢰고는 많은 이유를 “만약 그 미세한 티끌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그 미세한 티끌들을 말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고 답한다. 앞서 ‘금강경’에서 마흔 차례 가까이 반복되는 문구, A는 A가 아니므로 A라 한다는 어투의 일종이기도 하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는 비록 이 문단에서 무한대(無限大)의 개념으로 사용되었지만 부파불교의 시각과 대승불교의 시각은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삼천대천세계란, 하나의 거대한 수미산을 가운데 두고 일곱 겹의 산맥과 여덟 겹의 바다가 번갈아 타원을 이루며 둘러쳐져 있고 그 가장자리에 철위산이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수미세계’를 기본 단위로 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인 남섬부주는 철위산 바로 안쪽의 남쪽 바다에 있는 섬이다. 이러한 수미세계가 1000개 모인 것을 소천세계(小千世界)라 하고, 소천세계가 1000개 모인 것을 중천세계(中千世界)라 하며, 중천세계가 1000개 모인 것을 대천세계(大千世界) 또는 삼천대천세계라 일컫는다. 즉 수미세계 10억 개 모인 것이 삼천대천세계이다.

한 분의 부처님이 교화하시는 세계의 범위가 곧 하나의 삼천대천세계이다. 부파불교는 한 세계 한 부처님뿐이라 하므로 이 사바세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하여 팔상성도(八相成道)하며 이 세계를 교화하신다고 여길 뿐, 다른 세계도 다른 부처님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대승불교는 여러 세계에 여러 부처님이 계신다고 주장하므로 이 사바세계가 있듯이 무수한 다른 세계가 있고 그 세계마다 제각기 다른 부처님이 계시어 그 세계를 교화하신다고 여긴다. ‘금강경’은 대승경전이지만 그 성립이 초기이므로 삼천대천세계를 여러 세계 가운데 한 부분이 아닌 세계 그 자체이자 전체로서 일종의 ‘무한대’라고 여기는 부파불교의 개념이 적용되어 있다.

극미(極微) 또한 이 문단에서 무한소(無限小)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극미에 해당하는 산스끄리뜨는 빠라마아누(paramāṇu)인데, ‘극단적인(parama­) 소립자(aṇu)’로서 극단적으로 작은 입자인 원자(原子, atom)를 가리킨다. 그렇지만 빠라마아누는 현대과학으로 견줘봤을 때 원자에 해당한다는 것이지, 원자를 특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작아서 화학반응을 통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위를 이름 한 것일 뿐이다. 이미 핵반응을 통해서는 더 작은 단위로 나뉘는 까닭에, 실은 이미 원자가 아닌 다른 무엇에 그 ‘빠라마아누’라는 타이틀을 넘겨준 셈이다. 그러므로 빠라마아누의 적절한 번역어는 ‘무한소’라는 개념어가 된다.

인도에선 극미(極微, paramāṇu)에 대해 ‘색을 더 이상 분할이 안 될 때까지 분석하여 도달한 최소단위’로 정의해놓았다. 그리고 그것의 7배에 해당하는 것을 미(微, aṇu)라 하여 ‘안을 가진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지각의 최소단위’로 정의하였으며, 다시 그것의 7배에 해당하는 것을 몸속에 자유로이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크기가 작은 금가루인 금진(金塵)이라 부른다. 그 위에 수진(水塵)과 토모진(兎毛塵) 등을 거쳐 계속 7배를 더한 크기의 단위가 존재하는데, 극미에서 시작하여 8번째 단계가 극유진(隙遊塵)으로서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햇볕에 보이는 먼지이다. 그리고 그 위는 이의 알인 서케, 이 한 마리, 보리알 하나, 손가락 한 마디, 그리고 13번째로 손가락 하나의 크기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서술 또한 극미의 크기가 창문 틈 먼지의 576만 분의 1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삼천대천세계인 무한대건 극미인 무한소건 둘 모두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이란 개념일 뿐 정해진 물리적인 크기는 분명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개념적 언어를 실체화해서 이해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무한대건 무한소건 모두 하나의 개념으로서 모두 우리의 집착으로 인해 발생하여 실존하는 실체인양 착각하고 있음을 일러주고 있는데, 이 또한 다름 아닌 무아법(無我法)의 가르침이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66호 / 2020년 12월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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