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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독점 발굴-석굴암 전실 있나 없나

기자명 김태형
본사 취재팀의 <해동지도〉와 <경주도회좌통지도〉의 발굴은 석굴암 원형을 둘러싸고 해방이후 30여년간 학계가 논란을 벌여온 `석굴암 전실 유무'의 시비를 종식시킬 수 있는 결정적 자료라는데서 그동안 석굴암 전실 설치의 부당성을 주장해온 일부 학계에서는 무엇보다 그 의미가 큰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일제에 의한 석굴암 보수공사가 개선이 아닌 개악으로 끝나자 석굴암은 수십여년동안에 1천년이 넘는 풍상속에서도 겪지 않았던 총체적 훼손을 감수해야 했다. 일제는 1913년부터 1923년까지 1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세차례에 걸쳐 석굴암에 대한 완전 해체 보수공사를 실시, 석굴암만이 가지고 있는 신라인들의 과학성을 무시함으로써 석굴암은 시멘트 범벅이 되고 말았다.

일제에 의한 중수로 석굴암의 훼손과 퇴화가 점차 가속화하고 있는 과정에서 1961년 당시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정권에 의해 석굴암은 또 한번의 대수술을 받게된다.

그러나 이때의 대수술은 일제의 해체복원에 의한 폐해의 근원적인 개선보다는 그로인한 문제점 즉 침수, 결로 등 습기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고 더 이상의 훼손을 막는데 그쳐 석굴암 원형복원은 영원한 숙제로 남게 놓았다.

결국 이 과정에서 석굴암에는 전에 없던 목조전실이 생겨나고, 보일러의 가동을 통한 습기의 강제 제거가 시작됐다.

그러나 석굴암의 목조 전실설치와 관련 당시 학계는 크게 찬성과 반대, 두 부류로 나뉘어 팽팽히 대립하면서 수차례에 걸친 세미나와 언론매체를 통한 치열한 공방을 벌였으나 결론을 맺지 못했다.

당시 석굴암 목조전실 설치와 관련, 남천우(당시 서울대 물리학과)교수는 <신동아〉1969년 5월과 8월호, 1970년 <원자력학회지〉제1권 등에서 목조전실이 없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에대해 당시 석굴암보수감독관을 담당했던 문화재전문위원 신영훈씨는 <신동아〉1969년 7월호에서 석굴암 상량문과 겸제 정선의 `골굴석굴도', 초석과 하방석의 잔존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목조전실의 존재를 주장했다.

또한 1961년 9월 당시 석굴암보수공사 중앙감독관으로 활동한 황수영박사 등은 신영훈씨 등이 제시한 자료내용과 같은 이유로 목조전실공사를 강행, 현재의 석굴암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법보신문 취재팀이 발견한 1740년경의 <해동지도〉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경주도회좌통지도〉는 석굴암 목조전실의 존재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석굴암 전실설치와 관련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던 겸재 정선의 <교남명승첩〉`골굴석굴'은 1733년경 그려진것으로 <경주도회좌통지도〉와 <해동지도〉와는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돼 일부 학자들이 제기했던 <골굴석굴도〉가 석굴암이 아닌 현재 경북 경주시 양북면 소재의 골굴암을 그렸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와관련 남천우 박사와 유홍준교수는 "이 지도는 그동안의 석굴암 전실유무를 둘러싼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황수영박사는 <해동지도〉와 <경주도회좌통지도〉의 석굴암 표현과 관련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으로 상당히 흥미있는 지도"라며 "석굴암 상량문 등에서 이미 전실이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으므로 전실은 존재했었다"고 말했다.

한편 <해동지도〉와 <경주도회좌통지도〉의 발굴은 그동안 잠잠했던 석굴암 원형복원과 보존연구활동의 새로운 활기를 불러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경주향토사학자 윤경렬씨는 "그동안 석굴암에 현재와 같은 전실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며 "향후 석굴암이 제모습을 찾는데까지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우선이라도 석굴암 내부의 부적절한 조명시설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85년부터 지금까지 10여년간을 석굴암 연구를 위해 헌신해온 경주시 신라역사과학관 석우일관장은 "이 지도는 조선 말엽에 석굴암 전실이 없었다는 것을 입증한 실증적 자료"라며 "그러나 과거 석굴암 복원과정에서 나온 기와등을 볼때 전실의 유무에 대해 무어라 확답하기는 어렵다"면서 석굴암 출토의 기와가 전실이나 석굴의 지붕 방수를 위해 사용됐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동국대 불교미술사학과 문명대교수는 석굴암 전실의 존재여부에 대해 "아직까지 논란의 여지가 많아 무어라 속단하기 어려운 상태"라며 "중국, 인도의 석굴사원의 예로 볼 때 석굴암에도 전실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어 문교수는 "불교계가 정부에 의존해 석굴암을 보존하려기보다는 입장료수입의 일부를 적립해서 석굴암 원형보존의 연구와 실험을 위해 사용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해동지도>와 <경주도회좌통지도>란

<해동지도〉는 우리나라의 도별 군현도집에 팔도총도와 서북피아양계지도를 포함시킨 조성 영조때의 지도책이다.

이 지도책은 모두 8권으로 됐으며, △제1책 경기도 △제2책 해서전도 △제3책 관동전도. 북관전도 △제4책 서북피아양계전도 △제5책 영남전도 △제6책 호서전도 △제7책 호남전도 △제8책 팔도총도로 구성돼있다.

특히 이 지도책에는 조선과 여진의 분계도와 요계관방도, 중국13성도, 북경궁궐도, 왜국도 등이 포괄적으로 담겨있으며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다. <경주도회좌통지도〉는 <해동지도>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된 지도로 경주를 비롯 인근 10여개 대읍이 한권으로 묶여 진 지도책이다.

이 지도는 내용이 매우 상세하고 정밀하여 회화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도시의 구조 △산 △하천 △도로 △봉수 △서원 △사찰 △역원△장시 △사창 △마을 숲 등 그 지방의 문화정보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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