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법장보살의 발원과 나무아미타불
4. 법장보살의 발원과 나무아미타불
  • 고명석
  • 승인 2019.02.19 10:00
  • 호수 147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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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보살은 왜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했을까

탐욕에 몸부림치는 가여운 중생
자기 참회·비움 없인 행복 요원
옛 나를 죽인 자리 자비 채워야
모든 존재 부처님으로 섬기게 돼
법장보살의 48대원 중 제18원은 자신의 철저한 절망과 무력함에 아미타부처님이 들어와 그 생명으로 살아가리라는 원이기 때문에 가치가 남다르다. 국보 제27호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법장보살의 48대원 중 제18원은 자신의 철저한 절망과 무력함에 아미타부처님이 들어와 그 생명으로 살아가리라는 원이기 때문에 가치가 남다르다. 국보 제27호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나는 고정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실체는 없다. 나는 무아다. 이러한 무아의 가르침은 불교의 불교다움을 보여주는 말이요, 현대철학과 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중요한 키워드라 할 수 있다. 무아와 공, 그 비어 있음과 무규정성(無規定性)은 모든 생명의 자유로움과 창조의 근거이자 이타적 삶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에 기운 욕망은 자아에 집중한다. 사실 유발 하라리의 말대로 ‘자아’야말로 우리 정신의 복잡한 매커니즘이 끊임없이 지어내고 업데이트하고 재작성하는 허구적 이야기일 뿐이지만 말이다. 

자아는 자기중심적으로 허구의 삶을 확장하고 타인을 압제하려 한다. 거기서 비극은 탄생한다. 나치 독일의 유태인 홀로코스트, 일제의 난징 대학살,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슬람의 미국 쌍둥이 빌딩 9·11 테러. 이러한 끔찍한 재앙이 내가 벌인 일이 아니라고 애써 위로하지는 말자. 나 자신을 보더라도 선을 도모하며 착하게 살아야지 다짐하면서도 상대방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기도 하고 괴로움에 빠뜨려 비통한 현실과 마주하지 않았던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또 다시 되풀이하는 나 자신의 이중성과 나약함과 간교함에 무력해질 때도 있지 않던가.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리저리 춤을 추며 ‘가짜뉴스’를 양산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서글프지 아니한가. 

이렇게 보면 죄악으로 가득한 간특한 인간이요,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몸부림치는 가여운 인생이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타산적 이성을 지닌 이상 이러한 자아 중심성을 떠나긴 어렵다. 그 결과는 자기 붕괴요 자기 파탄이다. 모순으로 가득 찬 이성의 분열이다. 이 지점에서 종교적 각성을 일깨우며 다가오는 것이 철저한 참회다. 

참회는 교토학파의 다나베 하지메가 말하듯이 자기 몰락과 자기 포기이며 자기에 대한 죽음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절대무(무량한 대생명인 아미타부처)에게 자신을 철저하게 내 맡기고 내가 죽어 그 부처님의 대자비에 힘입어 부처님 생명으로 살아나는 부단한 죽음, 즉 부활이다. 기독교를 세계종교로 터 닦은 바울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라는 말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다. 아미타부처님의 생명과 힘으로 내가 다시 사는 길을 연 성인이 법장보살이다. 

법장보살은 일국의 왕이었다. 그는 세자재불(世自在佛)로부터 법문을 듣고 발심 출가하여 원을 세워 수행한 결과 청정한 세계를 향유한다. 부처님은 그 수행의 결과를 널리 알려 다른 사람들 또한 그와 같이 원을 세울 수 있도록 한다. 그 내용이 법장보살의 48대원이다. 법장보살은 원을 성취하여 부처를 이루어 극락정토를 건설한다. 그 부처님이 바로 아미타부처님이다. 48대원 중 우리가 눈 여겨 봐야할 점은 다음의 세 가지다.

제18원 “만약 제가 부처를 이룰 때 시방의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원해 저의 국토에 태어나고자 저의 이름을 열 번을 불러도 태어날 수 없다면, 저는 결단코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다. 단 오역죄를 지었거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하겠습니다.”  

제19원 “만약 제가 부처를 이룰 때 시방의 중생들이 보리심을 일으켜 갖가지 공덕을 닦고 저의 국토에 태어나고자 온 마음 기울여 발원하였건만, 그들이 목숨을 마칠 때에 제가 대중에 둘러싸여 그 사람 앞에 나타나지 못한다면 저는 결단코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다.”

제20원 “만약 내가 부처를 이룰 때 시방의 중생들이 제 이름을 듣고 저의 국토를 생각하여 수다한 공덕의 근본을 심고,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하여 나의 국토에 태어나려 했건만, 이를 성취하지 못한다면, 저는 결단코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다.”

법장보살의 48대원을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본원 중의 본원이 제18원이다. 그 이유를 말해보련다. 사람들은 누군가 그리울 때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내가 무력하여 많이 힘들고 외로울 때 그 사람을 간절히 부른다. 그 사람은 고립무원의 내 곁으로 다가와 나의 아픔과 절망, 그리움을 만져주고 치유해 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나를 구원해 주는 그 님의 이름은 아미타불이다. 18원의 가치는 내 자신의 철저한 절망, 그 나의 무력함에 아미타부처님이 들어와 그 생명으로 살아가리라는 것에 있다.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범부중생으로서의 인간이란 아상이 가득하며, 허약하고, 배신을 밥 먹듯 하며, 때론 악마로 돌변한다. 그러기에 나 자신의 철저한 참회와 자기 비움이 따르지 않는다면 지극한 행복과 평화는 요원하다. 반면 자기 부정 속에서 옛 자기가 죽고 부처님의 대자비와 큰 생명이 내 안에 가득해져 초월적 이성으로 다시 산다. 그것은 나의 부정을 매개로 부처님의 생명이 내 속에서 공유(空有)로 되살아난 중도적 삶이기도 하다. 그것은 내가 자립할지언정 부처님 생명에 근거하여 타자에게 의존하는 삶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상대에게 바치며 그 생명에게 다가가 그의 구원이 되며 사랑이 된다. 내가 보살로서 그를 부처님 생명으로 이끌면 그는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자리를 다 내어주며 부처님 생명을 온통 받아들인다. 그렇게 다시 되살아난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보살이 되어 그를 깨우치고 이끌며 그와 함께 부처님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섬기는 일이기도 하다. 

절대 타력을 강조하는 정토진종에서는 타력염불을 매개로 하여 자신이 닦은 갖가지 공덕(제19원)과 회향(제20원)도 참회를 통한 자기 부정과 아미타불을 받아들임 없이는 정토의 건설이나 왕생은 불가능하다고 다나베 하지메는 말한다. 나의 지극 지성한 행위도, 타인을 위한 보은과 감사의 행위도, 나의 공덕을 다른 모든 존재들에게 돌리는 회향도, 거기에 내가 한다는 자의식이 끼어 있으면 그것은 불완전하다. 오로지 나를 철저히 무로 돌리는 무아적 행위, 아미타 부처님에 절대 귀의하며 살아가는 함이 없는 함으로서의 서원과 행위야말로 지금 이 순간 우리를 불국정토로 이끌며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꾼다. 법장보살은 48원을 간추려 게송으로 읊는다. 다음은 그 몇 구절이다.

“제가 세운 이 서원은 세상을 뛰어 넘어/반드시 위없는 도에 이르리라.
이 서원이 원만히 구족되지 않는다면/결단코 부처되지 않으리라.
제가 한량없는 오랜 세월 동안/하염없이 나누는 사람이 되지 못하여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하지 못한다면/결단코 부처되지 않으리라.”

고명석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 kmss60@naver.com

 

[1477 / 2019년 2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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