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부처님처럼 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저 먼 곳에 있고 나는 여기 이 시궁창에 있습니다. 당신의 나라는 훌륭하고 아름답습니다. 부처님 제발 비오니 나를 어서 빨리 데려가 주시옵소서.’ 이렇게 빌고 이렇게 바라는 것은 염불이 아닌 것이다. 지눌 스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불교가 제 구실 못하는 건
스스로 불자라 칭하면서도
배운 것 실천치 않기 때문
“염불, 염불 하지만 염불에는 대강 열 가지가 있다. 첫째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는 염불, 둘째 입을 잘 다스리는 염불, 셋째 마음가짐을 올바로 하는 염불, 넷째 움직이면서 잊지 않는 염불, 다섯째 조용히 앉아서 잊지 않는 염불, 여섯째 대화 속에서 지키는 염불, 일곱째 침묵 속에서 지키는 염불, 여덟째 부처님 모습을 보면서 하는 염불, 아홉째 무심삼매 속의 염불, 열번째 진여속의 염불이다.”
스님은 그 하나하나를 간경하게 설명하셨다. 첫 번째에서 세 번째까지의 염불은 계와 관련된 염불이다. 몸으로는 죽이지 말아야하고, 훔치지 말아야하고, 간음하지 말아야하며, 또 입으로는 거짓말과 속임수와 악담과 쓸데없는 빈말들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속에서는 욕설과 시기심과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없이 해야 한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깨달은 사랑의 길이요, 부처되는 길이다. 이렇게 지키는 자만이 그의 제자라고 했다.
신체의 여러 부분에 결함과 하자가 없어야 한다. 또 입을 지키고 헝클어진 마음은 모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는 어떠한가? 우리는 속까지 썩어 들어가고 있는 만신창이가 아닌가. 경쾌한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무거운 바위 같은 욕심덩어리, 그것으로는 이 인생의 바다에서 가라앉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지눌 스님이 말씀하시길 “정성을 다해 존경하면서 깊이 부처님을 생각하라”고 하셨다. 한없이 간단없이 행동과 말과 생각을 단속하면서 부처님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이다. 지눌 스님의 당시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불교가 세상의 죄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안전히 인생의 고해를 건너게 하는 튼튼한 배 구실을 하지 못하는 까닭은 불교의 알맹이가 불교도들의 몸가짐, 입가짐, 마음가짐에 고스란히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제4·5·6·7에 열거된 염불은 우리의 어(語)·묵(默)·동(動)·정(靜)의 면에서 본 염불이다. 남과 대화를 하거나 홀로 침묵을 지키거나 또는 일상생활에서 활동을 하거나, 고요히 쉬거나 어느 경우에나 우리 지눌 스님은 멈춤 없이, 쉴 틈이 없이, 어느 때, 어디에서나 부처님을 염하는 생활을 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시다. 그는 말하기를 “정이 극(極)하면 곧 정이니 그때 우리 마음속 깊숙한 곳에 숨었던 부처님 마음이 저절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우리는 거의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할 정도로 분주하게 살게끔 변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분주하고 소란한 세상일수록 우리는 어묵동정의 균형 있는 조화를 이루도록 우리 생활을 고쳐가야 할 것이다. 염불은 법당 안에서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또 염불은 반드시 큰 소리로만 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또 염불은 반드시 부처님의 이름을 그대로 외우면서 해야 되는 것만도 아니다. 염불은 행동이요, 말이기도 하지만 염불은 휴식이요, 좌선이요, 침묵이기도 한 것이다.
[1429호 / 2018년 2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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