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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강진 백련사의 ‘인우구망(人牛俱妄)’ (끝)

기자명 김영욱

덜고 비우면 둥근 마음만 남을 뿐

여러 전각에 그려진 ‘십우도’
남양혜충 선사에 의해 시작돼
수행을 통해 깨달음 얻은 뒤
중생구제 위해 속세로 나아가

‘십우도’ 중 ‘인우구망’, 1975년, 강진 백련사.
‘십우도’ 중 ‘인우구망’, 1975년, 강진 백련사.

鞭索人牛盡屬空(편삭인우진속공)
碧天廖廓信難通(벽천요확신난통)
紅爐焰上爭熔雪(홍로염상쟁용설)
到此方能合祖宗(도차방능합조종)

‘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 모두 공으로 돌아가니 푸른 하늘 아득히 펼쳐져 소식 전하기 어렵다네. 붉은 화로 불꽃 위로 눈 녹이듯 이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조종과 합할 수 있겠구나.’ 곽암사원(廓庵師遠)의 ‘십우도송(十牛圖頌)’ 중 ‘인우구망(人牛俱妄)’.

차와 동백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강진 백련사(白蓮寺). 어떤 이에겐 다산 정약용과 혜장 선사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사찰로 잘 알려져 있다. 사찰 일주문을 지나 걸어 들어가면 만경루, 대웅보전, 범종각, 명부전 등 이곳저곳에서 여러 전각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중 법당 앞에 이르면 바깥벽에 어린 동자와 소가 함께 등장하는 열 장면의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림을 ‘십우도(十牛圖)’ 혹은 ‘심우도(尋牛圖)’, 또는 ‘목우도(牧牛圖)’라고 부른다.

십우도는 6조 혜능의 법맥을 이은 남양혜충(南陽慧忠, ?~775) 선사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십우도 이외에도 무정설법(無情說法)이나 일원상(一圓相)의 가르침을 통해 많은 제자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었던 선사였다. 혜충이 고안한 십우도는 송나라 때에 이르러 보명(普明)과 곽암(廓庵)에 의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보명과 곽암의 십우도 모두 열 단계로 구성되었으며, 깨달음을 의미하는 하나의 원이 꼭 포함되었다. 그 원이 그려진 단계의 명칭을 살펴보면, 보명은 ‘쌍민(雙泯, 제10단계)’, 곽암은 ‘인우구망(人牛俱妄, 제8단계)’이라고 하였다. 보명이 마지막에 쌍민을 둔 것은 점수(漸修)를 의미한 것이고, 곽암이 여덟 번째 단계에 배치한 것은 곧 돈오(頓悟)를 지향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부터 유입되었고, 임제종 계열의 선종을 신앙했기 때문에 특히 곽암의 그림이 법당의 벽화로 주로 선호되었다.

강진 백련사의 십우도 역시 곽암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 동자가 소를 찾는 심우(尋牛)를 시작으로 소를 찾고 길들이고 귀가하는데, 이때 동자와 소 모두 사라졌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동자가 속세로 나아가는 일화가 그려져 있다. 즉 수행을 시작하여 본성을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어 불가의 근본에 도달한 뒤 중생 구제를 위해 속세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덟 번째 단계인 ‘인우구망’은 동자와 소가 사라지고 원만 남아있는 형상이다. 그림의 요체(要諦)이다. 선종에서의 원은 법성과 실상, 그리고 불성을 의미한다. 이 원에는 모든 것을 비우고 남은 하나의 깨달음만이 있을 뿐이다.

옛날 한 선사가 두 명의 제자에게 ‘반야심경’의 전문(全文)을 읊어주고 “얼마만큼 남았느냐?”라고 묻자, 머리가 좋은 한 제자가 미소를 지으며 “1할 정도만 남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선사가 다른 제자를 바라보자 그 제자가 답하였다. “공(空), 한 글자만 남았습니다.”

덜어내고 비워내라. 그리하면 결국 단 하나만이 우리의 둥근 마음에 남는다. 우리는 그것을 충만한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김영욱 한국전통문화대 강사 zodiacknight@hanmail.net

 

[1518 / 2019년 12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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