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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행자 24시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1분만 늦어도 삼천배 참회

백양사를 찾던 날. 올 겨울 들어 가장 탐스런 눈이 내렸다. 흰 벚꽃처럼 날리는 눈발을 헤치고 경내에 들어선 순간 발걸음은 그대로 멈춰 섰다. 붉은색 법복에 발갛게 언 얼굴, 얼어 잘 펴지지 않는 손으로 보일러를 고치고 있는 한 행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뜨겁게 뱉어내는 흰 입김이 노동의 강도를 짐작케 했다. “이대로 눈이 계속 오면 행자들 고생이 이만 저만 아니지요. 남들은 함박눈이라고 좋아하겠지만 눈을 바라보는 행자들 속은 타지 않겠습니까” 원주 스님의 말에 속세에서 가져온 사치스런 마음을 조용히 내려놓아야 했다.

행자(行者). 스님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수행과정이다. 어린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듯 사회에서 쌓아왔던 숙연(宿緣)들을 지워버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 과정이다. 행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비워내는 하심(下心)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과거의 아만(我慢)과 자존심을 모두 없애고 수행자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 따라서 행자 수행의 과정은 더욱 혹독할 수밖에 없다.

백양사에는 4명의 행자가 생활하고 있다. 통도사·해인사·송광사 등 큰 절에 비하면 적은 숫자이지만 보통 절에 비해선 그리 적지 않은 숫자다. 예전 같으면 수십 명의 행자들로 북적였을 테지만 물질적인 욕망추구에 더 가치를 두는 현대인들은 좀처럼 불문의 세계에 들려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지금은 한 명의 행자를 받기도 힘든 실정이다.

그러나 들어오는 행자가 적다고 해서 행자교육 자체가 허술해 진 것은 아니다. 백양사 행자들의 하루일과를 살펴보면 강행군 그 자체다. 간경·울력이 분(分) 단위로 나눠져 빽빽하게 정해져 있다.

어렵게 받은 행자가 교육 과정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속세로 돌아가는 일이 이 곳에서는 낯설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새벽 2시 30분 새벽 예불새벽 2시 30분. 어스름 새벽달이 잠자리로 돌아가기 전 백양사 행자들의 하루 일과는 시작된다. 쉽게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일어난 행자들은 스님들이 예불을 드리기 전 불단을 깨끗이 닦고 각 당우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그리고 절 구석구석 빈틈없이 청소를 한다.

살을 에는 바람과 칠흑 같은 어둠. 행자들의 일하는 모습은 새벽만큼이나 고요하다.백양사 행자들이 하루 일과 중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바로 이 아침 기상이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이 몸에 밴 속세의 습(習)이 하루·이틀에 고쳐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생활에 예외란 없다. 아침 기상 시간이 1분만 늦어도 그날 삼천배 참회는 기본이다. 여기에 대중 스님들의 불호령은 하루 종일 계속된다. 아침 예불이 끝나면 대중 스님의 공양과 재 준비, 화장실 청소 등 그야말로 절 안팎의 각종 허드렛일이 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40여 명 대중 스님의 공양 3끼를 4명이 차려내는 일은 차라리 중노동에 가깝다. 밥과 반찬을 지어내는 것도 힘들지만 식단 하나를 차리는데도 독특한 가풍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김치를 몇 cm크기로 썰어야 하는지, 밥과 각종 반찬은 어디에 어떻게 놓아야 하는지, 법도를 정확히 익혀 공양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조그만 실수가 있어도 원주 스님에게 눈물이 쏙 나도록 혼 줄이 난다. 대중 스님들의 개인적인 일을 도와주다 늦는 경우에도 참회 과정에는 추호의 예외가 없다. 억울함을 참는 것도 공부려니와 묵언(默言)은 행자과정이 끝날 때까지 지켜야 하는 수행과정이기 때문이다.

허드렛일 아만 버리는 수행

절 집에서 행자들에게 이처럼 힘든 허드렛일을 시키는 것은 남다른 이유가 있다. 세속에서 묻혀온 지위며 자존심 등 오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없애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수행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심(下心)을 배워 참된 수행자로 덕성을 쌓는 행자들이 있는가 하면, 이를 참지 못하고 다시 속세로 돌아가는 행자들도 적지 않다.下心 없으면 스스로 下山 백양사 행자들은 나이가 많다. 모두 30대 중·초반이다.

백양사로 두 번 출가한 이 행자. 일본의 관음사에 출가하기 전 백양사에서 한국불교의 예법을 배우고 있는 정 행자. 대학에서 불화를 전공하고 민중불교 운동을 했다는 호 행자. 행자반장인 최 행자를 제외하고 이들 3명은 11월 12일 이후 일주일 터울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이 행자 과정을 모두 끝내고 스님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더러는 겨울 산사의 적막감을 이기지 못해, 또는 하심(下心)을 배우지 못해 산을 내려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 중 누가 행자 과정을 끝내고 스님이 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행자과정이 끝날 때까지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이 되겠지요. 수행자가 된다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아요”

원주 스님의 말에 행자 생활의 지난한 어려움이 진득이 묻어있다.


글=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사진=황도 기자




“가장 힘든 건 속세 인연 떨쳐버리는 것”
초겨울 백양사 출가한 李 행자

“하루일과를 끝내고 혼자만의 시간이 되면 잊혀졌던 속세의 인연들이떠올라 가슴을 아프게 하곤 합니다. 행자 생활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지요”

지난해 11월 12일 동안거 결제일 백양사로 출가한 이 행자. 지금의 행자생활은 그에게 두 번째다. 장남인 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부모와 형제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지난해 초 도망치 듯 백양사를 찾았다. 그러나 부모님과 동생들에 대한 미련 때문에 다시 산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번 출가는 집안의 허락을 얻은 것이다. 그만큼 구도에 대한 열정 또한 크다. 숨 한번 크게 쉴 여유 없는 칼날 같은 행자생활. 그러나 인연을 끊는 모진 아들을 말없이 허락해 준 부모님을 생각하면 단 하루도 방일할 수 없다. 밤마다 속세에 대한 그리움에 베개 밑을 적시면서도 백양사를 등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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