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법성게’ 제29구: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41. ‘법성게’ 제29구: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 해주 스님
  • 승인 2019.08.27 11:04
  • 호수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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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 증득한 자리가 실제이고 중도, 모든 극단이 다 무측(無側) 중도

중도는 양극단 여읜 수행방편
부처님 재세 당시부터 중요시

중도는 두 변이 원융한 것
일체가 무분별 무주법성중도

열반의 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일체를 섭수하는 것이야 말로
중도의 자리 앉은 것임을 보여

구경 증득해 본제에 돌아감이
궁좌실제중도상의 참 의미이니
이것이 바로 여래출현의 본뜻

의상 스님은 수행을 통해 얻는 이익 가운데 “마침내 실제의 중도 자리에 앉는다”는 것을 들고 있다. ‘법성게’ 제29구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이다.

중도는 석가모니 부처님 재세 당시부터 양극단을 여읜 일관된 수행방편으로 중요시되어 왔다. ‘일승법계도’에서는 중도자리가 수행방편에서 더 나아가 수행의 결과, 법성을 증득한 실제의 열반 자리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 “궁좌실제중도상”에 대한 의상 스님의 법문을 보자.

‘실제(實際)’란 법성을 끝까지 다하기 때문이다. 
‘중도(中道)’란 두 변을 원융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는다[坐床]’란 일체를 섭수하기 때문이다. 법계의 열 가지 열반의 광대한 보배 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일체를 섭수하므로 ‘자리에 앉는다’라고 이름한 것이다. ‘보배’란 귀하기 때문이며, ‘자리[床]’란 곧 섭수하여 지니는 뜻인 까닭이다. ‘열 가지 열반’은 아래 경의 ‘이세간품’에서 설한 것과 같다.(일승법계도)

이처럼 법성을 증득한 자리가 실제이고 중도이며, 중도는 두 변이 원융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실제의 중도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일체를 다 섭수하여 지니는 것이다. 이 중도자리는 법계의 열 가지 열반의 자리이니, ‘이세간품’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세간품’에서는 부처님께서 모든 불사(佛事)를 마치시고 열 가지 뜻이 있어서 대반열반(大般涅槃)을 시현하신다고 한다. 즉 ‘① 일체 행(行)이 다 무상함 ② 일체 유위법이 편안[安隱]하지 않음 ③반열반이 가장 안온함 ④ 반열반이 일체 두려움을 멀리 여의었음 ⑤ 색신이 무상한 법임을 밝혀 청정한 법신에 머무르기를 구하게 함 ⑥ 무상의 힘은 강해서 되돌릴 수 없음 ⑦ 유위법은 좋아함을 따라 행해지지 않으며 자재롭지 못함 ⑧ 삼계의 법이 다 견고하지 않음 ⑨ 반열반이 가장 진실하며 깨뜨릴 수 없음 ⑩ 반열반이 생사를 멀리 여의어 일어나지도 멸하지도 않음’ 등, 이러한 열 가지 이치를 밝히기 위해 부처님께서 반열반을 시현하신다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열반은 항상하고 안온하고 두려움 없고, 청정한 법신이고 자재하고 견고하며 진실하고 생멸이 없다. 의상 스님은 이러한 열반의 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일체를 섭수하는 것이 중도의 자리에 앉는 것임을 보이고 있다. 

중도란 양 극단을 떠나기 때문에 중도라 하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극단을 기준으로 하여 다 중도인 것이다. 중도는 두 변이 원융하니 두 변이 없고, 일체를 다 섭수하여 지닌다. 이러한 중도는 하나를 들면 일체가 다 따라와 옆에 아무것도 없는 무측의 중도[無側中道]라 할 수 있다. ‘대기’에서도 중도의 뜻이 듦을 따라 무측인 까닭이라고 한다. 

의상 스님은 이러한 중도를 또한 범부의 몸과 마음에 바탕하여 무분별이며 무주인 법성중도로 설하기도 한다. 중도란 지정각세간·중생세간·기세간의 세 가지 세간이 자기의 몸과 마음이 되어서, 한 물건도 몸과 마음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고 ‘궁좌’란 십세에 상응하고 법계에 응하여 들어맞는 까닭이다.(법융기) 일승의 구경인 참된 근원에 완전히 도달하는 것이다(진수기)

균여 스님도 ‘원통기’에서 “궁좌실제중도상”의 중도를 ‘무주법성중도(無住法性中道)’라 이름하고, ‘궁극적으로 실제의 중도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이 법계의 궁극적인 자리에 들어맞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일승법계도’에 보이는 중도설을 다음의 일곱 가지 중도[七重中道]로 요약하고, 그 전체를 이 무주법성의 중도로 총칭하고 있다. 
 

김제 귀신사 대적광전 보물 제826호 17세기.    

①인과양위 무주중도(因果兩位 無住中道)이다. 이는 ‘반시’에서 시작과 끝의 두 글자를 한가운데에 두고, 그 이유를 “원인과 결과의 두 자리가 법성가의 진실한 덕용이며 성이 중도에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일승법계도)라고 한 내용에 해당한다. 인·과가 같지 않지만 무분별하여 머무름이 없는 중도이다. 
②일승삼승 무이중도(一乘三乘 無二中道)이다. 의상 스님은 일체 연으로 생겨난 법을 육상으로 설명하면서, 총상인 원교일승와 별상인 삼승이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니, 항상 중도에 있다고 한다. 일승과 삼승이 둘이 아닌 중도이다.
③증교양법 구래중도(證敎兩法 舊來中道)이다.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만약 정(情)으로 말한다면 항상 두 변에 있게 되나, 만약 이법(理)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예부터 중도이며 하나로서 무분별이라 한다.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하나로서 무분별인 중도이다.
④정의정설 본래중도(正義正說 本來中道)이다. 모든 법이 본래 중도에 있으니, 중도는 말과 말 아닌 것에 통한다고 한다. 바른 뜻과 바른 교설이 하나로서 무분별인 중도이다.
⑤이사체용 원융중도(理事體用 圓融中道)이다.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여 무분별하고 체와 용이 원융하여 항상 중도에 있다. 이·사와 체·용이 무분별인 중도이다. 
⑥일다생불생 무이중도(一多生不生 無二中道)이다. 하나와 일체는 자성이 없고 연으로 이루어진[緣成] 까닭에 하나이고 일체이다. 일체 연으로 생겨난 법은 무자성인 까닭에 자재하지 않고, 자재하지 않으므로 생(生)하되 불생(不生)의 생이다. 불생의 생은 곧 부주의 뜻이고 부주의 뜻은 곧 중도이다. 중도의 뜻은 생불생에 통하고 무분별이다. 무분별법은 자성을 고수하지 않으므로 연을 따르는 것이 다함이 없고 머무름이 없으므로, 하나 가운데 열이고 열 가운데 하나로서 서로 용납하여 걸림이 없다. 하나와 열(十, 多, 一切)이 둘이 아니고 생과 불생이 무분별인 중도이다.
⑦일체법무주 법성중도(一切法無住 法性中道)이다. ‘일승법계도’에서는 발문에서, ‘모든 연(緣)은 전도된 마음[顛倒心]에서 오며 전도된 마음은 무시무명(無始無明)에서 오고, 무시무명은 여여(如如)로부터 온다. 여여는 자기 법성[自法性]에 있고 법성은 무분별로 상을 삼는다. 그러므로 일체 모든 것은 중도에 있어서 무분별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시(詩)에서 법성원융무이상 내지 구래부동명위불이라 하니, 뜻이 여기에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일체법이 곧 그 자체로서 중도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균여 스님은 이와 같은 칠중의 중도가 일관되게 무분별이며 무주법성의 중도로 통일된다고 하여 무주법성중도로 포섭한 것이다. 

‘삼대기’에서도 원인과 결과의 양위가 같은 자리인 것은 모든 법이 각각 스스로 여여한 지위에 머물러 본래 움직이지 않음을 보인 것이고, 필요에 따라서 자재하니 성(性)이 중도에 있기 때문이며(대기), 만약 일승의 진실한 뜻에 의하면 원인과 결과가 원융하여 법성의 덕용이 다만 중도에 있으므로 앞과 뒤가 없다고 한다.(법융기) 

‘대기’에서는 또 육상의 뜻을 쓰면 일승별교가 주(主)가 되고 삼승별교가 권속으로서 반(伴)이니 주반구족이 중도의 뜻이라 하고, “궁좌실제중도상”이란 인위(因位)에서 배움이 다하여 과위(果位)에 이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제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17세기 전반.

아무튼 ‘일승법계도’에서 전반적으로 설해지고 있는 중도의 뜻을 의상 스님이 “궁좌실제중도상”으로 모두 거둔다고 하겠으니, 실제중도는 무측중도이고 무분별의 무주법성중도인 것이다. 

‘법계도주’에서는 이 “궁좌실제중도상”의 7자를 일단 각각 따로 해석한다. ‘궁(窮)’은 깊이 법성의 바다에 들어가 마침내 구경처가 없기 때문이며, ‘좌(坐)’는 요긴한 나루를 차단하여 범부와 성인을 통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고, ‘실(實)’은 참도 없고 거짓도 없어 유위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며, ‘제(際)’는 일체 범부와 성인이 몸담을 데가 없기 때문이다. ‘중(中)’이란 도리어 한 물건[一物]이라고 불러서 움직일 수 없음이고, ‘도(道)’란 삼승과 오성(五性)이 항상 밟아감이며, ‘상(床)’이란 구경에 평온하고 항상하여 안배를 쓰지 않음이다. 

이렇게 7자를 설명한 설잠 스님은 이어서 “비록 그러하나 화장세계는 물듦을 여의어 청정한데 어찌 이와 같은 상량(商量)이 있겠는가?” 라고, 헤아려 설명한 그 전체를 떨쳐버린다. 

그리고 다시 “만약 이와 같은 상량이 있으면 어찌 오늘에 이르렀겠으며, 만약 상량이 없으면 열 가지 보법의 세계는 어느 곳에서 출생하는가”라고 하면서, “불사문 중에는 한 법도 버리지 않는다[佛事門中不捨一法]”라고 그 의미를 살려낸다. 

그리고는 또 다시 “한 법도 보지 않음이 곧 여래이다[不見一法卽如來]”라면서 “모래알처럼 많은 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이고, 일체 성현은 번개가 번쩍함과 같다”라고 마무리하고 있다. 

유문 스님은 구경의 의미가 ‘궁’이고, 들어가 증득함이 ‘좌’이며, ‘실제중도상’은 원융무애 일미법계라 한다. 즉 “궁좌실제중도상”이란 구경에 원만히 증득하여 본제에 돌아간 것이니, 이것이 여래출현의 본뜻이라고 강조한다. 

‘여래출현품’에서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것은 중생들에게 사모함을 내어 방일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것 또한 출현하시는 모습인 것이다. 

이상을 부연한다면 의상 스님은 무주·무분별의 법성을 궁극적으로 증득한 것을 실제중도라 하고, 이 중도자리에 궁극적으로 앉는다는 것은 법계의 열반 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일체를 거두어 지니는 것이라 한다. 즉 무주법성중도이고 무측중도인 것이다. 그리하여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이라고, 수행자의 이익 얻음을 총결하는 것이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502 / 2019년 8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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