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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가람-⑥공덕산 윤필암

기자명 김장호
  • 기고
  • 입력 2004.08.1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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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산은 오히려 사불산이란 이름으로 더 오래 알려져 왔다. 산 중턱에 놓인 그 사면불 때문이다. 그것은 커다란 반석 위에 바로 선 높이 2.5m에서3.4m에 이르는 장방형 바위 4면에 새겨진 여래상으로서 각기 동서남북을 향하되 동서면의 것은 좌상이고 남북면의 것은 입상이다. 지금은 선각조차 흐릿하게 마모된 상태지만 거기에 관하여 일찍이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한다.

"죽령 동쪽 일벽여리에 우뚝 솟은 산이 있다. 진평왕9(587)년 갑신, 갑자기 하늘에서 반듯한 사면에 모두 여래상을 새긴, 한길이나 되는 큰 바위가 붉은 비단에 싸여 이 산꼭대기에 떨어졌다. 왕이 듣고 거기 거동하여 예배하고 바위곁에 절을 세워 대승사라 이름했다. 그리고 연경을 외우는 비구망명에게 청하여 주지로 삼아 받침돌을 깨끗이 씻어 향불을 끊이지 않았으니 산이름을 역덕산 또는 사불산이라 한다. 그 뒤 비구가 죽어 장사를 지내주자 무덤 위에 연꽃이 피어났다."

물론 글 머리에 보이는 '죽령 동쪽'은 '서쪽'의 잘못이다. 정확하게는 소백산에서 죽령을 딛고 서쪽 속리산으로 향하여 내어닫는 백두대간의 어간에 놓이는 대미산(1,115.1m)에서 남쪽으로 여우목고개(620m)너머로 뻗는 두갈래 지맥이 대하천을 사이하여 서쪽에 운달산(1,097.6m)과 동쪽에 이 산(912.9m)을 일구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끝의 '역덕산'도 물론 '공덕산'의 잘못이다. 이 두가지 잘못은 조선조 숙종 31(1705)년에 지어진 《대승사 사적기》에 이미 지적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산이름은 《삼국유사》에서 보다시피 본디 공덕산이었다고 봄이 마땅하다. 그러나 《세종실록 지리지》가 먼저 "사불산 혹왈 공덕산"이라고 한 것이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등 태반의 고기록들에 그대로 이어지더니, 대승사 일주문에는 아예 '사불산대승사'라 쓰여져 있는 한편 1978년에 새로 지은 사적비에는 또 "사불산은 본시 공덕산"이라 적혀있다.

그러나 내가 그 이름을 사불산 대신 공덕산이라 우기는 까닭은 따로 있다. 그것은 이 절 개산조인 망명비구를 중시하는 까닭이다. 진평왕이 청하여 주지로 살았다는 그는 이웃하는 김용사의 운달조사나 천주사의 무념대사와 달리 한갖 무명의 불도에 지나지 않았으니 권상로선생이 지은 '사불산대승사개산조 망명비구의 비명병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는 본디 상주사람으로 음양을 익혀 화복을 점쳐서 호구지책을 삼고 있었으나, 《묘법연화경》을 즐겨 외우며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으로 오히려 큰스님만 못지 않았다. 하루는 어느 신도집 망자의 제 지내는 자리에 갔는데 모두 곤히 잠든 한밤중에 괴이한 빛이 온 집안에 넘치는지라, 살펴보니 바로 그 비구의 입에서 나는 빛이었다. 먹고 살기는 점술에 의해서일 망정 입으로는 늘 염불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탓이라 했으니 그제사 사람들이 그가 예사 도승이 아님을 깨닫고 그를 숭배하여 대승사 주지로 떠받들었다. 그가 죽어 장사를 지내자 무덤에서 연꽃이 피어났다."

그러자 그의 이름이 망명이 아니다. 그 자신 이름을 드러내기를 꺼렸을뿐아니라 세상사람들도 그것을 들추지 않았고 또 후세 역사마저도 그 이름을 굳이 밝히려 들지않았을 뿐이라는 것이 대강 줄거리이다.

물론 망명이란 이름이 없는 무명이라는 뜻이지만, 그런 그의 끈질긴 정진과 수행이 들어 "하늘에서 내린 그 부처님을 떠받드는 연꽃을 땅에서 피어나게 한"것이다. 진평왕대라면 신라불교도 이미 왕궁중심에서 부터 서서히 민중의 품속으로 옮겨가고 있었던 시절, 기적같은 사면불의 출현에 맞대응하여 중생의 인간적 수련, 그 공덕 쌓기를 드높은 덕목으로 치세우고 있는 망명비구의 설화가 그대로 이 산이름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여기 공덕이란 물론 회심곡에 자주 등장하는 그 월천공덕, 급수공덕 등 그 모든 보시공덕에 대응되는 신앙공덕을 이름하지만 그 뜻은 어디까지나 저향가 풍요에 보이는 "서러운 이승에 공덕 닦으로 오다"라는 바로 그 자비행의 실천에 있었던 것이다.

그 사면불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도 그렇다. 둘러보면 한국의 건국시조 탄생설화들은 크게 세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으니 단군신화같은 천강설과 제주도 삼성혈같은 지용설 그리고 박혁거세 설화같은 난생설이 그것이지만 천강설과 난생설을 복합적으로 수용한 것은 김수로왕 탄생설화이다.

물론 천강설은 북방계로 알려진다. 그러고 보면 그 《삼국유사》기록의 같은 항목에 기술되어 있는 굴불산 사면불이나 그 다음 생의사석미륵은 모두 땅에서 솟아나고 있으니 그것은 난생설과 함께 남방계라 볼 수 있다. 하기야 부처님은 자재로운 화신이니 어디서 출현했든 까닭을 잡을 바 아니랄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 설화의 발생연대와 함께 그 배경풍토까지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니, 여기 사불암설화는 물론 고구려불교가 신라로 전승되는 그 전래선상에서 이루어졌음이 확실한 것이다.

이 산을 오르는 기점은 물론 대승사가 된다. 둘레에는 지금 묘적암, 윤필암, 보현암 등 3암자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워낙은 여기 모두 9암자가 있었다. 대승사에서는 국내 목조탱각 중에서도 대작으로 손꼽히는 것으로 조선조 고종12(1875)년에 부석사 무량수전의 후불탱을 옮겨온 그 목조불탱각(보물제575호)과 함꼐 우부도에 가서 절해야 한다.

그것은 봉화 청량산 내청량사의 삼각우총과 함께 거기 절을 일구느라 깊은 산속까지 돌과 목재를 실어다 나른 소의 고생에 대한 자비심의 발현으로 기억되고 있다. 청량산의소는 뿔이 셋 달렸었다지만 여기 소는 예사 소로되, 아무리 무거운 짐을 실어 날라도 지칠 줄을 모르다가 역사가 끝나고서야 스스로 죽었다는 것이니, 생각하면 망명비구의 공덕에 이 또한 짐승의 공덕이 거기 함께 아우렀던 것
이다.

큰 절에서 북서쪽 5백m 상거에 있는 윤필암은 부드럽게 비탈진 터전에 여유있게 마련되어 오히려 큰 절규모에 못지 않지만 거기 비구니들이 정성들여 가꾼 꽃밭이 더욱 화사하다. 그 서쪽 암봉아래 근년에 세워진 사불전 돌층계를 밟고 올라서서, 벽면 그득한 유리창 너머로 마주 쳐다보는 산마루에 사면불이 그대로 한눈에 든다. 두 손을 포개고 눈을 감으면 망명비구의 공덕심이 저절로 눈꺼풀 위에 연꽃으로 피어난다.


김장호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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