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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변산 능가산 부사의방

진표 율사 치열한 구도행 서려있는 한국 미륵신앙 진원지

한국 미륵신앙 만들어낸 진표 스님
쌀 한줌으로 연명하며 치열한 정진
구도 끝에 지장·미륵에게 계 받아

민중 원력 담은 금산사 미륵전 조성
백제 유민 헛헛한 마음 달래는 희망
전쟁으로 피폐해진 삼국 백성 구원

민중 아픔 어루만지는 교화 삶으로
한국의 독특한 신앙형태 만들어내

절벽 중간 작은 공간인 부사의방. 능선에서 20여미터 밧줄을 타고 내려가면 나오는 이곳에서 진표 스님은 무릎과 팔뚝이 부서질 정도로 수행하고 지장과 미륵보살을 만났다.

구도의 길은 멀고 험하다. 있는 길을 가는 경우도 있지만 없는 길을 만들어 가는 경우도 많다. 그 길은 정신적인 길일 수도 있고 물리적인 길일 수도 있다. 금산사를 개창한 진표 스님(718~?)의 구도는 두 가지 길이 꽉 막힌 곳에서 시작됐다. 구도를 위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정신이 그러했고, 구도 여정 또한 길이 끊긴 천 길 낭떠러지 중간의 작은 공간에서 시작됐다. 안락함을 버리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나아가 가장 높은 곳의 법을 구했던 치열한 구도의 삶. 특히 진표 스님의 삶은 흐릿한 역사의 흔적 속에서도 유독 오늘인 양 반짝거리며 가슴 속 불성을 일렁이게 한다.

한국불교에 있어 험한 수행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이구동성으로 지목하는 곳이 있다. 변산 능가산의 부사의방이다. 그곳에 가봤다는 이는 거의 없다. 어디서 들어봤다거나, 책에서 봤다는 게 대부분이다. 문헌상에 나와 있긴 하지만 등산로가 없어 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알려지지 않아 더욱더 성스러운 곳. 이곳이 바로 부사의방이다.

능가(楞迦)산은 ‘험해서 오르기 어려운 산’이며 부사의(不思議)는 ‘세간의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 역사에 있어 질긴 생명력을 가진 민중신앙이 미륵신앙이다. 그 미륵신앙의 정점에 진표 스님이 있다. 부사의방은 바로 그 진표 스님이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고행 끝에 미륵과 지장보살을 만났다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은 한국 미륵신앙의 시원과도 같은 곳이다. 미륵신앙은 이 땅의 민초들의 핍박을 받을 때, 또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 그때마다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그 질긴 생명력은 지금도 살아남아 불자들의 가슴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부사의방의 위치는 고려시대 이규보(1168~1241)가 쓴 ‘동국이상국집’ 23권 ‘남행월일기’에서 찾을 수 있다. ‘남행월일기’는 이규보가 전주에서 2년 동안 벼슬을 살 때 전북 지역 여러 명승지를 답사하고 느낀 감회를 간추린 일기다. 여기에는 이규보가 부안 소래사(현 내소사)를 들른 다음 부사의방을 답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부사의방장이란 곳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서 구경했는데, 그 높고 험함이 원효 방장의 1만배였고 높이 100척쯤 되는 나무 사다리가 곧게 절벽에 걸쳐 있었다. 3면이 모두 위험한 골짜기라 몸을 돌려 계단을 하나씩 딛고 내려가야만 방에 이를 수가 있었다. 한 발만 헛디디면 다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부사의방은 마천대(摩天臺) 밑 절벽 중간에 있다. 마천대는 변산의 최고봉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지금은 의상봉으로 불리고 있다. 현재 의상봉 정상은 공군 부대가 차지하고 있다. 부사의방은 이 부대 뒤편에 숨어있는데 정상 8부 능선쯤에서 내려가야 한다.

5월12일, 풀과 나무로 뒤덮여 사람이 다닌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길을 더듬어 부사의방을 찾아갔다. 이규보는 100척의 나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지만 지금은 그가 말한 나무 사다리는 없다. 대신 20여 미터가 넘는 굵직한 밧줄을 타고 내려간다. 그런데 그 줄도 외줄로 덩그러니 놓여 있어 위험하기는 매한가지다. 발끝 하나 디딜 곳 없이 대롱대롱 매달려 내려가면 마치 깎아지른 듯한 절벽 귀퉁이에 두세 평의 공간이 나온다. 부사의방이다. 한 사람이 겨우 앉았다 누웠다 할 정도의 공간이다. 한 발짝만 나아가면 그 아래로는 낭떠러지인 이곳에 현재 기왓장 몇 조각이 바닥에 굴러다닐 뿐 옛글에 나오는 집도, 진표 스님의 진영도 없다. 부사의방이 언제 폐사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국전쟁 때 불타 버렸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진표 스님이 부사의방에 온 것은 27세 청년 때였다. 김제에서 태어난 스님은 사냥하다 깨우침을 얻고 출가했다. 한 번은 친구들과 개구리 여러 마리를 잡아 버드나무에 꿰었다가 개구리를 물속에 내팽개친 일이 있었다. 다음 해 그 근처를 갔을 때 어디선가 개구리가 구슬피 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지난해 꿰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개구리였다. 스님은 순간 무심코 한 행동으로 인해 다른 생명이 헤어나기 어려운 고통을 받은 데 대한 깊은 충격과 자책감에 빠졌다. 생명에 대해 고뇌하던 스님은 다른 생명에게 고통을 주던 중생에서 벗어나 다른 생명을 고통에서 구제해줄 것을 서원하며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10여년 간 운수행각을 한 스님은 27세 되던 경덕왕 19년(760) 변산의 낭떠러지로 향했다. 목숨을 걸지 않는 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움푹 파인 부사의방, 한 발짝만 잘못 내디디면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그곳은 죽을 각오로 불꽃 튀는 삶과 마주할 수 있는 수행처였다.

진표 스님은 부사의방에서 무릎과 팔뚝이 부서질 정도로 수행했다고 한다. 스님은 한 줌 찐 쌀로 하루를 연명해가며 미륵과 지장 두 보살에게 수기를 받겠다며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어떤 기별도 없었다. 끝 모를 절망에 빠진 스님은 결국 절벽으로 몸을 던졌다. 그야말로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절망의 밑바닥에 희망이 있었다.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떨어지는 진표 스님을 절벽에서 받아 올린 것이다. 확신과 용기를 얻은 스님은 다시 큰 원을 발하며 목숨을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정진을 시작했다. 부사의방으로 들어온 이상 진리를 위해서는 목숨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다는 서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산사 미륵전에 모셔저 있는 미륵불.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 두려움은 목숨을 건 간절함 앞에 힘을 잃었다. 두터운 업장과 식을 줄 모르고 꿈틀대는 욕망을 다 버렸다. 몸과 마음을 부처님께 바치기로 한 스님은 거친 돌바닥에 밤낮으로 쉬지 않고 오체투지로 참회했다. 팔꿈치와 무릎이 온전할 리 없었다. 피가 뚝뚝 흐르더니 3일 만에 팔다리의 뼈가 부러져 너덜너덜해졌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7일째 되던 밤, 지장보살이 나타나 스님의 몸을 전과 같이 해주었다. 그러나 스님은 끊임없이 참회의 눈물로 다시 절을 이어갔다. 21일째 되던 날, 마음의 눈이 열리면서 마침내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을 만날 수 있었다. 지장보살은 진표 스님에게 계를 주었고 미륵보살은 수기와 함께 189개의 간자를 손에 쥐여줬다. 죽음의 문턱을 수차례 넘나든 이후에야 비로소 지혜의 안목이 열린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이다.

진표 스님이 부사의방에 온 배경에는 깨달음을 얻겠다는 종교적 열정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사의방이 위치한 변산 지역은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던 백제 저항군들이 항전하다 몰살당한 한 맺힌 곳이었다. 처절했던 당시 상황과 망국의 회한을 피부로 느낀 20대 청년 진표 스님은 누구보다도 백제의 한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는 간절함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스님이 부사의방에서 내려오자 수많은 민중이 열렬히 환호했다. 머리를 풀어 진흙을 덮고 옷을 벗어 길에 깔았다. 아끼는 담요를 펴 놓고 발을 밟게 했을 정도로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스님은 민중의 원력이 담긴 부처님을 모시기로 했다. 미륵불을 조성할 때면 석재나 목재로 사람 크기로 조성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스님은 금산사 미륵전을 조성하면서 33척 높이의 철불을 모셨다. 당시 부처님을 모시기 위해 호족들은 무기를 가져오고 농민들은 농기구를 녹여 불상조성에 참여했다. 미륵부처님은 고통받는 민중들의 부처님이었다. 그래서 더욱 의미가 컸다.

스님은 그렇게 금산사에서 자애로운 미륵불의 화신이 돼 백제 유민들의 한을 어루만졌다. 이는 신라에 패망한 이후 갈 곳 잃고 떠돌던 백제 유민들의 헛헛한 마음을 달래는 희망이었을 뿐 아니라 전쟁으로 심성이 피폐해진 삼국 백성들에게 구원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스님은 수많은 법회를 통해 평생 민중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교화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끝없는 참회로 미륵하생을 바라는 새로운 형태의 신앙을 만들어냈다.

그에 의해 본격화된 미륵사상은 통일신라시대부터 현대의 민중불교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때로는 부패와 탐욕의 세상을 뒤엎는 사상적 이념이 되기도 했다. 특히 진표 스님 자신과 그 제자들에 의해 중창되고 세워진 금산사, 법주사, 동화사는 1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법등을 치켜들고 수많은 사람을 진리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진표 스님은 통일신라 때 태어나고 활동했던 인물이지만 오히려 ‘백제인’으로 많이 알려졌다. 멸망해버린 백제지역 출신에다가 평생 권력과 명예를 멀리하고 늘 굶주리고 소외받는 유민들의 곁에서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었다. 

성불로 나아가는 백척간두의 길에서 한 발 내딛지 못하면 진리를 구할 수 없고, 깎아지른 절벽에서 잡고 있는 손을 놓아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법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한계를 돌파한 진표 스님, 한없는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도 홀로 앞으로 나아간 스님의 구도열정은 지금도 변산 능가산에서 그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변산=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490호 / 2019년 5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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