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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죽음으로 일군 수국사와 진관사

유생들의 모함으로 처참한 죽음…전등의 불빛으로 역사에 남아

교종 통솔 판교종사 설준 스님
정인사 대작불사 이뤄냈지만
유생들 매도로 군역 참형 비운

진관사 중창불사 한 각돈 스님
1470 화엄경판 대작 완성에도
간통죄 뒤집어 쓰며 죽임 당해

​​​​​​​성종 때부터 사찰 폐쇄 이어지며
스님들 가혹한 장형·노비로 전락
피땀 흘려 불법홍포 나섰기에
오늘날 불교도 존재할 수 있어

설준 스님의 불사 이후 아름다운 단청과 주변 환경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정인사는 1900년 서울 태화산 자락에 수국사로 다시 짓게 됐다.

조선전기 불교는 억불의 분위기 속에서 급속도로 위축돼 갔다. 세종 6년부터 시작된 일방적 불교교단 통폐합은 불교를 위태로운 지경으로 몰아갔다. 사찰과 스님, 사원전과 사원노비의 축소, 종단 축소 등으로 사찰 규모와 스님의 수가 대폭 줄었다. 후대에 호불군주 세조가 불법을 크게 일으키려 했지만 당시 받은 타격이 워낙 커 큰 힘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세조의 손자 성종 때에 이르러 유교가 더욱 득세하면서 무수히 많은 스님들이 장형이나 참형에 처해졌다. 설산, 원심, 계엄 스님 등이 불법을 홍포한 죄로 참수됐고 설은, 지성, 상명 스님은 위서(僞書)를 작성했다는 모함으로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이들뿐 아니라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스님들도 유생들의 탄핵에 의해 유명을 달리했다.

조선 초 불학을 대표하는 선지식인이었던 설준(雪埈, 1419?~1489) 스님도 유생들의 모함을 비껴가지 못했다. 설잠 김시습(1435~1493)의 스승이기도 했던 설준 스님은 한글창제의 주역이었던 신미 스님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월인석보’ 편찬과 간경도감에서 각종 언해 불전 사업에 참여했던 스님은 1467년 7월 무렵부터 신미 스님과 더불어 두 제자인 학열, 학조 스님과 함께 유생들의 표적이 됐다.

설준 스님은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무덤인 경능의 능침사찰로 지어진 정인사(현 서울 수국사) 주지를 살았다. 정인사는 1459년 세조가 스무살에 생을 마감한 의경세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고양군 동쪽에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당시 설준 스님은 법당을 비롯해 모든 전각의 설계를 맡아 1년 동안 대작불사를 이뤄냈다. 설준 스님이 직접 나서 완성한 정인사는 119칸 대찰로 단청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전한다. 정인사는 이후 왕실의 비호를 받아 번창했고 경관이 뛰어나 이름난 문장가들과 학자들도 자주 찾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정인사를 찾았던 정인지, 최항, 서거정, 노사신, 성임 등의 시가 남아있기도 하다.

설준 스님은 정인사에서 불법홍포에 혼신을 다했다. 스님은 화엄·자은·중신·시흥 4종파를 합한 불교 종파인 교종을 통솔하는 판교종사(判敎宗事)였다. 스님과 백성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정인사로 이어지며 교종의 명맥이 유지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유생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들은 설준 스님에 대해 “본래 음탕하고 방종해 계행이 없으며 부녀자와 풍기문란한 행동을 하는 등 죄가 무겁다”며 논죄해야한다고 읍소했다. ‘성종실록’ 32권에는 서거정을 비롯한 유생들이 설준 스님이 스님으로서 자질이 없다고 매도하면서 율에 의거해 죄를 물은 뒤 군역에 복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장형 80대를 처하고, 죽인 후 머리는 저잣거리에 매다는 등 구체적인 처형 방식을 요구하기도 했다.

성종은 설준 스님의 나이가 60세가 넘었다는 이유로 유생들의 읍소를 무시했다. 하지만 유생들의 공격은 집요했고 얼마 후 스님은 변방인 회령지방에 환송돼 군역에 복무하는 형벌을 받게 됐다. 갖은 핍박에 시달리길 10년, 스님은 1489년(성종 20) 11월 회령 갑사 서영생에 의해 참형됐다. 설준 스님은 김시습의 스승이라는 것 외에는 상대적으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남아있는 기록조차 비판적인 것뿐이다. 조선 전기 문신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1454~1492) 만이 ‘정인사에 묵으며 설준화상께 올리다’라는 시를 남겨 스님을 추모했다.

파도 높은 세상 인심 십 년 동안 겪다/ 오늘은 스님 방에서 외간의 벗 만났다.
삼경에 달 떨어져 온 세상 캄캄하니/ 어찌하면 스님의 무진등 전해 받을까.
종이 이불 싸늘해 꿈도 못 이루었는데/ 향반의 물시계 다해 절로 종이 울린다.
산사람은 일찍 창문 엶을 괴히 여길 터/ 앞 봉우리 푸른 산 기운 보기 위해서.

조선 태조 때부터 수륙재 근본도량으로 명성을 떨쳤던 진관사는 2013년 진관사수륙재가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면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설준 스님이 형벌을 받을 무렵, 진관사 간사승(幹事僧)이었던 각돈 스님(覺頓, ?~1477)도 유생들의 탄압 속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었다. 간사승은 나랏일에 스님들이 동원될 때 일을 맡아서 지휘·감독하던 스님으로 각돈 스님은 진관사 중창불사에 큰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불교는 비록 권력자들의 종교로서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민간의 욕구를 반영하면서 생활 속 종교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가뿐 아니라 왕실에서도 불교식 제례는 끊이지 않았다. 주로 왕실의 안녕과 내세를 위한 기원이었다. 백성들의 생활과 직결된 가뭄을 이겨내기 위해 스님들이 기우제에 동원되기도 했다.

왕실이 주도한 대규모 수륙재는 진관사에서 해마다 봉행됐다. 실록에 따르면 태조는 1397년(태조 6) 진관사에 여러 차례 행차해 수륙재를 지냈다. 태종도 1413년(태종 13) 14살 때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난 넷째아들 성녕대군(1405~1418)을 위한 수륙재를 진관사에서 지냈다. 때문에 태종은 진관사에 종종 향을 보내거나 물품을 보시했다. 수륙재는 해마다 1월~2월15일 사이에 열렸는데 세종 때 사찰이 훼철돼 수륙재를 지낼 수 없는 해가 있었다. 1449년(세종 31) 때다.

‘세종실록’ 124권에 따르면 세종은 우의정 황보인에게 진관사를 수리할 것을 명한다. 태조가 두세 번 거동한 곳으로 퇴락을 그냥 둘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세종은 진관사를 수리하는 간사승을 정해 쌀 400석과 면포 200필을 하사했다.

청계사 주지 소임을 봤던 각승 스님도 간사승 중 한 명으로 참가했다. 불사가 성공적으로 완료되고 주지로 임명된 각돈 스님은 신호 스님과 함께 화엄경판을 만들기로 뜻을 세웠다. 그리고 조선전기 문신인 신효창(?~1440)의 도움을 받아 조판사업을 진행했다. 254판을 새기는 중 신호창이 세상을 떠나 사업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각돈 스님은 멈추지 않았다. 태종의 딸인 경정공주와 아들 효령대군의 도움으로 화엄경판 1470판이라는 대작을 완성했다. 이렇게 각돈 스님은 숭유억불시대에도 왕실의 도움과 존경을 받는 고승이었다.

하지만 실록에 나타난 각돈 스님에 대한 평가는 민망할 정도다. 세종실록 124권에 나타난 각돈 스님은 “간사승 중에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로서 여러 고을에 횡행하면서 조금만 그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모함하여 죄를 받게 하였다”고 나타나 있다. 욕정에 가득한 이로 몰리기도 했다. 유생들은 각돈 스님이 “재산을 축재하고 사통했다”며 하옥을 상소하기도 한다. 1453년(단종 1), 결국 옥살이를 하게 된 각돈 스님은 간통죄까지 뒤집어쓰며 1477년(성종 8) 12월 목이 베어 죽음을 당하고 만다.

성종 7년 15만명이 달하던 스님의 수는 불과 4년만에 10만명으로 줄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불교를 장려했던 세조 때 숨죽여 지내던 성리학자들이 성종이 13세 어린나이에 즉위하자마자 폐불을 주장했기 때문이라는게 연구자들의 의견이다. 조정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고 불교를 비방하는 상소가 하루에만 대여섯 건이 넘게 올라왔다. 사찰은 폐쇄됐고 스님은 군대에 들어가거나 머리를 기르고 노비가 돼야만 했다.

태조 대에서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참형을 당한 스님은 실록에 의거해 보아도 그 수가 적지 않다. 참형까지는 아니라도 유생들로부터 가혹한 비판과 수모로 하옥, 장형, 유배 또는 천민으로 떨어진 스님들도 많다. 온갖 탄압과 생명을 위협받는 위험 속에서도 일부 선각적인 스님들은 오로지 불법 홍포와 수호를 위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다. 산중에서 묵묵히 수행과 교화로 조선불교를 지킨 고승들도 적지 않았지만 불교계 전면에 나서서 피와 땀을 흘려 불법홍포에 나선 고승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조선불교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의 억불정책이 가속화되는 가운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법을 전파하겠다는 이들의 위법망구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불교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설준 스님의 불사 이후 아름다운 단청과 주변 환경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정인사는 1504년(연산군 10) 화재로 소실돼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몇 번의 중수를 거쳐 1900년(광무 4) 현재 위치인 서울 갈현동 태화산 자락에 다시 짓게 됐다. 한국전쟁으로 건물 대부분이 파괴됐지만 중창불사를 거듭했고 1995년 주지 자용 스님이 법당 안팎을 금으로 개금했다. 현재는 조계사의 말사인 수국사로 황금보전과 대웅전, 관음전, 요사채 만이 남았지만 역사와 전통을 가진 서울 서북부지역 대표 도심 사찰로 자리매김 했다.

수륙재 근본도량으로 명성을 떨치던 진관사는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됐다가 1960년대 재건하면서 옛 가람의 자취를 찾게 됐다. 2009년 보수작업 도중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 독립운동 관련 유물이 발견되면서 백초월 스님의 독립운동사를 간직한 사찰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2013년에는 진관사수륙재가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면서 의식, 설단, 장엄 등 수륙재의 여러 분야에 대한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다. 600년 전 숭유억불 속에서도 수륙재로 법등을 밝혀나갔던 그 모습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503호 / 2019년 9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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