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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의 茶이야기-[2]차벗(茶友)

기자명 조은
나는 스님을 보고 싶지도 않고 스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지만 차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 못하고 쉽게 부숴 버리지 못해 또 차를 재촉하니, 편지 보낼 필요없이 두 해 동안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을 거외다. 그렇지 않으면 마조의 할(喝)과 덕산의 방(棒)을 받을 것이니, 이 한 할과 이 한 방을 백천 겁이 지나도 피할 길이 없을 거외다.
모두 뒤로 미루고 불식.

추사 김정희가 초의스님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34번째 보낸 것이다. 초의스님으로부터 차가 오지 않자, 으름장을 놓으며 재촉하는 편지다. 격앙된 심정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듯 하지만, 정말로 초의스님에게 화가 많이 났다면 구차하게 이런 편지를 쓰고 또 차를 부탁했을까. 차를 보내주지 않는다고 이런 편지를 쓸 수 있는 차벗이 얼마나 될까. 이 편지 한 편만 보아도 초의스님과 추사의 관계가 짐작된다. 추사 문집에 전하는 서간문 중에서 초의스님에게 보낸 편지가 38편으로 가장 많다. 시도 6편 전한다.

초의스님과 추사는 동갑으로 1815년 30세 때 처음 만나 42년 동안 우정을 나누었다. 초의스님이 추사에게 보낸 편지는 전하지 않아 초의스님 마음의 편린까지는 알 수 없지만, 추사의 편지 내용으로 짐작된다. 추사는 자신의 굴곡진 정치적 행로에 대한 심회를 털어놓는가 하면, 구하기 어려운 서적을 구하면 그것을 초의스님과 함께 고증하고 토론하고 싶어했다. 백파선사와 선(禪)논쟁을 할 때도 초의스님과 논의를 하고싶다는 편지도 남아 있다.

추사가 보낸 편지 38편 중에 11편이 차에 관한 글인데, 대부분이 차를 보내달라는 내용이다. 정중히 부탁하는가 하면, 때로는 앞의 편지처럼 협박에 가까운 문투로, 어떤 때는 해학적인 편지를 보냈다. 차를 너무 많이 덖었다며 다음에는 화후(火候) 조절을 잘하기 바란다는 평가와 충고하기도 잊지 않는다. 추사는 초의스님의 차를 마시며 질병을 다스리고, 또 답례로 명선(茗禪), 일로향실(一爐香室), 반야심경 같은 글씨를 써서 보낸다.

추사의 사회적 위상과 폭넓은 교유관계로 볼 때, 차를 보내주는 사람이 초의스님 뿐이었을까. 유독 초의스님에게 간절히 차를 바란 것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 같다. 초의스님은 차를 만들면서 그것을 받아 흔연히 기뻐할 추사를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 만들었을 것이고, 추사는 만리 길을 달려온 차의 색향미에서, 차나무를 돌보고 1창2기 새순을 따서 화후를 조절하며 차를 덖다가 데어 손에 물집이 생겼을 스님을 생각하며, 그 차를 소중히 받아 마셨을 것이다. 이런 교감이 거의 매년 봄 곡우는 물론, 1년에도 몇 번씩 이어졌는데 지기(知己)가 되지 않을 수 있으랴.

71세 때 추사가 표연히 이승을 떠나자 초의스님도 일지암 밖을 나오지 않으시고, 73세 때 추사의 제문 〈阮堂金公祭文〉을 지었다,

(생략) 아, 42년 동안의 금란교계(金蘭交契) 변치 않아 몇천 백겁에 함께 향화(香火)를 맺을 인연이나 멀리 떠나 만나기 어려우니 편지로 항시 대면을 가름했고, 존귀함에 구애없이 이야기할 때는 외형(外形)을 잊었습니다. 제주에서 반년을 위로했고 용호에서 두 해를 머물렀습니다. 때로는 진리의 담론으로 다투는 소리 마치 폭우와 우레처럼 날카로웠고 때로는 마음을 나누는 화기가 봄바람과 따스한 햇살처럼 훈훈하기도 했습니다. 손수 뇌협(雷莢)과 설유(雪乳)를 달여 함께 기울이기도 하고 슬픈 소문이 귀에 닿으면 적삼을 함께 적시기도 했습니다.(생략)

42년 동안의 우정이 오롯이 함축된 글이다. 추사는 초의스님이 있어 일생이 웅숭깊었고, 초의스님은 추사가 있어 더 풍요로운 삶을 사셨을 것이다.


한국다도연구원 원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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