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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2540년 부처님 오신날 봉축특집 '21세기 불교 전망'

기자명 법보신문
◇불교입지 넓힐 현대과학-서구문명의 한계 불교가 해결 <양 형 진> 고려대 교수

인간의 정신 활동은 자기 외부의 대상을 탐구하는 활동과 자기 내부를 성찰하는 활동으로 크게 구분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외부 대상을 다루는 정신활동의 영역을 물리학을 위시한 자연학이라고 한다면, 자기내부를 성찰하는 정신 활동의 영역은 종교와 철학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외적인 대상을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그리고 가장 믿을만하게 설명하였던 학문이 현대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이라고 한다면, 인간 자신의 내부 문제를 가장 치열하게 다루면서 마침내 그 모든 외적 조건으로터의 완전한 자유 즉,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에서 시작된 불교이다.

현대물리학과 불교라는 이 두 가지 정신 활동은 이처럼 다루는 내용이 다르다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적으로 2500년이라는 간극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도 또한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가지의 분명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실험과 관찰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물리학의 세계 이해가 오직 명상만으로 이룩해 낸 불교적 세계관에 접근해가고 있다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경험을 우리는 20세기에 들어와서 하게 되었다.

흔히들 과학과 종교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서구의 역사에서는 도그마화된 종교가 과학의 발전을 억제 내지는 지연시켰던 것이 사실이며, 일반적으로 과학의 발달이 종교의 입지를 축소시킨다는 것도 수긍할만한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현상이 불교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을 이해하고 나면 불교적 세계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자연을 이해하고 나서 불교를 본다면, 마치 한 번 왔던 적이 있는 어느 마을에 다시 오는 듯한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므로 불교와 과학의 관계는 마치 방법을 달리하여 산을 오르는 두 사람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헬기를 타고 산 정상에 내린 한 사람과 한 걸음씩 걸어서 정상에 도달한 또 다른 사람과 같이, 두 사람이 지나온 길은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이전에 상상도 못했던 전경들이 펼쳐지게 되었고 그가 보는 세계는 언젠가 그 산에 올랐었던 사람이 전해주었던 그 모습이었다. 그 옛날 선각자가 깨달았던 소식, 그 2500년을 전승되어온 빛나는 진리를 자연 과학이라는 방식으로 한 걸음씩 땅만 보고 걸어온 전혀 다른 발걸음이 이제 약간이나마 파악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과학의 업적이 선각자의 깨달음만큼 포괄적이지 못하므로 과학으로 그 깨달음이 옳다는 것을 감히 증명하지는 못하다 하더라도, 깨달음을 이해하게 하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진리 자체야 변하지 않았지만 과학 시대를 살며 근기가 달라진 중생을 인연따라 포섭하는 또 다른 안내판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적 세계관이 세계에 대한 과학의 이해와 일치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맹목적인 신앙을 경계하면서 우리들을 언제나 맑게 깨어있으리라고 강조하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과, 주술과 마술, 도취로부터 인간 정신을 해방시켰던 과학이 그 궤를 같이하여 간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불교에서 깨닫는다는 것은 나 자신을 포함한 우주의 실상을 제대로 본다는 것이니, 이점에서는 과학도 같은 목표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감안하면서 불교에서의 법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를 되새겨 본다면 과학의 세계 이해와 불교적 세계관이 일치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법이란 대상을 가리키기도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기도 한다.

이는, 이 둘이 서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우주 만유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하여 준다. 그리고 사실 또 그러하다. 그러므로 단순히 자연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궁극의 원리를 본다면 그 안에서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 불법이다. 오직 하나의 궁극적 진리인 불법은 시방세계 어디에도 예외없이 상주불멸하며 상주불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라만상 우주 법계의 어느 곳을 살펴 보아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은 하나도 없는것을 성숙한 과학이 예증하여 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의 서구 문명은 과학 문명에 대한 반성의 기초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과학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불교를 대단히 의미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과거의 철학이나 다른 종교와는 달리 현대 과학의 제성과와 놀라운 정합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서구 문명이 제공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비판을 설득력있게 과학 문명에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의 과학 문명을 동양의 위대한 정신 문명인 불교로 비추어 본다는 것은 무작정 대양으로 나선 선장에게 황해도와 나침반을 쥐어주는 일이 될 것이며, 불교적 가치관으로 서구 문명의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문명사적 전환점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작업은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큰 서원을 세우고 해야 할 일들이다.


◇교육환경의 다변화 -'섭수와 절복의 지혜'갖춰야 <박 선 영> 동국대 교수

현재 한국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드문 다종교사회이다. 한국인의 무의식적 심층에는 무속적인 사고방식이 엄연히 계속되고 있고,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무속적인 종교의례를 실천하기도 한다. 유교는 사회적으로 종교적 기능이 거의 없는 것 같지만 유교적 조상숭배의 제사의례는 개신교 신자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한국인 대부분의 풍속이 되고 있다. 1600여년의 역사를 통해 이미 오래전에 한국문화화되어 있는 불교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근래 새로운 중흥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상대적으로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도 가톨릭은 착실하게 발전을 거듭해 오고 있으며, 여러 교파의 개신교는 한 동안 아연 활기를 띠면서 신자 수의 비약적인 증가추세를 보이더니 최근에는 다소 주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밖에 대순진리회, 천도교, 원불교 등 이른바 민족종교들도 각각 나름대로 교세를 확장해 가고 있다.

그러나 어느 종교도 한국사회의 주도세력은 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각 종교는 서로 자신의 종교만이 가장 진실한 진리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각축한다. 민주사회는 본질적으로 개방사회이고, 이러한 미주 개방사회는 서로 다른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원칙이 잘 지켜지고 발휘될 때 한국사회는 범인류적이고 범세계적인 새로운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바람직한 사회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신앙과 다른 종교인도 자기의 종교가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한국 사회는 매우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수도 있으며, 이러한 조짐은 유감스럽게도 여러 측면에서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최근에 시도된 몇편의 연구결과는 종교문제에 의한 가족 안의 갈등이 이미 위험수위에 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범신론적이거나 다신교적인 종교가 일반적으로는 너그러운 반면 유일신교일수록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경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가! 한국의 종교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나 대리에서는 주로 유일신교인 개신교가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유일신교라 하더라도 특이하게도 가톨릭은 다른 종교와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개신교도들은 공항이나 열차 역의 대합실, 전철, 식당 등을 가리지 않고 집단적으로 예배를 보기도 한다. 때로는 목청을 높이며 배타적인 선교를 하고 있는가 하면 스님에게도 "회개하고 예수 믿어 구원받으라"고 외친다. 전국의 산야에 산재한 민족문화재이기도 한 암벽의 마애불에 붉은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리는 참혹한 만행을 자행하는 것도 그들이다. 이런 행태가 어디까지 갈것인가! 이런 사정을 잘 아는 불교도들은 대부분 심증적으로는 최근 삼각산 일대에서 연속된 사찰방화도 그들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개신교도들은 선교방법도 매우 도전적이고 응집력도 강한 것으로 느끼는 것 같다. 이는 곧 다른 집단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폐쇄적이기 십상인 것이기도 하다. 현 정권에 들어서서 특정종교신자가 각계의 지도적 위치에 많이 발탁되었다는 이야기도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별로 이상스러운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이들은 힘을 더욱 얻은 것으로 느끼는것 같은 모습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최근 문제된 개신교의 성직자 양성을 위한 종교전문대학원제도(안)도 바로 그 하나의 예라고 생각된다. 국.공립의 초.중등학교에서조차 교사가 학생들에게 특정종교를 선전하거나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엄연한 교육법을 위반하면서 교회에 나가도록 하고 매주 개별적으로 확인하는 사례들도 나타나고 있다. 각종 교과서에 특정종교 중심의 내용이 적지 않다는 것은 이미 지적되어온 지 오래다. 각 언론기관이나 TV에서도 대부분 구조적으로 불교가 불공정하게 다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말도 들린다.

이 글에서 지금까지 말한 것이 가정, 사회, 그리고 학교에서 오늘날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처한 과거와는 다른 교육환경이다. 하지만 필자는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이 모두 이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의 다수는 높은 지성과 교양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의 현상이 최근 더욱 크고 거세지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함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선 스님들과 재가불자 모두가 도덕적으로나 지식의 면에 있어서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승.속을 막론하고 불자들의 공동체의식이 보다 강화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할 말은 하고 깨우칠 것은 깨우쳐야 한다. 침묵과 너그러움만이 능사는 아니다. 불교의 교화에 있어서 상대방에 따라 때로는 너그럽게 포용하는 섭수를, 그리고 또 때로는 강한 위엄으로 굴복시키는 절복을 하는 것이 진정한 자비이고 지혜인 것이다. 아울러 개인적 차원에 있어서나 공동체 차원에 있어서나 보다 사회적 헌신과 봉사의 역할을 다변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이제는 가정이나 직장 단위의 새로운 포교방식 개발이 시급한 과제라 하겠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스님들의 수계와 법계 및 인사행정이 서로 톱니처럼 맞물리는 관계 속에서의 승가교육제도의 혁신과 함께 재가불자의 교육도 보다 제도적으로 의무화하고 개선해야 한다. 뿐만이 아니다. 직능별 신도조직을 강화하고 언론이나 TV 또는 예술계 등 화급한 분야에서의 불자로서의 활동을 종단적 차원에서 밑받침해야 한다.


◇불교문화의 재창출 <정 병 조> 동국대 교수

20세기는 힘의 논리가 지배해 온 세기였다. 두차례의 세계대전은 동서냉전이라는 새로운 구도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붕괴이후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종언을 고한다. 모처럼 지구촌에 평화가 정착하는가 했으나 이제 세계는 경제적 마찰이라는 새로운 불씨를 안게 되었다.

흔히 경제를 총칼없는 전쟁이라고 하지만, 선진국간의 경제적 대립은 또 다른 분쟁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결국 총과 돈이라는 질적 차이만 있을 뿐이지, 여전히 세계는 힘의 대결장이 되고 있다. 그러나 다가오는 21세기는 전혀 다른 차원의 대립이 예상되고 있다. 힘의 논리를 지배해 온 것은 인간의 감성적 기능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빵만으로 살지 못한다. 자연히 그 욕구는 지성적으로 바뀌어 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미래의 인류는 문화적 대결구도로 바뀌어갈 수 밖에 없다. 즉 어느 민족이 독창적이고 고유한 문화를 지녔는가 하는 점이 경쟁의 촛점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적 경쟁력은 얼마나 될까? 불행하게도 우리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아직도 국민들의 대부분은 문화를 사치와 혼동하고 있다. 또 사회의 지도층에서조차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의 고속전철 경주통과문제는 단적이고 상징적으로 우리의 문화수준을 드러내고 있다. 지역주민들이 경주통과를 고집하는 것은 경제적 고려때문이다. 또 고속전철 공단측의 논리도 역시 경제성이다. 우회했을때의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보자. 만약 경주 한복판에 철도역이 생긴다면, 오히려 경주지역의 경제는 엉망이 될 수도 있다.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인데 자고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문화의 보고 천년의 고도를 보존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꼭 경주를 통과해야 한다는 발상은 이미 문화적이지 않은 것이다. 이제 우리의 의식구조는 문화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인생의 목표가 더 이상 돈벌고, 출세하는 일에만 두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문화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가 변모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가치지향적 삶이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문화의 핵심, 그 저변은 바로 불교문화이다.

불교문화의 재정립. 불교는 민족종교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사실 1천6백여년이라는 세월은, 그 자체의 무게만으로도 충분하다. 사실 고대와 중세에 있어서 불교문화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양상은 급변하고 있다. 우선 다종교상황의 도래로 말미암아, 불교는 스스로의 색깔을 갖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단순히 전통의 무게만으로는 미래를 개척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또 인류의 삶이 지극히 정보화, 다변화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인터넷트라는 전혀 새로운 정보의 세계속에 있다. 통상의 시간과 공간 개념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눈부신 의료기술의 발달은 평균수명을 20여년이나 늘렸다. 따라서 고령화사회, 정보화 시대, 문화적 시대를 맞으면서, 불교문화 또한 이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다. 불행하게도 불교문화는 지나치게 회고적이었다. 과거의 영광에만 집착하는듯한 인상이다. 물론 불교현대화의 기치아래, 여러 상황변화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불교의례의 한글화, 찬불가보급, 불교오케스트라의 출현, 도심포교당의 증가등은 금세기 말부터 일기 시작한 잔잔한 변화였다. 그러나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돋보였으나, 그 재해석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창조적 불교문화의 전개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새로운 불교문화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통해서 실현해 가야 한다.

첫째 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급선무이다. 정법불교에 바탕을 둔 반석같은 신심이 필요하다. 부처님 말씀이 내 삶의 중심을 차지해야 하고, 그와 같이 살려는 원행이 배어 나와야 한다. 불행히도 우리는 그 투철한 신심보다는 열렬한 호교주의를 더욱 선호하는 것은 아닌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둘째 불교문화의 재해석이다. 사실 유형문화재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그 가치성에 대한 미학적이고 조형적이고 논구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국민들의 심성에 내재된 불교적 영향에 대해서는 별다른 연구가 없다. 기껏해야 불교용어 풀이정도가 고작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세계속에 잠재되고 용해된 불교적 가치를 오늘의 현실에 투영하는 일은 가장 보람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미래지향적 안목이다. 미래를 예측하는 지적 모험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미래는 결국 이 시대 인간심성의 과보일 따름이다. 그 추이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불교적 예지의 통찰을 가꾸는 힘이 필요하다.

불교는 엄청난 잠재력의 종교이다. 문화적 순수성과 함께 저돌적인 추진력을 갖춘 문무겸전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시류를 계도해야 하고 시대의 흐름을 올바로 이끌어 나가야 할 책무가 있다.

더불어 세계속의 한국불교라는 자각을 지녀야 한다. 사실 한국의 불교는 여전히 세계불교 속의 미아로 남아 있다. 다른 불교국가들이 강력한 불교적 이미지로 표상되고 있는 반면, 우리의 경우에는 두드러진 특성이 현양되지 못하고 있다. 나는 한국불교의 문화적 특수성은 승가자체에 있다고 보고 있다. 산사의 하루, 수도의 자세, 그 삶 자체가 우리 불교문화의 특성이다. 그 청정성을 유지하는 일, 그러면서도 시대를 외면하지 않는 의연성 속에서 새로운 불교문화는 창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총론 - 21세기 이끌어갈 일꾼 기르자 <이 기 영> 한국불교연구원 원장

최근 KDI는 2020년에 한국이 누릴 장미빛 환상도를 그려 국민들앞에 내놓았다. 이 보도가 실린 신문 다른 한 쪽에는 서울의 하수도 80%가 만신창이 구멍이 나 있어 온갖 오물이 지하로 스며 들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고속철도가 정말 꼭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경주를 통과하면 우리나라 동남해안 일대가 갑자기 살기좋은 지대로 바뀌기라도 하는지 알쏭달쏭한 일을 천년고도의 문화유산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파고 짓고 건설공사만 벌리는 자연파괴 문화파괴행위가 자행되고 있다.

세계7위의 경제대국이라는 것도 결국은 돈버는 일만을 생각한 발상이다. 만약에 그 경제적 꿈이 달성되었다고 치면 그때 우리나라는 과연 인간들이 살기 좋은 행복한 낙원이 돼 있을까? 이미 국민소득 만달라를 자랑하게 된 이 시기에 우리 사회에는 이루 형언키 어려운 갖가지 인륜을 저버린 관능과 향락, 사치와 낭비로 이 세계가 사람이 사는 세상인지 짐승들의 낙원인지 알 수 없게 되어 가고, 그 자연환경이 시시각각으로 시들고 죽어가고 있다.

인간에게는 돈 벌고 놀고 싶은 동물적 속성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은 결코 그러한 속성을 자극하고 조장하는 그러한 원칙, 그러한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다. 인간의 보다 깊은 심성을 도야을 하고 연마하는 자발적 의지와 노력이 보편화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인간의 품격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역사는 인과응보의 연속이다. 그리고 역사의 원동력은 그 역사의 주인공이 어떠한 인식을 갖고 사느냐 하는데 달려 있다. 인간의 의식이 이기주의적이요 물질적이며 쾌락추구형이며 약육강식의 야수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할 때,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현상이 무엇이겠는가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지금 이 시대에 몇이나 있을까?

제일 좋은 직장이 대기업체라는 사회, 그러나 그 기업체에서 50세를 넘기지 못하고 쫓겨나는 수많은 중늙은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닌 것을 먹고 입고 쓰게끔 조장하는 장사꾼들의 무분별한 상술. 가치아닌 것을 가치라 하고 가치있는 것을 매도 멸시하며 가치관을 전도시키는 매스컴의 횡포. 이른바 자유주의의 지배는 저절로 멈추는 일이 없이 막다른 골목까지 돌진할 것이다. 지금 전 세계는 그러한 이기주의적 각축의 시대로 접어 들었고, 그 각축의 주체는 오만한 인간의 야심이다. 도처에서 피비린내 내는 싸움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다. 과연 21세기에는 그것이 없어질까?

야수로 변한 인간들의 싸움판이 된 자연은 나날이 황폐를 거듭해 갈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종말이 여기 저기에서 조만간 닥쳐 오고 말것이다. 특히 오늘 우리나라에 싹터서 자라고 있는 무서운 앙화의 씨앗은 남쪽땅에 군생하는 종파패권주의적 광신도의 집단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기질에는 광신자가 될 소질이 있어, 이미 북녘에서는 김일성 개인숭배의 광신집단이 하나의 사교 형태를 취해 왔다. 사실 이러한 인간들은 그 광적성격때문에 야수들보다 더 위험한 존재들이다.

우리불교는 지금 이러한 현실상황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우리 불교계의 힘은 너무나 미약했고 우리가 한 일은 너무나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준비된 일꾼이 없었다. 준비가 부족했고 공부가 부족했다. 불교자체의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무궁무진한 능력을 몸소 발휘할 잘 준비된 일꾼이 적었다. 지금 우리에게 50대의 훌륭한 일꾼이 있어야 2천년대의 초기에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겐 40대 30대 20대의 잘 준비된 일꾼이 있어야 2010년, 2020년, 2030년대에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다.

나는 21세기를 살 주역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지금 유년기 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어린아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을 위한 착실한 준비와 교육이 21세기 불교의 역할의 성패를 결정한다. 우리가 준비하고 실천해야 할 정지작업의 내용이 무엇이 될까를 살펴 보자.

첫째로 대승보살도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미래의 사상계를 리이드할 가장 선진적 사상이므로 그 핵심을 파악하고 현대화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종단 지도층의 이론적 준비가 절실하며, 재가 지도자들의 적극적 자기도야가 심화되어, 명실공히 승.속 불이의 대승이상에 입각한 화합의 기풍이 살아나야 한다. 그래서 광신집단이 빠져들고 있는 아집과 법집의 미망을 말끔히 해소하는 진리의 축의 역할을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오늘 우리 불교계를 오염시키고 있는 돈벌이를 위한 각종 비불교적 관행들과 인습들을 과감히 척결하는 자체정화의 혁명적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새로운 이 시대의 이차돈이 등장해야 할 것 이라는 예감마저도 든다.

셋째로 기성의 소수 엘리트들은 승속을 막론하고 사회의 구석 구석에서 진리를 찾아 방황하는 기성의 사회지도층인사들, 삶의 풍부한 경험이 있고, 지식이 있고, 탐구욕이 왕성하며, 돈도 있고 기타 제반 능력이 탁월한 분들에게 대승불교의 참 도리를 깨닫게 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갖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는 청소년교육 못지 않는 중요성을 갖고 있다.

네째는 불교 교육사업과 언론활동의 대대적 확장이다. 한국불교 미래의 사활은 가히 여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 내용이 뚜렷한 방향성 있는 알찬 것이어야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 불교계가 가장 소홀히 하고 있는 분야라고 생각되는 조직적 자비이타행의 실천문제에 대하여는 참아 낯을 들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부끄러운 상황에 있다. 나는 항상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불자라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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