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연재를 마치며
18. 연재를 마치며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8.12.24 16:44
  • 호수 147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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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변화로 시대 굴곡 함께한 유연함이 2300년 이어진 법등의 비밀

기원전 3세기 마힌다 스님 전법 후
인도와 활발히 교류하며 변화 수용
동남아 불교 전파의 교두보 역할도

왕국 흥망성쇠에 교단 운명도 좌우
수차례 계맥 끊기며 비구니는 소멸
태국·미얀마 등지서 계맥 이어오며
수차례 승단 복원 정통성에 의문도
북방서 계받은 비구니승단 복원엔
여전히 이견 있지만 역사적 의미 커

450여년 식민역사 속 법등 계승은
차라리 경이로운 신심의 결정체
우리와 다름을 틀렸다 하지말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 배워야
오늘날의 스라랑카불교는 무수한 역사의 질곡을 건너며 이어져 왔다. 사진은 법보신문이 지난 1~3월 3차례 진행한 스리랑카 성지순례에 동참한 불자들의 눈에 비친 스리랑카불교의 모습이다. 우리와 다르지만 그 속에 살아 숨쉬는 신심은 이 땅에서 법등이 꺼진 적 없음을 말해준다.
오늘날의 스라랑카불교는 무수한 역사의 질곡을 건너며 이어져 왔다. 사진은 법보신문이 지난 1~3월 3차례 진행한 스리랑카 성지순례에 동참한 불자들의 눈에 비친 스리랑카불교의 모습이다. 우리와 다르지만 그 속에 살아 숨쉬는 신심은 이 땅에서 법등이 꺼진 적 없음을 말해준다.

스리랑카 콜롬보공항과 우리나라 인천공항을 연결하는 직항이 개설된 것은 2013년이다. 그 이전에는 싱가포르, 방콕, 홍콩 등을 경유했다. 인천공항을 출발, 아무리 서둘러도 10시간 이상 가야하는 머나먼 나라였다. 직항이 개설된 이후 스리랑카와의 교류는 빠르게 증가했다. 동시에 스리랑카의 불교유적을 찾아가는 불자들의 발걸음도 가파르게 늘어났다.

콜롬보공항에서 근무하고 있는 우리나라 항공사의 한 관계자는 “스리랑카를 찾아오는 한국인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불자들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일반관광객이 아닌 불자들도 스리랑카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스리랑카의 수많은 문화유적으로부터 감동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조언했다. 물론 그의 고민은 성지순례객이든 관광객이든 스리랑카를 찾아오는 한국인들이 꾸준히 늘어 항공사의 영업실적을 유지해야하는 입장에서 ‘불교국가로 알려진 스리랑카의 문화유산이 얼마나 매력 있는 상품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평가다. 하지만 이 시각이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의 시선에 비춰지는 스리랑카의 모습이라는 점에는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인도양의 보석’이라는 표현보다 ‘남방불교의 종주국’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살아있는 땅’이라는 수식어가 스리랑카사람들에게는 더 큰 자긍심이다. 하지만 과연 스리랑카불교의 현실은 이와 같은 수식어에 합당한 모습을 갖고 있는가. 연재 시작 때부터 품었던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스리랑카 교단의 변천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쇼카왕의 아들인 마힌다 스님에 의해 싱할라왕국에 불교가 전래되고 승단이 형성된 것은 기원전 3세기다. 그리고 기원전후 승단은 상좌부를 표방하는 마하위하라파, 대승불교와의 교류를 받아들인 아브하야기리위하라파로 분열됐다. 스리랑카의 역사서들은 이러한 분열이 싱할라왕국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여기에는 분명 외부요인도 작용했다. 기원전후 인도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부파불교의 영향이 싱할라왕국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는 초기불교의 계율준수를 고집한 마하위하라파와 달리 아브하야기리위하라파가 인도에서 발생한 다양한 부파와 대승의 가르침까지 수용했다는 점에서 인도 불교의 변천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스리랑카는 이같이 인도와의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는 동시에 동남아시아 불교전래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붓다고사와 같은 대학승들이 스리랑카를 거쳐 동남아시아로 법등을 전했고 중국의 법현이나 의정 스님 등도 구법의 길에 스리랑카를 거쳐 갔다.

스리랑카불교는 싱할라왕국의 흥망성쇠와 함께했다. 외세의 침략을 받아 국운이 기울면 교세 또한 위축됐다. 하지만 국가 부흥기를 열었던 국왕들은 가장 먼저 교단을 정비하고 승단을 확장시키며 국민통합과 통치의 이념으로 불교를 앞장세웠다.

이러한 현상은 싱할라왕국의 마지막 전성기로 불리는 폴론나루와 시대 이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왕국이 분열되고 통치자의 정통성이 약화되는 정치상황에서 국왕들은 불교를 통해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발버둥 쳤다.

13세기 남인도 판디아왕국의 지배를 받으며 싱할라왕국은 두 번째 수도였던 폴론나루와에서의 화려했던 중흥기를 마감한다. 동시에 계맥도 단절된다. 왕실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승단은 자구책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졌음이다. 다행히 13세기 싱할라왕조의 후손인 위자야바후 3세가 세력을 구축하며 계맥도 이어진다. 이후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지금의 태국인 씨암으로부터 계맥을 전수받아 승단은 잠시나마 확대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15세기에는 미얀마 바간왕조의 뒤를 이은 페구의 단마제티 왕이 스리랑카로 스님들을 파견해 계맥을 전수받을 정도로 스리랑카불교는 재건돼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한다. 포르투갈의 침입과 전대미문의 불교 박해자로 손꼽히는 라자싱하1세의 폐불로 또다시 쇠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굴곡진 역사를 겪은 스리랑카불교는 1753년 태국의 우팔리장로가 스리랑카를 방문, 계맥을 전승하면 성립된 씨암니까야를 필두로 1802년 버마왕국으로부터 계맥을 이은 아마라푸라니까야, 1864년 역시 마얀아의 라트나푼나위하라에서 계맥을 이은 라만냐니까야의 3개 승단을 형성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스리랑카에서 전래된 계맥이 동남아시아 여러 불교국가에 정착한 후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와 쇠퇴해진 싱할라왕국의 교단을 복원하는 불씨가 된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과연 스리랑카불교계가 오늘날 남방불교의 종주국이라 불릴 수 있는 정통성을 간직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학계에서 거론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논쟁은 학계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승가가 절멸될 위기를 수없이 겪으며 오늘날까지 법등을 이어오고 있는 스리랑카불교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정통성이라는 잣대 속에 순혈주의의 허상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11세기 초 절멸된 스리랑카 비구니승단이 20세기말 재건된 역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의미를 던진다.

남인도 촐라왕국의 침입을 받아 신성도시 아누라다푸라가 함락되면서 13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온 싱할라왕국의 첫 수도는 폐허로 변했다. 이 과정에서 단 한 명의 비구니스님도 살아남지 못하는 스리랑카불교 최고의 비극이 벌어진다. 이후 싱할라왕국은 수도를 폴론나루와로 옮기고 미얀마로부터 계맥을 이어 승단을 복원한다. 하지만 이때에도 비구니계맥은 복원되지 못했다. 여성수행자들은 삭발하고 계율을 지키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했지만 비구니계를 받지 못한 사미니에 불과했다. 승가의 상징인 황색가사 대신 흰색 옷을 걸치고 탁발이 아닌 비구사찰의 지원을 받아 생활해야 했다. 이런 스리랑카의 여성수행자들은 20세기 말 모험을 감행했다. 1996년 10월 인도의 사르나트에서 열린 비구니계 전계식에 동참한 것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대만 등 비구니계맥이 전수되고 있는 대승불교계의 비구니스님들이 상좌부불교계의 사미니들에게 구족계를 전했다. 이때 스리랑카의 사미니들도 계를 받고 비구니가 되었다. 인도, 태국, 미얀마, 티베트 등 여러 나라에 비구니계가 전해졌지만 자국의 교단으로부터 인정받은 곳은 스리랑카가 유일했다. 일부 원로비구들의 이견도 있었지만 스리랑카불교계는 비구니계맥의 복원을 인정했다. 이는 수많은 전쟁의 역사를 겪으며 승단이 파괴되고 복원되는 역사를 되풀이 해온 스리랑카불교계가 지닌 역사적 경험의 결과일 것이다. 혹은 대승불교나 상좌부불교 모두 석가모니부처님, 그 한 분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세계일화에 대한 굳은 믿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리랑카에 비구니승단이 완전히 정착하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과제들이 남아있지만 재건을 향한 첫 걸음을 성공적으로 내디딘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그 첫 걸음이 머지않아 상좌부불교의 역사에 또 하나의 페이지를 만들어 갈 것이라 기대한다.

불교는 2600여년 전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인도에서 불교는 더 이상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다. 나란다불교대학과 비크라마쉴라사원이 이슬람교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13세기 이후 법향은 더 이상 피어오르지 못했다. 인도불교는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을 거쳐 동아시아로 전해졌고 스리랑카를 거쳐 동남아시아로 퍼져나갔다. 그런가 하면 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각각의 자리에서 불교는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섭렵하고 시대의 질문에 대답하며 성장하고 뿌리내렸다. 때로는 가지가 꺾이고 뿌리가 잘리기도 했지만 인류에게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히 사라진 시대는 없었다.

스리랑카불교 또한 찬란히 타오르기도 했고 꺼질 듯 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무수한 위기를 넘기며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화석화된 모습을 고집하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성장하고 변화하며 시대의 굴곡을 함께 넘어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스리랑카불교에서 보이는 힌두교의 흔적들은 대립의 역사가 남긴 상처이자 공존의 지혜가 빚어낸 진주이다. 그 과정에서 대승불교 대신 상좌부불교를 선택한 것은 오직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선택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어오고 있는 대승불교의 모습과 다르다고 해서 옳고 그름을 논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인도가 흘린 한 방울 눈물’이라 불릴 만큼 작은 섬, 거대한 인도의 역사가 빚어내는 회오리에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했던 싱할라왕국, 그리고 450여년 유럽열강의 식민지배아래 살아야했던 이 나라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지혜와 유연함의 결실이었다. 그 역사와 견고한 신심의 발자취는 차라리 경이로움이다.

2300여년 이 작은 섬에서 변함없이 빛나고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라자그리하 칠엽굴에서 천둥처럼 울려 퍼지던 아난다의 목소리이자 오백아라한이 한 목소리로 밝힌 지혜의 등불이었다. 그 법등에 경배 올리며 연재를 마친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70호 / 2018년 1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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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2018-12-25 18:30:59
8세기 전후 남방불교는 단절된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