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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컬럼

기자명 리영희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내 젊었을 적 잘한 일 한 가지'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어 젊었을 때를 회상하면서 "아! 그 때 내가 한 일은 잘한 일이었다"고 자신이 대견해 보이고 뿌듯한 만족감에 젖을 때가 있다. 나도 몇 가지 일로 그같은 흐뭇한 회고를 할 때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강원도 양양의 신흥사에 관해서 이다.

지금은 기억도 아련해진 6.25전쟁 초의 일이니까, 계산해 보니 45년전 일이다. 나는 한국군 보병 제11사단 제9연대 소속의 나이 겨우 스물 두 살의 어린 장교였다. 나의 부대는 북위 38도선을 돌파하여 동해안을 따라 파죽지세로 2차 북진을 하고 있었다.

폐허가 된 양양에서 쉴 사이도 없이, 임시 연대 본부가 위치할 신흥사에 도달하니 벌써 한겨울의 이른 어둠이 설악산의 준령에 내려지고 있었다. 평안북도에서 태어나서 소년기를 자란 나는 해방 전까지 절을 본 일이 없었다.(유일한 예외가 묘향산인데, 그곳에는 일제시대의 국민학교 아동으로서는 가볼 엄두도 내지 못할 뿐더러 묘향산의 사찰에 관해서 들어본 일도 없었다.) 해방 후 여행을 할 여유가 없었던 나는 남한의 큰절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했던 나에게 신흥사는 처음 대면하는 대사찰이었다.

신흥사는 성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그 성한 모습은 바로 몇 시간전에 지나온 낙산사가 거의 원래 모습을 알 수 없게 끔 파괴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절은 성한채였지만 절을 지켜야 할 스님은 그림자도 없었다.

연대 지휘부에 앞서 도착한 본부중대의 병사들이 몸을 녹이려고 절안팎 여기 저기서 활활 불을 피우고 있었다.

불이 반가워서 짚차를 세우자마자 요란하게 타는 한 쪽 불 둘레에서 서성대는 병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장작이나 나뭇가지인줄 알았던 불 속에서는 돌과 도끼 삽 같은 것으로 마구 빠개진 불경 목판의 더미가 타고 있지 않은가? 절 안에서 경판을 둘러매고 사천왕문을 분주히 드나드는 사병들, 돌을 높이 들어 내리치는 병사들의 모습이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불빛에 비쳐 마치 영화에서 본 옛 해적들의 그악스러운 노획물 처분장 같아 보였다. 경판은 조각이 나고, 연방 불 속에 던져 넣어졌다.

나는 연대 전방지휘관인 부연대장에게 달려가 상황을 설명하고, 귀중한 겨레의 문화재가 회진되고 있으니 즉시 불을 끄고 모든 경판을 회수하도록 명령을 내리게 했다. 타다 남은 경판은 조각까지 주워서 본당 좌측에 있는 판고(판고)에 차근차근 도로 꽂아놓게 하였다.

사실인 즉 나는 불교신도도 아니었으며 종교도 없는 청년이었다. 신흥사라는 사찰의 문화사회적 가치를 아는 바 없었고, 신흥사의 경판이 무슨 경의 인각이며, 어느 시대에 제작된, 어떤 역사적 유래가 있는지 따위를 알리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행동했던 까닭은 6.25전쟁에서 국군이 들어가는 곳마다 무차별적으로 파괴를 일삼는 것에 대한 젊은 장교의 정의감에서였다. 군대의 많은 장병들에게는 38도선을 넘으면서부터는 `점령지'라는 의식이 앞서서 모든 것이 파괴와 노획의 대상처럼 비치는 성싶었다. 같은 조상들이 남기고 물려준,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언젠가는 다시 한겨레로서 함께 소유하고 함께 향유해야 할, 그리고 다시 후손에 남겨 주어야 할 겨레의 재물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모두가 노획과 처분의 대상이었다.

통일이 되면 당연히 대한민국의 문화재일 것이고, 통일이 안되어도 있던 곳에 남겨 둠으로써 `겨레의 문화'를 보존한다는 따위의 의식은 대한민국 군대에는 없었다. 얼마나 많은 사찰과 고귀한 불교문화재가 그 때문에 잿더미가 되어버렸던가! 상원사(上院寺)를 태워버리려는 국군의 명령에 주지인 방한암(方漢岩)스님이 본당 안에 드러 누워서, "절을 태우려면 나도 함께 불사르라"고 버텨, 상원사가 오늘에 남게 된 이야기는 전쟁 후에 들었지만 정말 군대의 무지의 소치라 아니할 수 없다.

신흥사가 대한민국의 판도로 들어 온 이후 30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신흥사 주지 앞으로 편지를 보내, 경판의 안부를 물었었다. 그러나 한 번도 답신이 없었다. 한 번은 설악산 관광길에 들러, 본당 앞에서 서성대는 스님에게 6.25전쟁 중의 이야기를 하고, 경판을 한 번 보고 싶다고 당부했다. 스님은 다만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할 뿐이었다. 뒤에 알았지만 그 얼마 전에 신흥사의 주지들끼리 도끼를 휘둘러 살인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의 소원이 "마이독경"인 셈이었다.

내가 신흥사 경판의 각별한 가치를 알게 된 것은 훨씬 뒤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현직 검사로 있으며, 학생 때부터 착실한 불교도이면서 작년에는 힘겹게 수월스님의 발자취를 더듬어서 스님의 수행기를 책으로 펴낸 김진태(金鎭太)씨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알아 낸 준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한다.

그 경판은 은중경(恩重經), 법화경(法華經), 다라니경, 그 밖에 경명을 알수 없는 몇 가지로서, 은중경은 다행히 완전히 보존되어 있고, 법화경과 다리니경은 많은 경판이 소각되어 일부 남았다는 것이다. 그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그것들이 한자, 한글, 범어(산스크리트어)의 세 언어로 된 것들이라고 한다. 이처럼 세 언어로 되어있는 경판이 남아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불교권에서는 신흥사가 유일할 것이라는 그의 설명이다. 제판 연대는 조선초 효종(孝宗)때인 1650년에서 59년 사이이고 완판(完版)수는 2백77판임이 확인되었다. 이 2백77판이 어쩌면 나의 조그마한 애씀의 결과로 그 전쟁에서 회진을 면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신흥사를 방문할 때마다 나의 마음을 뿌듯한 만족을 느낀다.

나의 이 이야기를 들은 어떤 독실한 불교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때, 부처님이 어린 육군 중위 리영희의 모습을 빌어서 나타나 불구덩에서 경판을 건져낸 것이다." 그것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불교적 해석이다. 어쨌든 이것이 나의 젊었을 적의 한 가지(잘한 일)의 추억담이다.


리영희/본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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