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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모양에서 취하지 말고… (끝)

기자명 현진 스님

금강경 깊이 더해주려는 구마라집의 의역

금강경 마지막 부분의 번역서
구마라집과 판본 간 차이 보여
여여부동 의미 전달하려는 의도

‘금강경’ 마지막 응화비진분의 익히 유명한 ‘일체 유위법, 여몽환포영…’으로 시작되는 게송 바로 앞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남을 위해 일러주는 것인가? 모양에서 취하지 말고 항상 한결같아서 꿈쩍이지 않아야 한다.(云何爲人演說, 不取於相, 如如不動)”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구마라집 스님 한역본의 내용인데, 이 부분에 해당하는 범본(콘즈본)은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겠느냐? 마치 설명해주지 않은 듯해야 한다. 그래서 설명해주고자 한다고 일컬어지는 것이다”라 되어 있고, 현장 스님의 한역본은 “어떻게 해야 남을 위해 널리 설해주어 열어 보이는가[宣說開示]? 선설개시 하지 않는 듯해야 하나니, 그래서 선설개시라고 이름 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어서 둘이 동일한 내용인데 반해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내용은 의미에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앞서 일부 내용에서 구마라집의 한역본 내용과 완전한 일치를 보였던 범본인 길기트본 또한 이 부분에선 콘즈본과 동일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의 구마라집 한역본 내용은 기존의 범본과 다른 판본에 따른 것인가? 아니면 스님의 자의적인 의역인가? 먼저, 다른 판본에 의한 번역이라 본다면 불취어상(不取於相)의 상(相)은 그 원어가 감지(lakṣaṇa)와 가늠(nimitta) 및 생각(saṁjñā)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이처럼 셋 가운데 하나로 정해야 할 경우엔 ‘감지(lakṣaṇa)’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그렇지만 그 상(相)을 ‘감지’는 물론이요 ‘가늠’이나 ‘생각’ 가운데 어느 하나로만 보기엔 경전 말미에 언급된 문구라는 점에서 통합적인 결론으로서의 힘이 약해 보인다.

구마라집 스님은 산스끄리뜨로어는 분명히 다른 세 단어를 ‘금강경’의 한역에선 상(相) 하나로 통일하여 옮겼다. 그럼으로써 가져온 혼란도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세 단어가 순차성을 지닌 채 하나의 일관된 사실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면 그 혼란은 오히려 사상의 깊이를 더해주는 힘을 갖고 있기에 오히려 청출어람의 번역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컴퓨터로 치면 ‘감지’는 입력이요 ‘가늠’'은 연산 작용이며 ‘생각’은 연산된 결과물의 저장과 출력이라고 볼 수 있다. 연산 작용 및 저장 공간과 출력도구에 하자가 없는 컴퓨터라면 정확한 입력만 이뤄진다면 그 결과물은 응당 정확할 것이다. 그처럼, 망상 등에 영향을 받지 않은 감지가 이뤄진다면 내부적으로 적절한 가늠과 생각의 결과는 알음알이가 아닌 지혜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기에, 판본의 차이로 보아 상(相)이 감지(lakṣaṇa)의 번역어라는 것도 큰 착오는 아닌 듯하다.

구마라집 스님의 이 부분 번역이 판본의 차이가 아니라면 의역인 셈인데, 단순히 내용을 함축하는 등의 의역으로 보기엔 범문과 한역문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상의 차이가 지나치게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의역이란 가정 하에서 내용의 간극을 줄여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남을 위해 일러줌’이란 경전의 가르침을 수지・독송하는 데서 비롯된 공부의 완성을 위한 마무리를 의미한다. 아무튼 그렇게 남을 위해 일러줄 때는 일러줄 것을 상에서 취하지 말라[不取於相] 하였는데, 여기서의 상은 구마라집 스님이 락샤나(lakṣaṇa)와 니밋따(nimitta) 및 산냐(saṁjñā)를 동일한 한 글자로 옮겨놓은 것으로서의 상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남을 위해 일러줄 것은 대상경계로부터 감지된 것[lakṣaṇa]에 끄달려서도 안 되고 알음알이로 가늠된 것[nimitta]에 휘둘려서도 안 되며 부족한 생각으로 섣불리 단정 지은 것[saṁjñā]에서 취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 바로 불취어상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일러주어야 하는가? 그것이 바로 여여부동한 것이니, 감지된 것에 끄달리지 않는 진실한 경계를 근거로 심사숙고의 명상을 거치고 반야를 통해 성취된 상주불변의 진여를 가리킨다. 진여는 한결같은 것이요 그 무엇에도 꿈쩍이지 않는 것이기에 여여부동이라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진여를 성취하는 데 요긴하게 필요한 것이 앞서 언급된 참아냄(忍, kṣānti)인데, 결과물인 진여뿐만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참아냄까지 모두 품고 있는 것이 바로 여여부동이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67호 / 2020년 12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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