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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 관점에서 본 '인간복제'

기자명 이봉춘
"유전자 이동에도 업설 적용 여지"-불교교리와 인간복제의 상층여부 과제로



1978년 인슐린 합성으로부터 시작된 유전자 이동 기술은 이제 인간과 유전적 차이가 가장 적다는 원숭이 복제로까지 현실화되었다. 적절하게 통제되지 않는 한 생명복제의 최종단계인 인간복제도 시간문제가 되고만 현시점에서 찬반의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과학의 발전이 인류를 무지에서 벗어나게 하고 생활에 편리와 풍요를 가져온 것은 분명하다. 만일 과학의 발전이 없었다면 지금도 지동설(지동열)은 `신학적 이단'으로 취급당하고 있을 지 모르며, 인간의 생활조건은 열악함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 공학의 발전이 인간복제의 단계로까지 치닫고 있음은 천동설(천동열)의 무지와 허위를 벗겨내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상황이다.

인간복제 문제를 논하는 불교적 관점의 우려는 그것이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어서가 아니다. 물론 인과˙업˙윤회 등 불교의 기본교리와의 상충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생명복제에 있어서 `유전자는 운명처럼 정해진 것이 아니다'라는 과학자들의 설명을 참고한다면, 그로 인한 불교의 교리적 해석은 아직은 유보할 수 있다. 유전자 이동에도, 의지의 중요성 즉 업설의 이론이 적용될 여지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복제는 교리상의 상충여부와는 별도문제로서 그 윤리성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 가능성에 도전해 온 인간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과학자들에게 인간복제는 떨치기 어려운 유혹일 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기대되는 선(선)도 인정할 수 있다. 불치병 환자의 치료나 아이를 갖고자 하는 불임부부의 소망해결, 혹은 인간의 수명연장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이 남용˙악용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럴 경우 대량살상 무기가 될 위험성이나 기술과 상황윤리간의 예측가능한 사태 발생 등 그 해악과 혼란은 전율스러울 정도이다.

불교에서는 특히 생명의 존엄성과 존중을 강요한다. 그 이유는 생명은 곧 연기(緣起)적 존재이자 불성(佛性)의 존재이며, 또 오직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만일 기술조작에 의해 플라스틱 제품처럼 인간이 제조되는 상황이라면, 이제 인간에게 귀한 것으로 남겨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 복제는 끝간데를 모르는 인간 욕망의 표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평화와 행복은 욕망의 극복과 적절한 통제에서 온다는 사실이다.


이봉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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