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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4대 총무원장 녹원 스님-하

‘포용 리더십’으로 종단 갈등 수습…동국대 명문사학 도약 토대 마련

불교정화추진위원 등 활동하며 통합종단 조계종 출범 산파
40년간 직지사 주지로 65동 전각 복원…교구본사 사격 회복
동국대 이사·이사장 역임하며 불교종합병원 건립 기틀 다져

조계종 24대 총무원장 녹원 스님은 1986년 5월30일 종단의 숙원이었던 경승단을 출범시켰다.  출처=‘오녹원 스님 학연기’

현대조계종사는 부침의 연속이었다. 통합종단조계종이 출범하기까지 비구·대처의 갈등을 겪어야 했고, 불교정화 이후에는 종단운영 주도권을 두고 대립과 반목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때론 종단이 분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계종이 오늘날 전통종단으로서 명맥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은 불교재건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몇몇 스님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녹원 스님도 그런 인물이었다.

스님은 1950년대 비구·대처 갈등이 심화되자 불교재건비상종회위원을 맡아 통합종단조계종 출범의 토대를 닦았고, 1970년대 조계종이 개운사·조계사 측으로 양분됐을 때는 본사주지연합회장을 맡아 양측을 중재, 통합하는 데 일조했다. 그런가하면 낙후된 김천 직지사를 중창해 교구본사로서의 사격을 일궜고, 30년 가까이 동국대 이사와 이사장을 맡아 종립대학 동국대가 명문대학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스님의 삶을 되짚는 것은 지난했던 현대조계종사를 톺아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녹원 스님은 1928년 3월 경남 합천군 치인리에서 태어났다. 마을 인근에 해인사가 있어 어려서부터 절을 찾는 일이 많았고, 자연 불심이 깊어졌다. “스님들을 볼 때면 환희심이 났고, 처음 해인사에서 부처님을 친견했을 때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불교신문, 1998년 3월17일자) 그런 인연은 스님을 출가로 이끌었다.

녹원 스님은 1940년 7월 김천 직지사에서 당대 선지식 탄옹 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었다. 탄옹 스님은 어린 나이에 출가한 녹원 스님을 각별히 아꼈다. “수행자는 말보다는 행이 앞서야 한다”고 했고, “언제나 하심 할 것”을 강조했다. 1년여의 행자생활은 스님이 평생 출가수행자로서 견지해야 할 삶의 자세를 하나하나 익히는 시간이 됐다.

1946년 직지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한 스님은 이후 선학원 중앙선원과 직지사 천불선원에서 두 번의 안거를 지내며 구도의 길에 나섰다. 1948년 한암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은 이후에도 양주 보문사 보문선원과 직지사 천불선원에서 7안거를 성만했다. 약관의 나이였지만 스님의 구도행은 치열했다. 한번 정진에 들면 몇 시간이 지나도록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모두 수행의 과정이라는 은사 탄옹 스님의 영향”이기도 했다.

그랬던 녹원 스님은 1954년 직지사 재무 소임을 맡으면서 직지사 재건을 발원했다.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선지식들이 주석하며 불조의 혜명을 이어온 선종대찰이었다. 한때 전각이 250동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됐고, 한국전쟁을 겪으며 그마저 남아 있던 전각들도 전소되면서 사실상 폐사 위기에 놓여 있었다.

1958년 30세 나이에 직지사 주지를 맡은 녹원 스님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중창불사에 착수했다. 흩어져 있던 직지사 사적기를 모아 책으로 발간하고, 전각 하나하나를 중수하거나 신축하면서 웅장했던 옛 가람의 면모를 되찾아 나갔다. 녹원 스님이 1990년대 후반까지 40여년간 직지사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복원하거나 신축한 전각이 65동에 이른다. 녹원 스님이 직지사 중창주로 불린 것도 이 때문이다.

녹원 스님의 불사원력은 종단 재건으로도 이어졌다. 불교정화운동이 한창이던 1961년 비구 측 불교정화추진위원으로 추대됐고, 1962년 2월 불교재건비상종회의 비구 측 위원으로 선출돼 통합종단조계종 출범의 산파 역할을 담당했다. 통합종단조계종이 출범한 이후 1~7대 중앙종회의원에 내리 선출되면서 조계종을 일신하는 데 기여했다. 온화한 성품에다 종무행정에도 탁월해 스님은 비교적 이른 나이부터 종단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68년 11월 2대 중앙종회에서 40대의 나이로 부의장에 뽑혔고, 3대 중앙종회 수석부의장에 이어 1975년 12월에는 4대 중앙종회의장에 선출됐다. 1980년 4월 조계종이 종정중심제 논란으로 2년 7개월간 조계사·개운사파로 나뉘어 고착상태를 거듭하자 스님은 10여명의 교구본사주지들과 함께 중재에 나서 분규종식을 이끌어냈다. 10·27법난의 여파로 새롭게 구성된 7대 중앙종회에서도 녹원 스님은 다시 중앙종회의장으로 선출돼 종단혼란을 수습했다. 그랬기에 녹원 스님은 1980년대 잦은 총무원장 교체로 혼란이 이어질 때마다 차기 총무원장 후보로 꾸준히 거론됐다. 1984년 8월1일 원로회의가 비상종단을 해체하고 이른 시일에 종단을 수습할 적임자로 녹원 스님을 선택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일 수 있었다.

24대 총무원장에 오른 녹원 스님은 취임과 동시에 빠르게 종단을 정비했다. 비상종단 해체과정에서 분열된 종단을 수습하기 위해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비상종단에서 배제됐던 인물들을 집행부에 기용했고, 비상종단에 참여했던 소장파 스님들도 포용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1984년 8월18일 원로회의를 통해 종헌도 개정, 중앙종회의원 수를 35명에서 65명으로 확대했다. 이는 몇몇 종회의원이 종회를 좌지우지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포석일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중앙종회는 8월31일 8대 중앙종회를 개원하고 불국사 주지 월서 스님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봉주 스님과 정대 스님도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그동안 중앙종회 의장단 선출은 경선으로 진행했지만 이날만큼은 만장일치 추대로 결정됐다. “종단이 내외로 어려웠던 혼미상태에서 대동 화합해 8대 중앙종회를 발족한 만큼 화합종회를 만들어야 한다”(정대 스님, 8대 중앙종회회의록)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중앙종회의 안정은 녹원 총무원장 체제에 우군이 됐다. 그해 10월28일 비상종단 소속 스님 40여명과 신도 10여명이 총무원 청사를 난입한 사건으로 시끄러웠던 종단을 조기에 수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다.

녹원 스님은 중앙종회의 지지 속에 이듬해부터 종단 제도개혁에 착수했다. 녹원 스님이 종단 운영에 역점을 둔 것은 교육사업이었다. 승가대학 설립을 추진했으며 스님들의 자질 향상을 위해 처음으로 승가고시제를 도입했다. 1985년 3월 82회 임시중앙종회에서 통과된 승가고시법은 1975년 이후 사미·사미니계를 받은 모든 스님들을 대상으로 각 경력에 따라 1급~5급까지 일정한 자격시험을 치르도록 하는 것이 골자였다. 무자격 스님들의 양산을 막고 재교육을 통해 스님들의 자질향상을 돕자는 취지였다. 각급 고시를 통과해야만 종단의 소임을 맡을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함으로써 강제성도 부여했다. 승가고시제도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녹원 스님은 불교의 위상제고에도 앞장섰다. 스님은 그해 5월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10주년을 맞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100만명이 참여하는 봉축법회를 개최했다. 봉축법회에 100만명의 신도가 참여하는 것은 통합종단조계종이 출범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86년 2월 신흥사 폭력사태로 속초시장이 관리해 오던 신흥사 재산관리권을 환수했고, 5월에는 경승단도 발족했다. 경찰불자들의 신행활동과 포교를 위한 경승단 발족은 조계종의 오랜 숙원이었지만 기독교계의 반발로 번번이 무산돼 왔다. 그러나 녹원 스님은 정부를 꾸준히 설득한 끝에 그해 5월11일 내무부로부터 “1986년 6월부터 경찰들을 상대로 교화사업을 시행하라”는 통지문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조계종은 그해 5월30일 서울 조계사에서 경승단 발족법회를 열고, 전국 195개 경찰관서에 처음으로 경승법사 164명을 위촉했다.

녹원 총무원장 체제가 2년여 가까이 진행되면서 조계종은 안정을 찾았다. 비록 불국사, 월정사, 신흥사 주지 문제를 두고 잡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1980년대 초 잦은 총무원장 교체의 배경이 됐던 갈등으로까지 비화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녹원 스님의 총무원장 체제는 임기 때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녹원 스님의 발목은 잡은 것은 총무원장과 동국대 이사장의 겸직문제였다. 녹원 스님은 1985년 1월 영암 스님이 건강악화로 동국대 이사장에서 물러나자, 이사장 직무대행으로 선출된 데 이어 1985년 7월6일 동국대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전임 이사장 영암 스님의 잔여임기 2년을 맡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종단의 요직으로 꼽혔던 총무원장과 동국대 이사장을 녹원 스님이 겸직한 것에 대해 종단실력자들의 시선이 고울 리가 만무했다. 때문에 중앙종회의원들은 종회가 열릴 때마다 이 문제를 거론했다.

‘8대 중앙종회회의록’에 따르면 1985년 7월12일 열린 제83회 임시중앙종회에서 녹원 스님의 겸직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이날 총무원장 녹원 스님은 “동국대 이사장은 전 원장 진경 스님이 양보해 만장일치로 잔여임기 2년을 맡게 됐다”면서 “동국대가 명문대학으로 발전하도록 2년 동안 최선을 다하겠다. 여건이 안 되어 딱 잘라 약속할 수는 없으나 동국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의현 스님은 “현 원장스님께서 큰 대임을 두 개를 맡았는데 인간의 시간적, 공간적, 능력 등을 생각할 때 한계가 있으니 100%를 한 군데에 발휘해야 하리라 본다. 안정, 화합에 저해되는 요인이 있다면 제거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진경 스님은 논란이 커질 것을 우려한 듯 “동국대 이사장관계는 총무원장 스님께서 이사회 석상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고 중재했다.

이로 인해 논란은 마무리됐지만 녹원 스님의 겸직 문제는 이후에도 꾸준히 제기됐다. 차츰 총무원장과 중앙종회 사이의 대립도 점차 커졌다. 급기야 1986년 8월 86회 임시회를 앞두고 노골적으로 표출되면서 중앙종회의원들 사이에서 ‘총무원장 불신임설’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녹원 스님은 대응에 나섰지만 상황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녹원 스님은 그해 8월22일 기자회견을 열어 총무원장 사퇴를 선언했다.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녹원 스님은 동국대 이사장으로서 학교 발전에 매진했다. 1990년~2002년 이사장을 연임하면서 동국대 의과대 경주병원을 개원한 데 이어 운영에 어려움을 겪던 의료원 산하 포항병원, 경주 한방병원 등을 정상화 시켰다. 일산에 제3캠퍼스 건립을 추진하고 불교종합병원 건립을 위한 기공식도 진행하는 등 종립대학 동국대가 명문대학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

1997년 조계종 원로의원에 선출된 스님은 2003년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기도 했다. 이후 2007년 직지사 조실로 추대돼 후학양성에 앞장섰던 스님은 2017년 12월27일 평생 주석처인 직지사에서 법랍 77세, 세납 90세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20호 / 2020년 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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