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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청해진 대사 장보고

기자명 이창윤

`해양 상업제국의 무역왕'.

하버드대학 교수를 역임한 에드윈 오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교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1천1백68년전 전남 완도에 다국적 국제무역상사인 청해진을 건설.운영했던 청해진 대사 장보고(?~846)에 대한 평가는 주로 해상실크로드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 무역상이라는 관점에서 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당시 신라의 지배이념이 불교였던 점과 중국 산동반도 적산에 장보고가 직접 법화원을 창건.운영한 사실 등에 비추어 봤을때 그가 어떤 형태로든 당시 불교계와 직.간접의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에 반해 그동안 학계의 연구성과는 주로 해양사나 정치.경제적 측면에 국한돼 당시 불교계에 끼친 장보고의 영향은 전혀 조명되지 않고 있다.

장보고의 불교행적에 대한 기록은 일본인 구법승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비롯한 몇몇 중국과 일본측 문헌에 나타나는 `적산법화원'에 대한 기사가 전부이다.

적산 법화원은 지금의 중국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 동서촌의 산골짜기에 위치해 있다. 장보고 선단의 도움으로 중국 구법순례를 마쳤던 엔닌 스님은《순례행기》에서 법화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곳은 문등현 청녕향 적산촌이다. 산속에 절이 있는데, 그 이름은 적산법화원이다. 이는 장보고가 처음 세운 절이다. 그는 이곳에 토지를 가지고 있어서 양식을 충당할 수 있었다. 그 토지에서는 1년에 5백 섬의 쌀을 소출했다"

엔닌 스님은 이어 적산법화원의 조직과 규모, 법회 등에 대해 적고 있다. 엔닌 스님의 기록에 따르면 적산법화원의 경영은 장보고 휘하의 장영, 임대사, 왕훈 등 3명에 의해 이루어졌고, 규모는 법당과 경장을 비롯하여 승방, 객사, 식당, 창고 등을 갖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주승은 비구니를 포함해 26명이며 노파 3명 등 29명이 거주한 것으로 적고 있다. 이같은 기록은 당시의 경제상황과 적산법화원의 규모를 감안해 볼 때, 장보고의 불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엔닌은 《순례행기》에서 이곳을 방문한 839년 11월 16일에 시작하여 다음해 1월 15일까지 겨울철 `법화경 강회'가 이루어 졌다고 적고 있는데, 매일 40여 명 안팎의 남녀노소와 시주들이 참석했다고 적고 있다. 특히 엔닌은 이 강경의식이 신라풍속과 신라 말에 의해 거행되었던 마지막 2일간은 2백50여 명과 2백 명이 각각 참례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적산법화원이 당나라 내의 신라사회인 신라방의 정신적 지주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전하는 기록이 없고 이를 입증할 만한 고고학적 성과가 구축되지도 않았지만, 완도와 제주도 등지에 장보고가 원찰인 법화사를 창건. 운영했다는 구전은 비교적 수긍이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같은 단편적인 기록들 외엔 장보고가 당시 불교계에 끼친 영향을 살필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당시 불교계의 사상흐름이나 신라의 정치 상황, 그리고 장보고의 해상권 장악이라는 역학 구도속에서 당시 불교계에 끼친 장보고의 영향을 고찰해 볼 수 있다.

장보고가 활약하던 당시 신라는 혜공왕(?~780)이 시해되는 것을 계기로 빈번한 왕위 쟁탈전을 벌이는 혼란기에 접어든 때였다. 왕권을 확보하려는 진골계급간의 세력다툼은 곧 능력있는 육두품 이하 중간 지배계층의 이탈을 가져오는데, 그들은 실력으로 신분제도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 신라 말기에 이르러 육두품 이하 중간지배층이 앞다투어 당으로 유학을 떠난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당으로 유학을 떠난 중간 지배층들은 유교를 배워 당나라 관료가 되거나 출가하여 당시 전 중국을 휩쓸던 선종 특히, 남종선을 배워 신라에서 전하는 일을 하였다. 따라서 중앙집권층이 후원하던 화엄사상에 맞서 지방 호족세력들이 자신들의 사상적 기반으로 선종을 택하게 된 것도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청해진을 통해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 장보고는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해 강력한 지방세력으로 성장했다. 따라서, 그가 중앙집권층이 후원하던 화엄사상이 아닌 새로이 신라로 전해진 선사상을 자신의 사상기반으로 삼았거나, 적어도 선문을 강력히 지원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여기에 당시 신라에서 당으로 들어가는 육로가 발해에 의해 막혀 있었다는 점도 장보고와 선종이 깊은 관계에 있음을 유추해 보는 근거가 된다. 즉, 당시 동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장보고선단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는 당에 유학할 수도, 신라로 돌아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엔닌이 장보고선단의 도움으로 유학을 떠나 돌아온 것도 그런 까닭이며 실제로 당시에 이용됐던 항로가 모두 청해진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당시 이용됐던 항로는 황해도 장산곶과 옹진, 백령도를 거쳐 지금의 산동성 이해시 성산각이나 석도진 적산포에 이르는 `황해횡단항로'와 발해만을 건너 연안을 따라가는 `노철산항로', 한반도와 중국동남부를 직접 연결하는 `동남중국해 사단항로'가 있었는데, 황해 횡단항로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이중 황해횡단항로와 노철산항로는 서해안을 따라 운행됐지만 모두 장보고의 영향권 아래 있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거쳐가고 있어 실질적으로 장보고선단의 도움을 빌리지 않으면 중국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장보고가활약하거나 그의 사후 장보고 선단의 영향력이 건재했을 당시 당에 유학한 선승들의 행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선승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신라하대 지방호족의 후원을 받았던 구산선문의 개창자라는 사실이다.

동리산문의 개산조인 적인선사 혜철(785~861) 스님은 839년 2월에 귀국해 전남 화순 쌍봉사에서 첫 안거를 했고, 사자산문의 개산조 철감선사 도윤(798~868) 스님은 847년 4월에 귀국해 역시 쌍봉사에 주석한다. 도윤 스님은 특히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해 제해권을 장악하기 시작하기 3년전에 당으로 건너가 장보고 사후 1년 뒤에 돌연 귀국해 이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가지산문의 3대 조사인 보조선사 체징(804~880) 스님은 장흥 보림사를 개산지로 정해 선종과 청해진의 장보고 선단과의 관계를 시사해 주고 있다.

구산선문이 대부분 전라도나 인접한 충청도 등지에 분포하고 있는 것도 이런 근거를 뒷받침해준다. 이와 관련해 최완수(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도윤 스님이 화순 쌍봉사에 주석하고, 체징 스님이 장흥 보림사에 주석한것 등을 볼 때 장보고와 관계 깊은 선사들이 이 지역으로 내려와 선문을 개설하여 선지를 전파함으로써 청해진 세력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게 되었을것"이라고 추정했다.

또, 장보고 선단과 협력관계에 있었던 왕건이 무주(지금의 광주) 지방을 차지한 이후 이들의 비호 아래 신라말 고려초의 선승들이 당에 유학했던 것도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왕건의 편에 섰다가 궁예에게 살해당한 선각대사 형미(864~917) 스님이 891년 영암 포구에서 배를 타고 당에 갔다가 905년에 귀국한 사실이나, 영암 출신의 동진(868~947) 스님이 892년 당나라에 갔다가 921년 전북 임피로 들어온 사실, 황해도 광조사에 주석했던 진철대사 이엄(866~932) 스님이 911년 영산강 중류인 회율포로 귀국한 사실, 법경(871~921)스님이 908년 나주로 들어온 사실, 정진(876~956)이 924년 전북 부안으로 귀국한 사실 등이 이것을 확인해준다.

이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신라말 구산선문의 성립과 발전은 장보고 또는 그의 선단의 보호 아래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대해 최완수 실장은 "장보고 선단은 중국의 남종선이 신라에 전해져 신라에 선종이 꽃피우게 된 산파 역할을 했다"며 "아직까지 선종의 신라 전래에 영향을 끼친 장보고의 역할에 대한 학술적 규명이 없는 만큼 이 부분도 조명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창윤 기자



`해양 상업제국의 무역왕'.

하버드대학 교수를 역임한 에드윈 오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교수
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1천1백68년전 전남 완도에 다국적 국제무역상사인
청해진을 건설.운영했던 청해진 대사 장보고(?~846)에 대한 평가는 주로 해
상실크로드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 무역상이라는 관점에서
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당시 신라의 지배이념이 불교였던 점과 중국 산동반도 적산에 장
보고가 직접 법화원을 창건.운영한 사실 등에 비추어 봤을때 그가 어떤 형
태로든 당시 불교계와 직.간접의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 이에 반해 그동안 학계의 연구성과는 주로 해양사나 정치.경제적 측면에
국한돼 당시 불교계에 끼친 장보고의 영향은 전혀 조명되지 않고 있다.

장보고의 불교행적에 대한 기록은 일본인 구법승 엔닌의 《입당구법순례
행기》를 비롯한 몇몇 중국과 일본측 문헌에 나타나는 `적산법화원'에 대한
기사가 전부이다.

적산 법화원은 지금의 중국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 동서촌의 산골짜기에
위치해 있다. 장보고 선단의 도움으로 중국 구법순례를 마쳤던 엔닌 스님은
《순례행기》에서 법화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곳은 문등현 청녕향 적산촌이다. 산속에 절이 있는데, 그 이름은 적산
법화원이다. 이는 장보고가 처음 세운 절이다. 그는 이곳에 토지를 가지고
있어서 양식을 충당할 수 있었다. 그 토지에서는 1년에 5백 섬의 쌀을 소출
했다"

엔닌 스님은 이어 적산법화원의 조직과 규모, 법회 등에 대해 적고 있다.
엔닌 스님의 기록에 따르면 적산법화원의 경영은 장보고 휘하의 장영, 임대
사, 왕훈 등 3명에 의해 이루어졌고, 규모는 법당과 경장을 비롯하여 승방,
객사, 식당, 창고 등을 갖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주승은 비구니를 포함
해 26명이며 노파 3명 등 29명이 거주한 것으로 적고 있다. 이같은 기록은
당시의 경제상황과 적산법화원의 규모를 감안해 볼 때, 장보고의 불교에 대
한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엔닌은 《순례행기》에서 이곳을 방문한 839년 11월 16일에 시작하여 다
음해 1월 15일까지 겨울철 `법화경 강회'가 이루어 졌다고 적고 있는데, 매
일 40여 명 안팎의 남녀노소와 시주들이 참석했다고 적고 있다. 특히 엔닌
은 이 강경의식이 신라풍속과 신라 말에 의해 거행되었던 마지막 2일간은 2
백50여 명과 2백 명이 각각 참례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적산
법화원이 당나라 내의 신라사회인 신라방의 정신적 지주임을 보여주는 것이
기도 하다. 비록 전하는 기록이 없고 이를 입증할 만한 고고학적 성과가 구
축되지도 않았지만, 완도와 제주도 등지에 장보고가 원찰인 법화사를 창건.
운영했다는 구전은 비교적 수긍이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같은 단편적인 기록들 외엔 장보고가 당시 불교계에 끼친 영향
을 살필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당시 불교계의 사
상흐름이나 신라의 정치 상황, 그리고 장보고의 해상권 장악이라는 역학 구
도속에서 당시 불교계에 끼친 장보고의 영향을 고찰해 볼 수 있다.

장보고가 활약하던 당시 신라는 혜공왕(?~780)이 시해되는 것을 계기로
빈번한 왕위 쟁탈전을 벌이는 혼란기에 접어든 때였다. 왕권을 확보하려는
진골계급간의 세력다툼은 곧 능력있는 육두품 이하 중간 지배계층의 이탈을
가져오는데, 그들은 실력으로 신분제도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자 한다. 신라 말기에 이르러 육두품 이하 중간지배층이 앞다투어 당으로
유학을 떠난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당으로 유학을 떠난 중간 지배층들은 유교를 배워 당나라 관료가 되거나
출가하여 당시 전 중국을 휩쓸던 선종 특히, 남종선을 배워 신라에서 전하
는 일을 하였다. 따라서 중앙집권층이 후원하던 화엄사상에 맞서 지방 호족
세력들이 자신들의 사상적 기반으로 선종을 택하게 된 것도 당연한 결과라
고 할 수 있다. 청해진을 통해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 장보고는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해 강력한 지방세력으로 성장했다. 따라서, 그가
중앙집권층이 후원하던 화엄사상이 아닌 새로이 신라로 전해진 선사상을 자
신의 사상기반으로 삼았거나, 적어도 선문을 강력히 지원했을 것이라는 추
측이 가능해진다.

여기에 당시 신라에서 당으로 들어가는 육로가 발해에 의해 막혀 있었다
는 점도 장보고와 선종이 깊은 관계에 있음을 유추해 보는 근거가 된다. 즉
, 당시 동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장보고선단의 도움을 빌리지 않
고서는 당에 유학할 수도, 신라로 돌아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엔닌이 장
보고선단의 도움으로 유학을 떠나 돌아온 것도 그런 까닭이며 실제로 당시
에 이용됐던 항로가 모두 청해진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당시 이용됐던 항
로는 황해도 장산곶과 옹진, 백령도를 거쳐 지금의 산동성 이해시 성산각이
나 석도진 적산포에 이르는 `황해횡단항로'와 발해만을 건너 연안을 따라가
는 `노철산항로', 한반도와 중국동남부를 직접 연결하는 `동남중국해 사단
항로'가 있었는데, 황해 횡단항로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이중 황해횡단
항로와 노철산항로는 서해안을 따라 운행됐지만 모두 장보고의 영향권 아래
있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거쳐가고 있어 실질적으로 장보고선단의 도움을 빌
리지 않으면 중국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장보고가
활약하거나 그의 사후 장보고 선단의 영향력이 건재했을 당시 당에 유학한
선승들의 행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선승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신라하대 지방호족의 후원을 받았던 구산선문의 개창자라는 사실
이다.

동리산문의 개산조인 적인선사 혜철(785~861) 스님은 839년 2월에 귀국해
전남 화순 쌍봉사에서 첫 안거를 했고, 사자산문의 개산조 철감선사 도윤(7
98~868) 스님은 847년 4월에 귀국해 역시 쌍봉사에 주석한다. 도윤 스님은
특히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해 제해권을 장악하기 시작하기 3년전에 당으
로 건너가 장보고 사후 1년 뒤에 돌연 귀국해 이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
다. 또한 가지산문의 3대 조사인 보조선사 체징(804~880) 스님은 장흥 보림
사를 개산지로 정해 선종과 청해진의 장보고 선단과의 관계를 시사해 주고
있다.

구산선문이 대부분 전라도나 인접한 충청도 등지에 분포하고 있는 것도
이런 근거를 뒷받침해준다. 이와 관련해 최완수(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
도윤 스님이 화순 쌍봉사에 주석하고, 체징 스님이 장흥 보림사에 주석한것
등을 볼 때 장보고와 관계 깊은 선사들이 이 지역으로 내려와 선문을 개설
하여 선지를 전파함으로써 청해진 세력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 장보고 선단과 협력관계에 있었던 왕건이 무주(지금의 광주) 지방을
차지한 이후 이들의 비호 아래 신라말 고려초의 선승들이 당에 유학했던 것
도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왕건의 편에 섰다가 궁예에게 살해당한
선각대사 형미(864~917) 스님이 891년 영암 포구에서 배를 타고 당에 갔다
가 905년에 귀국한 사실이나, 영암 출신의 동진(868~947) 스님이 892년 당
나라에 갔다가 921년 전북 임피로 들어온 사실, 황해도 광조사에 주석했던
진철대사 이엄(866~932) 스님이 911년 영산강 중류인 회율포로 귀국한 사실
, 법경(871~921)스님이 908년 나주로 들어온 사실, 정진(876~956)이 924년
전북 부안으로 귀국한 사실 등이 이것을 확인해준다.

이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신라말 구산선문의 성립과 발전은 장보고 또
는 그의 선단의 보호 아래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대해
최완수 실장은 "장보고 선단은 중국의 남종선이 신라에 전해져 신라에 선종
이 꽃피우게 된 산파 역할을 했다"며 "아직까지 선종의 신라 전래에 영향을
끼친 장보고의 역할에 대한 학술적 규명이 없는 만큼 이 부분도 조명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창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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