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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50년 불교50년-①불교음악

기자명 김민경
  • 기고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현대불교의 의식음악은 범패와 찬불가로 나눌 수있다.

범패가 전통적인 불교음악이라면 찬불가는 불교적 음악정신에 입각한 현대 작곡가들에 의해 작곡된 음악이다.

범패-. 범음, 인도소리, 또는 어산이라고 불리우는 불교음악.사찰에서 재를 올릴 때 부르는 노래. 가곡 판소리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성악곡 중의 하나. 장단과 화성이 없는 단성선율이어서 구전심수를 아직도 최고.최선의 교육방법으로 채택하고 있는, 배우기도 전하기도 까다로운 음악.

이러한 범패의 지난 50년사를 간력하게나마 살펴보려면 일제 강점기의 교계 상황이 먼저 언급될 수 밖에 없다.

두루 알다시피 일제는 조선의 불교를 약화시키기 위해 1911년 6월 사찰령을 반포했다. 그 취지에 따라서 이듬해 말 각본말사법이 제정됐다. 여기서 조선승려의 범패와 작법은 금지되었다. 화청과 법고춤 같은 것을 금한 각본말사법의 시행 이후 불교의식의 핵심인 범패는 당연히 약해져 갔다.

'명치 44년 6월 사찰령이 발포되고 그 취지에 따라 다음해 말에 각본말사법이 제정되자 조선승려의 범패와 승무가 금지되었다. 지금(1929)더러 노승으로 범패를 기억하는 자 있어도 평소 실습하지 않는 까닭에 묘음원전이 왕년과 같을 수없다'(다까하시 도모루 《이조불교》-1929)

그러나 범패는 멸절될 수 없었다. 경만 읽고 범패를 부르지 않는 절에는 재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재가 열리는 한 범패는 그나마의 명맥을 잇게 된다.

당시(1929)불교음악계의 상황을 다까하시 도모루는 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근년까지 경성교회 백련사에 만월이라는 노승이 있었다. 범패승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원래는 경성의 동산과 서산에 각각 만월이 있었고 그 소리가 좋기로는 백중이었다. 그 만월은 곧 서만월이라고 한다.'

품위 높은 의식음악인 범패에서 어장계보는 곧 불교음악사에 다름 아니다. 따로이 악보가 없는 범패에서 어장의 활동상은 곧 불교음악의 활동반경과 성쇠를 읽는 눈금이다.

조선시대 대휘스님은 《범음종보》라는 책에 범패승의 계보를 상세하게 밝혀 놓았다.

국용-응준-혜운-천휘-연청-상환-설호-설계-법민-혜감-현영-유민-유평...

유교숭상의 정치이념 속에서도 맥을 이어온 범패였기에 일제강점기의 범패도 동.서 두 만월스님에 의해 해방 후 근대를 거쳐 현대에까지 전해졌다.

서산 또는 서교로 칭해지던 이만월스님의 제자로서는 범호, 월하, 문제가있었다.

동교 이만월의 제자로는 대원, 벽봉, 완담, 동화, 금운 등이 있었다.

대원스님의 제자로는 운월스님이 있었다. 스승에게 상주권공에서 작법 영산짓소리에 이르기까지 재의식 일체를 배워서 젊어서부터 대어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후계자가 없어 대가 끊겼다. 1970년대말 입적.

벽봉스님의 제자로는 운공, 덕암, 고봉 스님등이 있다. 경기도 양주 태생인 운공스님은 서교인 범호스님에게 훗소리를, 벽봉스님에게 작법, 예수,영산 짓소리를 배웠다. 1973년 송암스님 벽응스님과 함께 인간문화재로 지정 됐다.

덕암스님은 잘 알려져 있듯이 전 태고종 종정을 역임한 스님이다. 벽봉스님에게 안채비를, 범호스님에게 바깥채비를 배웠으나 총무원장과 종정직을 수행하는등 오랫동안 종단일을 맡느라 범패에 나서지 않고 있다.

금운스님의 제자로는 한제은스님이 있었다. 어장의 자리에는 들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봉원사의 이월하스님은 많은 제자를 길러 근대 범음.범패의 중홍조로 추앙받는다.

김운파, 남벽해, 조덕산, 조일파, 최영월, 김화담, 박송암 등 근현대 최고의 어장들을 배출시켰으며 이만동(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스님도 월하스님에게 어산을 배웠다고 한다.

운파스님(1907-1973)은 오랫동안 봉원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월하스님의 전통을 계승했다. 범패에서 가장 어렵다는 짓소리를 다른 어장이 부를때 그옳고 그름을 판단할 정도로 범패전수에 남다른 위치였다고 한다.

벽해스님(1898-1970)도 운파스님과 나란히 당해 최고의 어장으로 활약했지만 송암스님 외엔 따로이 제자를 양성하지 않고 입적했다.

송암스님(1915-)은 경성상업실천과를 졸업한 후 월하스님에게 범패 일체를 배우고 월하스님이 타계한 후에는 벽해스님에게 다시 배웠다. 원래 미성에다가 음악성이 있어 한국 최고의 어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73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후 후학지도와 범패의 원형보존의 남다른 열의를 보여왔다. 후에 송암으로 법호를 바꾸었다.

범호스님의 제자로는 범공, 운공, 추성, 만허, 벽응 등이 있었는데 이들중 범공에 관한 얘기가 유독 많이 전해진다.

서만월에게 안채비소리를 배운후 범호스님에게 훗소리, 작법, 짓소리를 배운 그는 불과 12세때 이미 중강이 되었고 16-17세에 짓소리를 마쳤다. 16세때 구례군수 방모씨의 49재를 당시 돈 오백원이란 거액을 받고 백련사에서 올렸을 때 어렵다는 짓소리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지반지심의 장부를 잘 수행하여 스승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해방 후 환속한 그는 사업을 하는 한편으로 1955년경 국립국악원에서 가곡을 배우기도 했다. 따로이 제자를 키우지는 못했으나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범패를 국립국악원에 녹음해 두었다. 1970년대초 타계했다.

벽응스님은 범호스님의 제자인 추성스님에게 훗소리를, 후에 범호스님에게 직접 25종의 짓소리를 배웠다. 소리가 꿋꿋하고 우람하며 모두 잊어버린 짓소리 삼남태를 기억하여 재생시킨 공로가 있다.

이렇듯 동만월과 서만월로 대표되는 한국의 범패는 해방 이후 꾸준히 그 맥을 잇고 키워왔다.

범패에 관한 문헌으로 동음집이 있다. 여기엔 범패의 구체적인 고저장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범패를 배우는 이의 기억을 돕기 위해 짓소리의 사설만을 적어놓은 일종의 암보집이다.

서양악보로 그려진 오선보나 우리나라 기보법에 의한 악보집이 아니라 하더라도 불교음악의 모습을 비교적 잘 알 수 있도록 상세한 설명을 붙인 유일한 악보집이란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72가지나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던 짓소리는 그러나 남아 전해지는 동음집이 원다 없다보니 겨우 13곡만이 불려지고 있다.

현재 전하는 동음집은 모두 4종으로 운월 소장 1권, 운공 소장 2권, 벽응소장 동음집 1권이 남아있다.

구전으로 전승되고 범패에 대한 문헌과 자료를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은 가곡 판소리와 함께 민족의 3대 성악곡으로 손꼽히던 범패를 차츰 뒤쳐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1960년대 이후 범패는 그런 의미에서 새 전기를 맞게 된다.

서울대학교에 재직중이던 이혜구교수와 그의 제자 한만영교수가 범패의 분석과 실태조사, 연구에 뛰어든 것이다.

한만영교수는 범패연구를 위해 더 어회를 통해 직접 소리를 배웠다. 이중한 어회는 무려 1백일간 계속됐다. 그리고 마침내 1968년 5월 13일부터 16일까지 3박4일간 송암스님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봉원사에서 행한 영산재를 통해 1백42곡의 범패를 채록, 악보화 했다.

이혜구교수는 《한국음악사설》(1963) 《범패의 연혁》(1975)을, 그리고 한만영교수는 범패연구 15년을 결산한 《한국불교음악연구》(1980)을 펴내전인미답의 범패연구사에 한 획을 그었다.


김민경 기자
mkklm@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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